13화
마리아는 노라의 발목을 잡아 한 바퀴 돌려 그녀를 쓰러뜨렸다.
“우아아!”
싸움 구경을 하던 인부들이 마리아의 반격에 탄성을 지르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아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어차피 힘으론 노라를 이길 수 없으니 싸울 만한 무기가 필요했다. 그때 바닥에 뒹구는 나무 막대가 보였다. 마리아는 재빨리 달려가 막대를 손에 쥐었다.
“그 막대기로 나를 이겨 보겠다는 게야?”
노라가 씩씩거리며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래, 이런 막싸움에 규칙이 어딨어.’
더는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을 생각이다. 잘못했다면 응당 그에 대한 처분을 달게 받겠으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저들이었다. 약하고 만만한 사람을 정해 놓고 다 같이 괴롭히며 따돌리는 것보다 잔인한 폭력은 없으니까.
“마리아!”
마침 화장실을 다녀온 에로가 마리아를 말렸다. 하지만 이미 사태는 심각해져서 다른 여자들이 에로를 마리아한테서 떼어 놨다.
“넌 끼어들지 마.”
저들에게 이런 싸움 구경은 크나큰 유흥거리인지,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에로의 시선이 자신의 텅 빈 가죽 통으로 향했다. 이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일,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자신은 익숙하나 마리아에겐 불합리하게 느껴졌을 터. 한데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마리아가 버티지 못할 거야.’
꼬박 하루를 넘게 굶은 탓에 마리아는 막대기를 움켜쥔 채로 몸을 떨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몸에 힘이 남아 있지 않아서였다.
‘어려운 사람들끼리 왜 이러는 거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마리아는 노라를 경계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어째서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싸우고 괴롭히며 살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귀족들은 다 때려죽여야 해. 거머리 같은 인간들!”
노라는 마리아를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순간 마리아는 이곳 사람들이 저와 에로를 배척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귀족에 대한 강한 반발심, 별종이란 인간을 향한 혐오감이 이유였다.
“내 남편은 악마 같은 영주 놈한테 몽둥이로 맞아 죽었지. 내 새끼들은 노예 시장으로 죄다 끌려가고.”
노라는 자신의 울분을 마리아에게 토해 냈다.
“!?”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노라의 얼굴에서 그녀 안에 깊이 드리운 증오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은 전쟁터에 끌려가서 개죽음을 당했다고.”
“우리 부모님은 세금을 못 냈다고 목을 매달아서 성문에 걸어 놨어요.”
“악독한 영주 놈이 내 하나뿐인 딸을 매음굴에 강제로 팔아 버렸지 뭐야.”
“우리 집은 한밤중에 불타 버렸어요. 흉년이 심하게 들어서 세금을 못 낸 건데…….”
사람들은 각자 비극적인 과거를 꺼내며 울분을 터뜨렸다. 마리아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사실 자신이 겪은 일이 가장 처참하다고 여겼다. 본디 사람은 이기적이니까. 한데 세상에는 힘든 일을 겪은 이들이 참 많았다. 제 귀로 듣고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아이참! 당신들한테 상처 준 사람이 마리아는 아니잖아요!”
에로가 노라에게 맞서며 소리쳤다.
“더러운 변태 새끼는 꺼져!”
노라가 포악하게 소리치며 에로를 밀쳤다. 마리아는 그 광경을 보곤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비극을 자신이 책임질 이유는 없으니까. 그녀는 노라를 향해 손에 든 막대기를 휘둘렀다.
* * *
군터는 솔샤르를 통해 작업장에서 발생한 소란에 대해 전해 듣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리아의 얼어 버린 심장이 조금씩 녹고 있다는 좋은 징조니까.
“어찌 처리할까요? 전후 사정을 들어 보니 그 작업장 책임자의 잘못이 큽니다.”
“노라라고 했나?”
“예.”
“상태는 어떻지?”
“마리아 님이 제대로 혼내 주셨더라고요.”
솔샤르는 마리아가 나무 막대기를 검처럼 현란하게 휘둘러 마리아를 제압한 일에 관해 설명했다.
‘기특하네.’
“하극상이군.”
속마음과 달리 말은 차가웠다.
“예? 하지만 그건…….”
“규칙대로 처리해.”
불합리하고 독단적인 권력에 휘둘리는 일. 마리아에게 필요한 경험이었다. 분하여 저항하다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는 약자가 되어 봐야 장차 강해질 터.
“이틀간 독방에 가둬. 당연히 물 한 모금 주지 마라.”
“대왕! 그러다가 마리아 님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 여자는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대왕, 마리아 님이 강해지길 원하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솔샤르는 군터의 속내를 너무 잘 알았다. 그녀를 완전히 장악하고 싶은 욕망을 거창하게 포장하려는 것일 뿐.
“맞아.”
군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이는 다 속여도 어릴 때부터 함께한 솔샤르를 어찌 속일까. 사실 마리아가 강해지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죽을 생각만 하는 그녀를 정신 차리게 할 의도였으나 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깨닫게 해 줄 거다.”
군터는 날 선 콧대를 올리며 도도하게 대답했다. 그는 대충 표정을 지어도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였다. 특히 잘 다듬어진 옆모습은 완벽에 가까웠다.
“내 발등에 입 맞추며 목숨을 구걸하게 해야지. 나만 아는 바보 천치가 돼 버렸으면 좋겠다.”
그의 대답에 솔샤르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군터는 자신이 마리아의 유일한 남자이며 주인이 되어 그녀를 장악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길을 들이겠다는 거네. 쉽지 않을 텐데.’
솔샤르가 보기엔 군터가 약자였다. 더구나 마리아가 진짜 바보 천치였다면 이미 그녀는 그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을.
“정확히 이틀 뒤에 마리아를 내게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대왕.”
* * *
마리아는 숨을 가쁘게 쉬었다. 축축한 흙바닥에 사방이 어두운 곳. 나무 벽에 난 작은 틈 사이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빛을 쬘 수가 있었다. 노라를 혼내 준 건 통쾌했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헬랜드 병사들이 마리아를 끌고 와, 이곳 독방에 가둬 버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무리 따져 봐도 모르겠다. 부당한 짓거리도 그들이 했으며, 제게 폭력을 쓴 것도 노라가 먼저였다.
‘난 방어했을 뿐이야.’
하지만 결론은 제 잘못이었다. 선참에게 대든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규칙을 어기는 것이기에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단다. 이런 채석장도 황궁과 다르지 않다니. 팽팽한 권력 싸움을 하고 패배하면 이렇게 대가를 치르게 된다. 분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며 목구멍이 찢어질 듯이 건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가 고파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딱 물 한 방울만 맛보면 좋으련만. 이런 음습한 곳에서 굶어 죽을 수도 있는데 왠지 죽고 싶지가 않았다.
‘염치없지만…… 살고 싶어.’
순간 사람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듯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귀족들이 얼마나 잔혹한 족속인지, 그로 인해 자신들의 인생이 어떻게 파탄이 났는지 울분을 토하던 말들. 저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안고 사는 게 아님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많아도 자신이 가장 비참하다 여긴 것도 사실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울분과 고통을 가슴에 묻은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끝내 가슴까지 벅차오른 눈물이 밖으로 솟구쳤다.
“아……지, 어으머니.”
부모님을 향한 지독한 그리움이 거센 파도처럼 마리아를 덮쳤다. 그들을 제대로 불러 보기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제 목구멍에는 여전히 풀지 못한 원한이 돌처럼 박혀서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헨리보다 더한 지옥에 끌려온 건가.’
간신히 교수형은 피했으나 군터라는 잔혹한 지옥이 도사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아지.”
부모님이 그립다 못해 리베리오도 보고 싶었다. 마리아는 비굴하리만치 제 가족에게 애원했다. 자신을 살려 달라고. 하지만 얄궂게도 살고자 하니 죽음이 목전까지 찾아온 모양이다.
‘나는 이렇게 죽을 거야.’
참으로 허망한 인생이었다. 그토록 죽으려 아등바등할 땐 기회조차 없더니……. 마리아는 서럽게 울다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잠든 걸까. 황무지의 바람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에 눈을 떴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의 남자. 청록빛 눈동자에 예쁜 이목구비. 마치 정령처럼 온몸에서 빛이 났다.
“마리아.”
‘누구지? 스톤을 닮았어.’
하지만 스톤일 리는 없었다. 아! 자신을 데리고 죽음의 강을 건너려는 길잡이인가 보다. 한데 사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남자였다.
“조금만 더 기운을 내. 너를 돕고 싶지만 내 주인을 거역할 수가 없어.”
“!?”
그때 바짝 마른 마리아의 입술에 이슬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
마리아가 불현듯 잠에서 깨자, 문이 활짝 열리며 제 앞에 검은 인영이 드리웠다.
“가자, 대왕께서 부르신다.”
‘벌써 이틀이 지났나.’
마리아가 정신을 온전히 차리기도 전에 병사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갔다. 두 발이 흙바닥에 질질 끌린 채로, 수증기처럼 아슬아슬한 의식이 흩어지지 않으려 그녀의 몸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내 육중한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마리아를 압도했다. 곧 밀려오는 강한 냄새. 커다란 탁자에 온갖 과일과 고기 요리가 즐비하고 갈증을 해결할 포도주가 크리스털 병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탁자의 가운데에 자리한 사람이 보였다.
“가 봐.”
군터의 명령에 군사들은 마리아를 놓아주곤 사라졌다. 그녀는 그대로 힘없이 주저앉아 미약하게 숨을 이어 나갔다.
“마리아.”
군터가 그녀를 불렀다. 이내 마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군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놓인 과일과 음식, 그리고 저 차가운 포도주만이 선명할 뿐이다. 마리아는 퀭한 눈으로 음식을 쏘아보다 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올렸다. 그때 군터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포도주를 잔에 가득 따라 마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포도주를 들곤 그녀 앞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목마른가?”
그의 물음에 마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셔.”
군터는 음미하듯 포도주를 마시며 마리아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