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15화 (15/120)

15화

시녀는 헨리와 모니카의 대화를 로랑의 귓가에 속삭였다. 로랑은 시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드레스에 달린 브로치 하나를 떼어 시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시녀는 브로치를 손에 꼭 들곤 한달음에 사라졌다.

‘역시 폐황후에 관한 거였어.’

로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라스토니아의 황제도 돈 앞에선 어쩔 수가 없다.

‘사랑? 개똥 같은 소리 하네.’

로랑의 뇌리에 일전에 마리아가 저를 향해 비아냥거리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로랑, 훗날 너보다 헨리의 아이를 많이 낳는 여자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거고, 귀여움도 많이 받겠구나.]

헨리와 모니카를 향한 배신감과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난 절대 그 여자처럼 안 될 거야.’

그나저나 낸시를 어쩐다?

‘버러지 같은 게 어디서 꼼수를 부리는 거지?’

감히 황후를 꿈꾸다니. 상상은 자유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건 아주 조심해야지. 자칫 즐거운 인생을 일찍 끝낼 수도 있을 텐데. 배 속의 아이를 만나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억울할 테고. 로랑은 저 자신이 한심했다. 마리아라면 모를까. 낸시와 황후 자리를 두고 다툴 줄 꿈에도 몰랐다.

‘폐황후를 이용하면 빚을 안 갚아도 되고 돈도 생긴다?’

그것도 모자라 폐황후에게 숨겨 놓은 재산도 있다니. 한데 헨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헨리의 머리가 나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네.’

멸문된 가문의 재산은 모두 황실 소유가 돼 버린다. 그런데도 따로 재산이 있다면 그건 필시……!

‘교황이 준 재산이겠지.’

한데 헨리의 생각이 그것에는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 재산을 빼앗으려면 폐황후의 동의와 인장이 필요할 터.

‘애초에 폐황후를 죽여 버렸어야 했어.’

그랬다면 낸시 따위와 황후 자리를 놓고 시답지 않은 다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제 주인을 닮아서 그런가. 낸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얕봤다간 크게 당할 터.

‘폐황후를 완전히 없애야겠어. 그래야 낸시가 더는 까불지 않지.’

로랑의 얼굴에 살기가 등등했다.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 * *

며칠 뒤, 작업장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노라와 인부들은 더 이상 마리아와 에로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도 작업장 한옆에 서 있는 솔샤르 덕분인 듯싶었다. 아니면 당하지만 않고 반격한 마리아를 더는 만만하게 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

노라는 솔샤르를 보곤 생각에 잠겼다.

[노라, 그만 멈춰라. 마리아 님은 대왕의 여자다.]

[예? 예. 알겠습니다.]

마침 솔샤르가 에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손으로 에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치 칭찬하듯이.

“마리아 님을 도와줘서 고맙다.”

“!?”

에로는 화들짝 놀라 솔샤르를 바라보았다. 대왕의 부관이 지금 제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건가. 한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솔샤르라는 남자…… 꽤 준수했다. 이내 에로가 얼굴을 붉혔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혀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라.”

솔샤르는 에로에게 마리아를 신신당부했다. 그러자 에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야.’

솔샤르는 마리아의 상태가 점점 호전되는 것에 안도했다. 또한 그날 이후로 언짢던 군터의 심기도 많이 풀렸다. 물론 눈치 없이 굴어서 군터의 눈총을 받긴 했지만. 솔샤르는 자리를 뜨기 전, 마리아를 따로 불렀다. 그녀에게 군터의 말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님, 일이 끝나면 잠은 대왕의 처소에서 주무십시오.”

‘군터, 그 남자 옆에서 자라고?’

그냥 인부들의 숙소에서 자는 게 편한 것을. 딱딱한 나무 침대지만 에로 옆에서 자는 게 좋았다. 에로는 여자보다 더 세심하고 편한 사람이었다. 제게 자매는 없지만, 만약에 있다면 에로 같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씁쓸함에 가슴이 쓰렸다.

‘에로를 좋아해도 될까? 아니, 믿어도 되려나.’

자매라고 믿었던 낸시의 배신은 지금도 믿기지 않는 것을. 어찌 됐든 군터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솔샤르가 작업장을 떠나고 에로가 득달같이 쫓아왔다.

“뭐야, 뭐야? 저 남자가 뭐라고 했는데?”

에로가 얼굴까지 붉히며 물었다. 그러다 마리아가 말을 못 한다는 것을 상기하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머! 나 좀 봐. 실수해 버렸네.”

마리아는 민망해하는 에로에게 고개를 저으며 웃어 주었다. 마리아와 에로는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이젠 일이 손에 익은 탓인지 곧잘 금덩어리를 골라냈고 노라의 트집도 줄었다. 사람은 당장 죽을 것 같아도 그 고비만 넘기면 어떻게든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더니, 딱 자신한테 해당하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세상이 지옥 같았는데…….

지금은 어떻게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죽어라 금을 골라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단순한 노동이 괴로움을 떨치는 데 꽤 도움이 됐다. 저 위에서 내려오는 광물에 집중하다 보면 한가하게 우울해할 여유가 없었다.

“간식 시간이다!”

어느덧 세 시간이 훌쩍 지나고 간식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잘 익은 사과가 간식으로 나왔다. 노라를 비롯한 인부들은 작업장 인근의 풀밭에 앉아 사과를 먹었다. 그때 노라가 에로를 보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름이 뭔데?”

“저……요?”

“여기 내가 이름 모르는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작업장에 온 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사람들은 에로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분명 말해 주었지만, 그녀의 외모에 놀란 나머지 기억을 못 하는 듯했다.

“에로…… 티크예요.”

“에로티크?”

노라가 되뇌자, 인부들은 킥킥거리며 웃어 댔다.

“이름은 에로고 성이 티크예요.”

“이름 참 지랄 맞네.”

노라도 웃긴지 괜한 트집을 잡곤 사과를 베어 물었다. 하지만 노라는 에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듯했다.

“헙, 어쩌다가 여자 행세를 하게 된 게야?”

“어머나! 여자 행세가 아니라…….”

“뭐, 그렇다 치고.”

노라가 귀찮은 양 손사래를 쳤다. 이내 에로는 진지한 어조로 제 사정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살던 나라는 이웃 왕국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아서 무려 100년이나 전쟁 중이었다고 한다.

“제 위로 오빠가 셋이 있었는데, 모두 전쟁에 끌려가서 죽었어요. 그래서 부모님은 저를 낳자마자 딸로 키우셨거든요.”

에로의 말에 사과를 먹던 인부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끝나지 않는 비극을 피하고자 몸부림쳤을 에로 부모님의 심정이 이해됐기 때문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그리 컸으니, 정체성에 혼란이 왔을 수도 있지.

“그럼 부모님이나 잘 모시고 살지, 여긴 왜 온 건데?”

노라의 말에 에로가 흠칫거리더니 끝내 눈물을 흘렸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걸 끝까지 속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남자임이 발각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단다.

“우리 아빠가 헬랜드 병사와 친분이 있으셔서 알음알음 여기까지 도망을 왔어요.”

그때였다. 노라는 바구니에서 사과 두 개를 더 꺼내 에로를 향해 던졌다. 곧 에로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노라를 쳐다봤다. 불쌍한 과거사 좀 털어놨다고 사과를 두 개나 더 주다니.

“괜……찮은데.”

“여자 행세를 할 거면 확실히 해.”

노라는 사과를 네 옷 속에 넣어 가슴처럼 만들라고 손짓을 하자 인부들이 크게 웃었다. 마리아도 미소 지으며 에로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제야 사람들이 그녀에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 같아 기뻤다.

* * *

마리아는 일부러 늦은 밤이 되어서야 군터의 숙소로 갔다. 문을 열자 예상대로 그는 침대에 누워 잠든 상태였다.

‘휴! 다행이다.’

그가 깨어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사람이 참 간사했다. 죽을 것 같은 허기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날, 어느 정도 배가 차오르자 가슴에 수치심이 북받쳤다. 그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모자라, 어느 때는 일부러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증오하다가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언뜻언뜻 묘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달까. 마리아는 상념을 떨쳐 내려 격하게 도리질한 뒤, 카펫이 깔린 그의 침대 밑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웠다. 고단한 노동은 아픈 마음도 지배하는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 뒤 마리아가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자마자, 군터는 침대에서 일어나 마리아를 제 옆자리에 눕혔다. 베개를 받쳐 주고 이불을 덮어 주더니,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네가 나를 잊을 줄은 몰랐다.’

물론 그녀가 겪은 일은 참혹했다. 그래도 자신은 10년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도 마리아는 절대 저를 잊을 리 없다고 여겼다. 자신이 이름을 지어 주고 삶의 목표를 부여해 주었으며 제 몸에 각인까지 했으면서.

‘이제야 네게 다 해 줄 수 있는 남자가 됐는데.’

군터는 엄지로 마리아의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그래, 기억은 차차 되찾으면 된다. 그저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녀에게 해 줄 말도, 들을 이야기도 참 많지만, 무엇 하나 호락호락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아주 기뻤다.

‘네가 내 것이 됐어. 그러면 된 거다.’

앞으로 쇠털같이 많은 날, 마리아에게 저라는 존재를 끝없이 일깨워 주고 느끼게 해 주면 될 터. 손에 잡히지 않는 뜬구름 같던 존재가 드디어 제 손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제 인생은 성공한 셈이었다.

‘너를 온통 나로 채울 거다. 나만 아는 여자가 돼라.’

군터의 청록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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