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마리아는 정신이 혼미했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 하지만, 현재 제게 남은 건 살고자 하는 본능뿐이었다. 앞에 서 있는 군터도 무의미했다. 그녀에게 보이는 건, 갈증을 해소해 줄 포도주와 속을 할퀴는 허기를 채워 줄 음식뿐이었다. 체면 따위가 뭐라고, 일단 뭐라도 입에 욱여넣기를 바랐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배고픔이었다. 사람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자신이 아사 직전까지 갈 줄이야. 그때 군터는 마시던 포도주를 마리아 앞에 쪼르르 흘려 버렸다.
“마셔.”
마리아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내밀곤 위에서 쏟아지는 포도주를 손으로 받아 마셨다.
‘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가 갈증을 해소할 때의 희열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한때는 라스토니아의 고귀한 황후 마리아 스튜어트였건만, 이젠 포도주로 갈증을 식히느라 제 얼굴을 붉게 더럽히는 비루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부족했다. 갈증과 허기가 완전히 사라지려면 더 많은 술과 음식이 필요했다. 마리아는 애절한 얼굴로 군터를 바라보았다. 자존심 따위 개나 주라지.
“여기에 있는 음식과 술, 다 네 것이다.”
군터의 말에 마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다만.”
“?”
“내가 주는 대로 먹어라.”
‘개처럼 받아먹으라는 거야?’
마리아가 사뭇 놀라자, 군터의 입술이 심술궂게 올라갔다.
“왜 못 하겠나?”
‘그럴 리가?’
예전의 마리아였다면 치욕적이라 여기며 차라리 죽겠다 했겠지. 체면과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존귀한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황무지에 뿌리를 내리려는 잡초에 불과했다. 그 잡초가 얼마나 질긴지, 저 자신도 알고 싶어졌다. 스튜어트가의 공녀였으며 라스토니아의 황후였던 스스로를 바닥까지 다 내려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다. 그때 군터가 손으로 포도 알을 들었다. 마리아는 거침없이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포도 알을 입으로 덥석 물었다.
‘달콤해.’
맛 외에는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가 고깃덩이를 들자 마리아는 그의 손을 부여잡곤 단번에 물었다. 심지어 그의 손에 묻은 소스도 탐이 나 자신도 모르게 군터의 손가락을 입술과 혀로 빨았다.
“!”
마리아는 허기를 채우느라 본능에 충실했지만, 크게 당황한 건 군터였다. 고고한 마리아 스튜어트의 변화가 놀라우나, 그녀가 제 손가락을 핥는 것은 크나큰 자극이었다. 등줄기에 전율이 일 만큼. 곧 군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일부러 잘 익은 닭 다리를 손에 들곤 마리아에게 내밀었다. 혹자에겐 자신의 애완견에게 고깃덩어리를 주는 모습으로 보일 터였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닭 다리를 쥔 군터의 손을 꼭 쥐곤 야무지게 먹었다. 뼈에 붙은 작은 살점까지 뜯어 먹은 뒤, 또다시 그의 손에 묻은 소스까지 혀로 길게 핥았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기름에 번들거리고 그 사이를 날름거리는 붉은 혀, 제 손등에 닿은 말캉한 감촉에 온몸이 경직됐다. 순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재밌네.’
전혀 재밌지 않았다. 욕망은 솔직해서 그녀가 하는 대로 커져 버리니까. 마리아의 식탐에 제 안에 있는 짐승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녀가 어떤 과감한 행동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니, 더한 자극을 받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군터는 무화과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마리아는 분명 망설일 터. 또한 자존심 상해 할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군터를 향해 바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부여잡곤 그의 입에 물린 무화과를 제 입으로 가져왔다. 이내 그녀가 떨어지려 하자, 군터는 반사적으로 마리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 입 안에서 씹히고 있는 무화과를 도로 가져와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채 혀로 그녀의 입 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읍!”
두 사람의 입 안을 오가는 무화과. 서로 다투듯이 혀가 얽히고 타액이 섞였다. 마리아는 한 조각도 빼앗기지 않으려 되레 그 입 안으로 혀를 넣어 훑었다. 하지만 군터는 기다린 것처럼 그녀의 혀를 자신의 것으로 엮어 버리곤 거칠게 흡입했다. 순간 집요하게 굴던 마리아가 군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왜 그러지? 이젠 배가 찼나?”
군터의 말에 마리아는 대꾸조차 없이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생각에 빠진 듯했다.
[아니! 음식을 먹을 때는 손이 아니라,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야죠.]
아주 오래전의 기억인가 보다. 자신이 한 소년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소년이 손으로 음식을 마구잡이로 먹자, 그의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여 주곤, 먹는 순서를 하나씩 알려 주었다. 한데 그 소년의 얼굴이 여전히 희미한 인영으로만 보일 뿐,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였지.’
그때와 현재……. 단순한 기시감인 걸까. 아니면 실제로 존재했던 일이었을까. 마리아는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배가 다 찬 것 같으니 치워야겠군.”
군터의 말에 마리아는 옛 기억을 떨쳤다. 그녀는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아니라고 답했다. 배가 다 차기는커녕 아직 시작도 못 한 것을. 이내 군터는 크리스털 잔에 포도주를 가득 담아 제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마리아, 이젠 편하게 먹고 싶은 대로…….”
말을 다 끝내기 직전, 그가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에 찰랑대던 포도주가 군터의 목과 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응당 마리아는 그의 몸에 흘러내리는 포도주를 입술로 빨았다. 주는 대로 먹으라 했으니 명령에 충실해야 할 터.
‘헉!’
군터는 미처 예상 못 한 마리아의 행동에 크게 놀랐다. 그녀가 제 몸에 쏟아진 포도주를 핥는 광경이 마치 애무를 받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느낌은 같았다. 그녀의 의지가 다를 뿐이지. 군터는 끓어오르는 신음을 잇새로 천천히 내쉬었다. 이쯤 하면 정상적인 남자도 인내의 끈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마리아의 가슴을 움켜잡으려 했다. 무엇으로 시작했든, 당장 그녀를 가지고 싶은 열망이 머리끝까지 절절 끓어올랐다. 군터가 하얀 모피가 깔린 의자에 몸을 눕히자, 마리아는 그의 굴곡진 가슴 근육을 따라 흐르는 포도주를 열심히 빨아 먹었다. 누가 본다면 이건 아주 야한 광경으로 오해할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둔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왕!”
‘저 빌어먹을 새끼!’
군터는 눈치 없이 들어온 솔샤르를 죽이고 싶었다. 잠시 석상처럼 굳은 채 군터와 마리아를 바라보던 솔샤르는 곧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 * *
헨리와 모니카는 오랜만에 시간을 가졌다. 곁에 있던 시녀가 두 사람에게 향긋한 차가 든 찻잔을 건넸다. 오늘은 낸시와 로랑이 아닌 모니카와 중요하게 논의할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 로랑과 낸시 중에 누구를 황후로 책봉할지 고민이에요.”
“누구를 더 사랑하는데?”
“당연히 로랑을 사랑하죠.”
그런데도 고민이라면 헨리도 거부 못 할 조건을 낸시가 제시한 거겠지.
“헬랜드의 그 짐승 새끼가 마리아를 좋아한대요. 놈이 마리아를 데리고 있는 한, 빚을 갚아도 내주지 않을 거래요.”
헨리는 낸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모니카에게 해 주었다. 10년 전에 있었던 마리아와 군터의 인연에 관해서. 그래서 군터가 애초에 헨리한테만큼은 무담보로 돈을 빌려준 것이며, 마리아에게 위기가 닥치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득달같이 쫓아온 거라 했다. 마침 빚을 갚아야 할 날짜와 겹친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그래? 그럼 낸시한테 더 얻어 낼 정보가 없는 거잖아?”
“그렇지가 않아요.”
헨리는 낸시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상기했다.
[빚을 갚을 테니, 폐황후를 돌려 달라고 해도 헬랜드의 대왕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인즉슨 빚은 큰 의미가 없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폐황후를 이용해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어요.]
[그 짐승 놈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폐하, 저를 황후로 만들어 주세요. 그리해 주시면 제가 폐하의 힘이 되어 드릴게요. 저는 스튜어트 가문에 대해 아는 것이 아주 많아요.]
[예를 들자면?]
[폐황후 앞으로 재산이 있어요.]
[뭐? 그럴 리가 없어. 마리아를 폐위하면서 스튜어트 가문의 재산은 전부 몰수했다고.]
헨리가 놀라자 낸시는 그를 지그시 보며 미소 지었다. 그건 필시 자신을 황후로 만들어 줘야 털어놓겠다는 의미 같았다.
하지만 헨리는 돌아선 채 망설였다. 로랑을 사랑하고 그녀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일을 크게 벌였나. 더구나 로랑의 가문에서 이번에 용병을 보내 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스튜어트 가문을 박살 낼 수 있었다. 라스토니아 최고의 성기사를 보유한 가문을 상대로 승리한 데는 로랑의 공이 매우 컸다. 그런데 낸시를 황후로 책봉한다?
[전 폐하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 때문에 제 주인을 배신했어요.]
낸시는 고뇌하는 헨리를 보며 울먹였다. 사실 마리아를 배신한 건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괴롭지 않은 건 아니다. 매일 악몽을 꾸니까. 자신은 오로지 헨리에 대한 사랑과 배 속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기에 악행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그럴 줄 알았지. 제 주인을 닮아서 낸시 그것이 보통이 아니네.”
내내 헨리의 말을 경청하던 모니카가 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곁에 있던 시녀가 두 사람에게 다소곳이 말을 꺼냈다.
“폐하, 선황후 전하. 차가 식었습니다. 따뜻한 차를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그래라.”
모니카의 허락에 시녀는 찻주전자를 들곤 종종걸음을 쳐 밖으로 나갔다. 시녀는 연신 주위를 살피다가 복도 맞은편에 서 있는 로랑에게 꾸벅 인사했다. 이내 로랑이 고갯짓을 하자, 시녀는 그녀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