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18화 (18/120)

18화

솔샤르의 몸은 매우 유연하고 기민했다. 그는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가 정신을 잃은 에로를 끄집어 당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산사태가 더욱 심해져 통로가 점점 좁아졌다. 사람들은 솔샤르와 에로가 나올 입구가 묻히지 않도록 연신 흙을 파냈다. 드디어 솔샤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그와 에로를 힘껏 끌어당겼다. 우르르 콰쾅! 다시 폭우가 쏟아지며 흙이 밀려왔다.

“모두 피해!”

군터가 소리치자 사람들은 재빨리 동굴에서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사태의 규모는 더 커져서 인부들의 숙소까지 밀어닥칠 기세였다. 이대로 갔다간, 얼마 가지 못해 이곳 사람들은 흙더미에 전부 매몰될 터. 그때 스톤이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마이아! 마덕 난테 죠.”

30분이 훌쩍 지나 스톤은 다시 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마석?’

마리아는 스톤이 말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마석을 손에 쥐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쥐고 있었는데, 그것이 빨간 마석이었다. 스톤은 마석을 건네받더니 땅바닥에 마법진을 그리며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흙더미가 바로 스톤의 코앞까지 밀려온 상황. 군터는 잠시 마리아를 품에서 내려놓곤, 스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 땅바닥의 마법진에서 빛의 기둥이 세워지며 투명한 장벽이 높이 치솟았다. 군터는 간발의 차이로 스톤을 구했다.

“휴! 다핸이다. 흑개물아 잠볏은 모 뿌씰걸? 스똔이 튼뜨나게 만드엇거등?”

실제로 스톤이 마법으로 세운 장벽은 매우 튼튼했다. 파도처럼 넘실대던 흙더미는 더 이상 장벽을 넘지 못했다. 그 정신없는 상황에도 마리아가 마석을 가져온 덕분이었다. 군터는 스톤을 안아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스톤, 기특하다.”

“나 점녕이거든?”

군터는 스톤이 아이처럼 으스대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 산사태가 앞으로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스톤의 말로는 마석이 주인을 찾으면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얌전해질 거라 했다. 한편 솔샤르는 숨을 쉬지 않는 에로의 코를 막곤 입에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숨을 쉬라고. 어서!”

솔샤르는 여전히 에로의 숨소리가 미약하자, 손바닥으로 명치 위쪽을 압박하곤 입에 연신 숨을 불어 넣었다. 그렇게 여러 번을 반복하다 보니 에로가 갑자기 기침하며 숨을 토해 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에로가 죽을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괜찮나?”

솔샤르가 에로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네, 괜찮아요. 쿨럭쿨럭-”

마리아는 한달음에 달려가 에로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고 보고 있던 인부들도 눈물을 훔쳤다.

* * *

마리아는 몸을 씻은 뒤, 군터의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약병이 들려 있었다.

[마리아 님, 대왕의 손에 약을 발라 주십시오.]

솔샤르에게 들었다. 군터가 자신과 에로를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손바닥의 살갗이 다 쓸려서 피가 날 정도로 필사적으로 흙을 파냈다고 했다. 규칙을 어겼다고 나무 기둥에 묶어 놓기도 하고, 독방에 가두곤 몇 날 며칠 벌을 줄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야.’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군터 플레이슬리는 자신에게 유난히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헨리에게 빚을 받아 낼 수 있는 볼모니까. 마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도 몸을 씻었는지 아주 말끔해졌다. 모두 흙탕물에 뒹굴어서 엉망진창이었는데……. 정말이지 고단한 하루였다.

마리아는 군터를 향해 직진했다. 그 모습에 되레 군터가 살짝 뒤로 주춤거릴 정도였다.

“야……으, 바야.”

그녀는 군터의 두 손을 꼭 잡더니 손바닥을 활짝 펴게 했다.

‘아프겠다.’

솔샤르의 말대로 군터의 손바닥은 엉망진창이었다. 진물과 피가 범벅이 되어 절로 인상이 써질 정도였다. 그녀는 군터에게 손짓으로 자신이 약을 발라 주겠노라 했다. 그러자 군터는 지그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는 군터의 손에 난 상처에 정성스레 약을 발라 주었다. 군터는 그런 마리아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후!”

마리아가 약을 다 바른 뒤, 손바닥에 입김을 불 때는 심장이 간질거려서 미칠 뻔했다.

‘아차, 스톤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 되는데.’

일전에 군터가 제 살갗을 물어뜯다시피 했을 때, 스톤이 침을 발라 줬더니 상처가 아물었던 기억이 났다. 마리아는 커다래진 눈으로 군터를 바라봤다.

“왜 그러지?”

“스……트.”

마리아가 스톤이 손의 상처를 낫게 해 줄 수 있다고 손짓하자, 그의 표정이 굳었다.

“스톤은 오늘 힘을 많이 써서 무리다.”

“!”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석으로 마법진을 만들어 장벽을 세웠으니 기력이 소진했을 터. 아무래도 제 생각이 짧았다.

“앗!”

군터가 어색하게 소리를 내는 바람에 마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재빨리 군터의 손을 잡아 약을 덧바르고 호호 불어 주는 행동을 반복했다.

“마리아.”

그가 나직한 어조로 불렀다.

“?”

마리아는 멀뚱멀뚱한 얼굴로 군터를 보았다.

“실은 말이다. 아까 연장을 쓰면서 내 입술에도 상처가 났다.”

“!”

그녀는 놀란 얼굴로 군터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폈다.

‘상처가 났다고? 돌이 입술에 튀었나?’

그렇다면 자칫 치아가 깨졌을 수도 있을 터. 어디 보자……. 한데 군터의 입술은 멀쩡했다. 이내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입술 안쪽이 심하게 아파. 이를 너무 악물었더니.”

‘그럴 수도 있겠어.’

마리아는 그제야 군터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이 얼마나 절박하게 흙을 팠는지 돌려 말한 것일 테지. 하지만 입술 안쪽의 상처에는 무슨 약을 발라야 할지 모르겠다. 마땅한 약도 없고.

“네가 좀 전처럼 불어 주면 될 것도 같은데 말이지.”

그제야 알아챘다. 군터의 음흉한 속내를. 게다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어찌나 뜨거운지, 제 얼굴이 다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안 해 줄 건가?”

‘후- 불어 준다고 상처가 낫진 않는데.’

산사태가 나고 폭우가 쏟아져도 꿈쩍도 하지 않던 남자가 남사스럽다 못해 이런 유치한 행동을 원할 줄은 몰랐다. 마침 군터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아픈데…….”

마리아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구하려다가 몸을 다쳤는데, 좀 유치한 행동을 원한다고 해서 망설이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죽을 고비도 넘겼는데 입으로 바람 좀 불어 주는 일이 무에 대수라고. 마리아는 허탈하게 웃으며 군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입술에 입김을 불어 주어야지. 그때 막 문이 열리며 콩콩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스톤!’

동시에 마리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군터가 맥없이 팔을 내렸다. 이내 그는 아주 허망한 얼굴로 스톤을 바라봤다.

‘스톤, 대왕께서 다치셨어. 손바닥 상처도 심하시고 입술 안쪽도 아프시대. 네가 도와줘.’

“굿떠, 압뻐?”

스톤은 침대로 폴짝 뛰어오르더니 군터의 손바닥과 입 안을 살폈다.

“내가 치요해 주께.”

“스톤, 괜찮다. 마리아가 약 발라 줬다.”

“마이아가 굿떠 것쩡애.”

“뭐?”

군터는 스톤과 마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마리아가 나를 걱정한다?’

순간 가슴에 묘한 감정이 넘실댔다. 그때 마리아가 스톤을 톡톡 쳤다.

‘대왕께 전해 줘. 구해 주셔서 고맙다고.’

“굿떠, 마이아가 곰맙때. 구애져서.”

“!?”

놀란 군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스톤이 마리아를 향해 입을 뾰로통 내밀었다.

“나능? 나두 마이아 구앤능대.”

마리아는 스톤의 양 볼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군터는 그 광경을 보곤 경악했다. 까르르거리며 웃는 스톤과 달리, 군터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굿떠능 내가 치요해 주께.”

“됐다.”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절하자, 마리아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 대어.”

꼭 치료받으라는 뜻일 터. 그제야 군터는 못 이기는 척 스톤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크륵크륵, 커억!”

스톤이 침을 모으는 소리가 매우 요란했다. 게다가 더러웠다. 그래도 아기니까…….

“퉷!”

스톤은 군터의 손에 침을 흥건하게 뱉었다. 군터는 석상처럼 굳은 채 제 손바닥 위에서 거품이 이는 침을 바라보았다.

“자, 내 팀 바르믄 다 나아.”

그때 군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마리아, 솔샤르에게 다녀와야겠다.”

군터는 굳은 얼굴로 방을 나가 버렸고, 마리아와 스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바라봤다.

‘설마, 아기 침이 더러워서 그런 건가. 그냥 아기도 아니고 정령인데. 침이 아니라 약이잖아.’

마리아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동굴 안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꿈이라고 해야 옳겠지.

‘스톤, 동굴 속에서 꿈을 꿨어.’

“꿈?”

마리아는 자신이 보았던 꿈 이야기를 스톤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저 꿈이라고 하기에는 부모님의 대화를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꿈이라면 공작저가 불타고 사람들이 고통스레 죽어 가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발에 감기는 모래의 감촉과 비릿한 바다 냄새, 명확하게 들리는 부모님의 목소리. 꿈이 아니라, 마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는 듯했다.

‘마석이 보여 준 거야.’

이젠 스톤도 마리아에게 마음으로 말을 전했다.

‘스톤, 속으로는 어른처럼 말하네?’

‘잊었어? 나 정령이야.’

또한 스톤의 눈동자가 총기로 빛났다. 아무래도 마석의 주인은 마리아인 듯싶었다. 그러니 같이 동굴에 매몰되었는데 마리아만 멀쩡했겠지. 스톤은 마리아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곤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찾은 듯했다. 그러다 진지한 표정으로 마리아를 보며 말했다.

‘마리아의 부모님은 죽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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