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16화 (16/120)

16화

광산에서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마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솔샤르가 잠은 군터의 숙소에서 자라고 해서 밤마다 그의 침대 밑에서 잠들었건만 어째서 아침에 일어나면 군터의 옆자리인지……. 필시 그가 자신을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는 건데.

‘부담스러워.’

자신만 특혜를 받는 것 같아서. 솔직히 이제까지 군터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한데 죽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부터 그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전에는 자신을 뒤덮은 불행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어떤 일에도 무감각했었다.

“마리아, 대왕님이 밤에 잘해 주셔?”

에로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작업장에 나오면 인부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기도 하고 때론 흐뭇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이 잠만 잤다고 하면 다들 믿지 않겠지. 아니, 그런 말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마리아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푹신한 침대에서 자게 해 주는 건, 잘해 주는 것에 해당하니까.

“꺅! 아잉, 몰라, 몰라!”

에로가 몸을 꼬며 마리아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부끄러워 미치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 천생 여자였다.

“왠지 너도 대왕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에로가 마리아를 보며 은근하게 물었다.

‘내가 군터,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난감한 질문이었다. 이때만큼은 말을 못 해서 편하긴 했다. 그냥 대충 웃고 말면 그만이니까. 이제껏 그 남자가 좋다 싫다 할 겨를이 있었나?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에 와 있었고, 북부의 붉은 용이라 불리는 군터 플레이슬리의 소유물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아직은 다 수습하지 못한 자아를 돌보는 일이 시급했다.

“이건 비밀인데…….”

에로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배배 꼬며 말을 꺼냈다.

“!?”

“나도 있어.”

‘있어? 뭐가?’

마리아는 에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에로가 대왕을 좋아하느냐 물어봤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녀는 제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굳이 듣지 않아도 에로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 듯도 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솔샤르 부관이잖아.’

마리아는 알아도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에로는 마리아에게 귓속말로 알려 주었다. 자신은 군터의 부관인 솔샤르를 짝사랑하고 있노라고.

“처음이야. 내가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거.”

마리아는 생기 넘치는 에로를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렇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아주 많이 설레고 행복한 일이었다. 제겐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좋은 남자 같아.”

에로의 말에 마리아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조했다. 강하고 때론 무섭기도 한 군터와 달리 솔샤르는 속이 깊고 다정한 남자였다. 비단 자신한테 하는 행동과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간혹 일하다가 보면 솔샤르는 작업장 곳곳을 다니며 인부들을 챙기곤 했다.

“근데 나 같은 게 고백하면 싫어하겠지?”

사뭇 에로의 목소리가 저조했다. ‘나 같은 게?’ 에로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을 들으니 마리아는 너무 안타까웠다. 한데 자신이 그녀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에로, 넌 좋은 여자야.’

훗날 이렇게 말해 주겠노라 다짐하는 것밖에는……. 그때였다. 노라가 여자 인부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모여 봐!”

휴식을 마친 인부들이 노라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제2 광산 쪽에서 연통이 왔는데, 여자 인부가 필요하대. 몸이 가늘고 키가 좀 큰 사람으로.”

“왜요? 우리는 원래 광산에 안 들어가잖아요.”

“걱정하지 마. 금 캐는 일을 시키려는 게 아니야.”

“그럼요?”

“동굴 천장에서 빨간 마석을 하나 발견했다는데, 몸집이 큰 남자들이 비집고 들어가기가 힘든 틈이 있나 봐.”

“마석만 캐 주면 되는 거예요?”

“그래, 임금도 더 얹어 준다고 하더라.”

임금을 더 준다는 말에 인부들은 반색했지만, 곧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시선이 마리아와 에로를 향했다.

‘왜 선뜻 나서질 않지.’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인데, 아무래도 돈보다는 꺼리는 일인 듯싶었다. 게다가 키가 크고 몸이 가는 여자라면 자신과 에로가 제격이긴 했다.

“마리아, 할 수 있겠어? 지난번에 막대기 휘두르는 거 보니 몸은 유연한 것 같더구먼?”

노라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실은 솔샤르에게 들은 소리가 있어서 이 순간에도 마리아를 시킬까 말까 고민 중이다. 하지만 공사는 확실히 구분해야지. 아무리 마리아가 대왕의 여자라고 해도 지금은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혹시 모르니까 저도 같이 갈게요.”

에로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내 인부들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이제껏 노라를 돼지 엄마라고 부르긴 했어도 언니라고 한 사람은 에로가 처음이었다. 크게 갈등을 터뜨리고 난 후, 사이가 좋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음, 다른 지원자는 없어?”

노라는 최종 결정을 하기 전, 인부들을 보며 다시 물었다.

“아니, 진짜 마석일 수도 있고 괜스레 건드렸다가…….”

한 여자가 말을 웅얼거리는 것을 보니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인부들은 마리아와 에로를 향해 이미 결정은 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마리아와 에로는 제2 광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하필 날씨가 좋지 않았다. 하늘에 먹구름도 잔뜩 끼고 빗방울도 떨어지는 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광부들의 안내를 받아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원래 마석은 제3 광산에서 주술사들이 캐는데 여기서 나타날 줄 몰랐지.”

광부는 아주 흥분한 채였다.

“마석이 확실해요?”

주술사들이 캘 수 있는 마석을 일반 광부가 한눈에 알아볼 능력이 있나 싶었다.

“생김새가 그런 거 같아서…….”

광부는 말을 얼버무리며 마리아와 에로를 문제의 지점으로 데리고 갔다. 비좁은 돌벽 틈새에 몸을 욱여넣고 천장을 정면으로 응시하면 붉은 마석이 보인다고 했다.

“긴 연장으로 파 보려고도 했는데, 이상하게 안 되더라고.”

마리아는 틈새 사이로 들어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달걀만 한 붉은 돌에서 광채가 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마리아는 재빨리 에로의 팔을 끄집어 당기곤 손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어머나! 돌에서 빛이 나. 마석이 맞는 것 같은데!”

에로도 실제로 보곤 꽤 놀란 눈치였다. 설령 마석이 아닐지라도 일반 돌멩이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캐내야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의지를 다졌다. 저 마석을 캔다고 해서 큰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왠지 즐거웠다. 이내 마리아는 쇠꼬챙이를 쥔 채 팔을 있는 대로 뻗었다. 하지만 닿을 듯 말 듯 애만 태웠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옆에 있는 벽을 파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게 마리아와 에로는 번갈아 가며 마석을 캐내는 작업을 했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자, 남자 광부들은 모두 동굴 밖으로 나갔다. 마석을 캐내야 다음 작업을 이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해 볼게.’

마리아는 에로의 몸이 땀범벅인 것을 보고는 이번에는 자신이 하겠노라 손짓했다.

에로가 마석 주변의 벽을 거의 다 파낸 이후인지라 꼬챙이로 캐내기만 하면 됐다.

“알았어. 네가 해 봐.”

그때였다. 밖에서 빗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천둥, 번개도 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마리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빨리 마석을 캐낸 뒤 동굴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번에 캐내는 거야.’

마리아는 숨을 몰아쉬곤 빨간 마석을 향해 꼬챙이를 겨눴다. 그러곤 있는 힘껏 마석을 캐냈다. 지직- 소리와 함께 마석이 허무하게 툭 떨어지는 순간 에로가 제때 잡아챘다.

“우리가 마석을 캤어, 마리아!”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두 시간이 걸린 데다가 몸은 온통 땀범벅이지만 비로소 해냈다는 것에 크나큰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르릉- 굉음이 울리며 동굴 천장에서 돌과 흙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가자, 마리아!”

마석이 맞았나? 금기를 깨뜨려서 하늘이 노한 것 아니고? 이래서 마석은 주술사들이 캐야 하는 모양이다. 마리아는 에로의 손을 잡은 채 동굴 입구를 향해 뛰었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하여 동굴이 무너질 듯한 굉음이 점점 커졌다.

“산사태가 났나 봐.”

소리치는 에로의 얼굴이 창백했다. 비가 많이 온 것도 문제지만 혹여 마석을 캐서 그런 건 아닌지 불안했다. 마침내 동굴 입구 쪽이 보였다. 저곳만 통과하면 바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그때 다시 동굴이 흔들리며 입구 쪽으로 엄청난 양의 흙이 쏟아졌다.

“꺅!”

산사태가 얼마나 심한지 입구로 흙더미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되레 두 사람은 동굴 안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마리아는 자신과 에로가 동굴 속에 고립되었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 더 최악인 건, 여전히 산사태가 진행 중이며 동굴이 무너져 흙과 돌무더기에 깔리게 되면 그대로 즉사한다는 것이다.

* * *

군터는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광산으로 향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산사태가 날 수 있어서 웬만하면 작업 진행을 하지 않는데, 어째서 마리아가 그곳에 갇혔는지 모르겠다. 물론 솔샤르가 곁에서 정황 설명을 해 주었으나 기억나는 거라곤 딱 하나밖에 없었다.

‘마리아가 동굴에 매몰됐다.’

군터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동굴에 갇혀 보지 못한 사람은 그 공포와 위험을 실감하지 못한다. 건장한 저 자신조차 동굴에 갇혔을 적 극도의 공포심에 몸부림친 적이 있었다. 한데 그 경험을 마리아가 하다니.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었건만. 군터는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제2 광산에 도착했다. 혹시나 했는데 상황은 예상보다 더 안 좋았다. 광부들이 입구를 뚫어 보려 애쓰고 있으나 저들이 마리아를 돌무더기에서 꺼내기 전에 그녀의 숨통이 먼저 끊어질 게 뻔했다.

“젠장맞을!”

군터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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