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스톤의 충격적인 말에 마리아는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뺨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아 한동안 멍하니 스톤의 얼굴만 보았다. 그러다 숨을 가다듬으며 스톤에게 물었다.
‘그게 진짜야? 우리 부모님이 살아 계셔?’
‘응, 마석은 앞날을 보여 주고 주인의 꿈도 이루어 주지.’
마리아가 놀라자 스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새삼스럽게, 나 정령이야.’
‘그럼, 내가 마석의 주인인 거야?’
‘응, 내 생각은 마리아가 주인 같아.’
스톤을 보던 마리아가 갑자기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늘빛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가득 고이더니 정신없이 쏟아졌다. 그러자 스톤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지, 일이 커져 버렸네.’
항상 이 깃털보다 가벼운 입이 문제였다. 마리아가 마석의 주인이 확실한 것 같으나, 그녀의 부모님이 생존해 있는지는 솔직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마리아의 강한 바람에서 비롯한 환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령이라고 해서 세상의 이치를 모두 간파하고 복잡한 마법의 세계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마리아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이제라도 아닐지도 모른다고 얘기할까?’
그랬다간 지금 감동하여 우는 마리아는 또다시 실망감에 빠져 괴로워하겠지. 그러나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데. 괜스레 마리아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해서 훗날 크게 상처받을까 봐 걱정됐다.
‘그래, 아직은 정확하지 않다고 솔직히 말하자.’
스톤은 이제라도 자신의 허풍을 이실직고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마리아가 스톤을 끌어안더니 환하게 웃었다.
‘스톤, 나 이제 열심히 살 거야. 내게 닥친 불행을 피하지 않을 거야. 내가 견뎌 내야 우리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응, 그렇지.’
스톤은 마리아의 얼굴을 보곤 깜짝 놀랐다. 이제껏 알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절망으로 죽어 가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치고, 어둠이 드리웠던 눈은 총기로 반짝였으며, 희열에 휩싸인 모습이 정령인 저 자신보다 강해 보였다. 이내 스톤은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의 불확실한 판단이 다 죽어 가는 마리아에게 삶의 의지를 부여해 주어서 그녀가 강해진다면 훗날 어떤 고난에도 꿋꿋하게 버틸 테니까.
‘마리아, 꿈을 위해서라도 군터와 잘 지내도록 해.’
“?”
스톤의 한마디에 마리아는 군터 플레이슬리에 관해 진지해졌다. 꿈을 위해서 군터와 잘 지내라는 말에 담긴 뜻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나 라스토니아로 돌아가 헨리에게 복수하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면 군터의 힘이 필요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는데 못 할 일이 무에 있다고.
‘원래대로 돌려놔야지.’
라스토니아의 유서 깊은 명문가 스튜어트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
‘갚아 줄 거야. 내가 당한 만큼, 아니 이자까지 얹어서 돌려주고 말 테다.’
“그어려믄 굿떠에 돔이 삐료해.”
어느새 스톤이 마리아의 속내를 읽었는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또한 자신의 불확실한 예언이 절망으로 죽어 가던 사람을 되살렸으니, 약간의 껄끄러움은 잊기로 했다. 무심하게 뱉어 버린 살구 씨앗에서 싹이 틀 수도 있는 거니까.
* * *
군터는 솔샤르를 보고 돌아왔다. 그가 구한 마리아의 친구도 이젠 멀쩡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리아가 이곳에 와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존재인데. 군터는 숙소 문 앞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이 문을 열면 마리아가 있다.’
늘 고대해 왔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면 누군가 자신을 맞이해 주기를. 아니, 정확히 마리아 스튜어트이기를 바랐다. 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기만 했던 존재. 막연한 꿈처럼 우러를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 한데 그녀가 제 곁에 있다. 그는 곧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젠장, 상처가 다 나아 버렸어.’
좀 더 즐기고 싶었건만, 눈치 없는 꼬맹이 탓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다 스스로도 기가 차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 머리는 언제쯤 나아질까. 나를 기억해 내는 날이 오기는 할까.’
스톤이 마리아의 아픈 마음도 싹 낫게 해 주면 좋을 텐데. 마리아는 여전히 자신이 빚 때문에 끌려온 볼모라고 여기겠지? 저와의 인연은 까맣게 잊은 채. 보잘것없는 제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주었고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했는지도 모를 터.
그는 입에 달린 작은 미소를 떨친 뒤, 숙소 문을 열었다. 한데 왜 심장이 뛰는지 모르겠다. 불과 한 시간 전에 그녀를 봤건만. 이내 침대 밑에 웅크린 채 잠든 마리아가 보였다.
“후!”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리아에게 천천히 다가가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를 제 침대의 옆자리에 눕혔다.
“고단한 하루였다, 그렇지 않나?”
잠이 들어 제 말을 듣지 못하는 마리아를 향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군터도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때였다. 벽 쪽을 보고 자던 마리아가 군터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허리에 자연스레 팔을 둘렀다. 마치 인형을 껴안듯이.
그는 화들짝 놀라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잠시나마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는 건가?’ 싶었다. 물론 제 착각일 뿐 마리아는 여전히 고단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런 것을 좋다 말았다고 하는 건가 보다. 조금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눈치 못 챘겠지?’
마리아는 잠결에 자연스레 한 행동처럼 보이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삶의 목표가 정해진 이상,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스톤의 말대로 제 꿈을 이루려면 군터와 친해지는 것이 먼저였다. 제게 북부의 붉은 용, 군터 플레이슬리 대왕의 힘이 절실한 상황임을 직시해야 했다. 그의 힘 없이는 라스토니아로 돌아가 복수할 수도 없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도 없을 테니까.
‘당신을 이용할 거예요.’
비록 헨리가 진 빚 때문에 볼모로 잡혀 왔으나, 군터의 호감을 산 뒤, 제 손에 권력을 쥐어야지. 부모님을 만날 수 있고 헨리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군터에게 제 몸뚱어리쯤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아니, 웃으며 좋아하는 척도 할 수 있다. 어차피 그에게 제 영혼마저 주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줄 수는 있고? 남자, 아니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서 앞으론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주제에.
‘죽으려고도 했는데 못 할 게 뭐야.’
이젠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생사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일. 그것이 가장 첫 번째 과제였다. 마리아는 잠결인 양, 군터에게 제 몸을 더 밀착했다.
“!”
움찔대는 그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게다가 전장의 북처럼 들리는 그의 심장 소리. 덩달아 마리아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남자의 몸에 닿아서 떨려서가 아니라,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훗날 은혜는 갚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게 속아서 힘이 돼 주길 바랐다. 그러나 한 가지는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로랑처럼 웃음과 몸으로 남자의 환심을 사는 여자만으로 남는 것. 그것은 절대 싫었다. 반드시 군터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지. 헬랜드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 * *
로랑은 자신의 서신을 받고 라스토니아 황궁으로 찾아온 오라비와 만났다. 두 사람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랑데스 말 중에서도 소수의 귀족만이 쓰는 언어를 사용했다.
“로랑, 어째서 황후가 못 된 거냐?”
황자도 낳아 주었고 그 황후 마리아 스튜어트도 쫓아내는 대단한 일도 했건만.
“변수가 생겼어요.”
“변수?”
“돈.”
결국 돈이 있으면 문제 될 게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헨리가 황후 책봉을 주저하는 건 오로지 돈 때문이니까. 로랑은 이곳 황실의 전후 사정을 제 오라비에게 상세히 이야기했다.
“폐황후를 죽여 달라?”
제 오라비의 말에 로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낸시가 죽인 거로 해야 헨리의 충격이 크겠죠?”
“맞는 말이긴 하지만, 돈은 어쩌려고?”
마리아를 죽이면 군터가 가만있지는 않을 터. 헨리는 1000만 골드를 고스란히 토해 내야 할 텐데. 현재 라스토니아는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라스토니아를 얕보지 마세요. 세금을 더 걷으면 되죠. 안되면 귀족이나 대상인 몇 명 정도 쳐 내도 되고.”
“하긴 찾아보면 돈 나올 구멍은 많지.”
“그럼요. 탈탈 털어 내면 다 나오게 돼 있어요. 목에 칼이 들어가면 없던 돈도 생길걸요?”
“그렇긴 한데…….”
헬랜드까지 가서 폐황후 마리아를 죽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헬랜드의 전사들만큼이나 세라두 가문에서 부리는 용병도 실력이 꽤 출중했다. 전쟁 경험도 많고 청부업을 많이 해 본 터였다. 그러니 헬랜드 전사들이 스튜어트 공작저에 오기도 전에 그쪽 성기사들을 어렵지 않게 처리했지.
“로랑, 폐황후를 이용해서 우리가 돈 좀 뜯어내도 되나?”
이왕 죽일 것 같으면 그냥은 너무 허무하지. 이참에 폐황후의 몸값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면 좋고. 게다가 폐황후의 숨겨진 재산도 재빨리 가로채야 하니까.
“그건 알아서 하세요. 제겐 폐황후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만 가져다주세요.”
그래야 헨리가 저와 낸시를 두고 저울질하는 못된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저울질도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지.
“그러지. 하! 네가 진즉에 랑데스의 황후만 되었어도 이 나라까지 오지 않아도 됐는데.”
“오라버니, 저는 반드시 라스토니아의 황후가 될 거고, 내 아들은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될 거예요. 그러니 실패하시면 안 돼요.”
“이 오라비를 믿으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