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스톤이 마석을 잘 조련하여 더는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빨간 마석은 이제 목걸이가 되어 마리아의 목에 걸려 있었다. 군터는 다른 지역에서 인부들을 더 고용하여 광산의 산사태를 수습했다. 그 작업이 꼬박 한 달이 넘게 이어졌고, 마석을 발견할 시 절대 함부로 캐지 말라는 교육도 했다. 그리고 그날이 도래했다. 다시 헬랜드 왕궁으로 돌아가는 날, 하지만 마리아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일은 궁으로 돌아갈 거다. 사람들과 미리 작별 인사나 해 두도록 해.]
어젯밤 무뚝뚝하게 말하던 군터의 말이 온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왜냐하면 에로와 노라, 그리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두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같이 금을 고르던 인부들과는 이제야 완전히 친해졌건만 이별이라니. 특히 에로와 노라와는 함께 궁으로 가고 싶었다. 물론 아직은 제 마음에만 머문 결정이지만.
‘내가 군터한테 말해 줘?’
에로와 노라를 왕궁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마리아는 스톤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말은 못 하지만 사사건건 스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말을 못 하면 못하는 대로 제 의견을 전할 방법을 찾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내가 할게. 언제까지 스톤이 나를 대신할 순 없잖아.’
‘군터는 마리아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텐데.’
‘그래도 내가 해야 해.’
어버버하며 더듬거리는 꼴이 보기 흉해도 창피해하지 않을 참이다. 마침 군터가 숙소 안으로 들어왔고 스톤은 솔샤르에 안겨 밖으로 나갔다.
“준비는 다 됐나?”
그러고 보니 군터는 완전무장을 한 채였다. 궁까지 가려면 또 며칠이 걸리니까. 마리아는 그의 차림새를 보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휴, 어떻게 표현해야 내 말을 이해할까.’
마리아는 군터를 뚫어져라 보며 가쁜 숨을 쉬었다. 마치 달리기 시합을 앞둔 아이처럼 조마조마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군터에게 다가가 그의 두 손을 맞잡았다.
“!?”
군터도 사뭇 놀란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봤다.
“음, 에으오…… 노아, 가……이 구응 가이…… 퍼오.”
말이 잘 안 나와서 창피하고 답답하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제 마음을 그에게 전하기 위해 애썼다. 한편 군터는 마리아가 말하는 내내 그녀한테서 단 1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청록빛 눈동자에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제 뜻을 전하려 노력하는 마리아로 가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군터가 말문을 열었다.
“에로라는 친구와 노라를 왕궁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것이냐?”
“!?”
마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두 눈이 커다래졌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웅얼거렸건만 제 뜻을 알아듣다니. 이내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런 것을 감동이라고 하던가. 마리아는 울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곧 군터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으니 안심해도 될 터.
‘더 이상 죽으려 하진 않겠어. 바라는 게 생긴 모양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뭐든 너무 쉬우면 재미없는 법.
“마리아, 세상에는 말이지 공짜가 없는 법이다.”
“으?”
“아쉬운 일을 부탁할 때는 적절한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지.”
군터의 잘생긴 입술이 짓궂게 비틀렸다. 마리아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에게 줄 것이 없는 것을. 그 사실은 군터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저답지 않은 행동이긴 해도 시도는 해 봐야지. 고민에 잠겨 있던 마리아는 머뭇머뭇 두 손을 올려 군터의 뺨을 감싸곤 제 얼굴로 가져왔다.
“쪽!”
그러고는 소리도 야무지게 그의 입술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한동안 마리아를 응시했다.
‘장난하나.’
어린애도 아니고 뽀뽀라니, 이런 건 스톤의 볼때기에나 해 주는 것이다. 그는 단번에 마리아의 입술을 덮쳤다. 두 입술이 맞물려 이지러지고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안을 데웠다. 그의 혀는 거침없이 마리아의 입 안을 휘저었다. 미치도록 달콤한 여자. 말캉하고 축축하게 혀를 얽어 대자, 마리아를 향한 욕망의 크기가 주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 이 거창한 갑옷을 벗어 던진 뒤 마리아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때 마리아가 갑자기 군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허……. 으?”
제 이에 물려 부어오른 입술로 허락하느냐고 묻는 마리아가 야속했다. 군터는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 제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서 터지기 직전이었다.
“허락하니까, 이리 와.”
갈급한 욕정에 휩싸인 군터의 참을성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단숨에 마리아의 손목을 낚아채곤 침대에 눕혔다. 상의까지 벗어 던질 겨를이 없어서 아래만 간신히 끌어 내린 채 내면의 욕망을 완전히 드러냈다.
‘아직은 아니야.’
마리아는 눈치 빠르게 그의 짐승 같은 욕망을 손으로 말아 쥔 뒤 아기처럼 위로했다. 얼마 못 가서, 헉헉- 군터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하얀 불꽃을 그녀의 얼굴에 터뜨렸다. 제 것으로 젖은 마리아의 얼굴을 보자 만족감과 묘한 희열이 차올라 몸을 떨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영리하게 핵심을 피하며 자신을 약 올리는 마리아가 얄궂기도 했다. 쉽지 않게 굴어서 더 안달 나게 만드는 여자.
“내 냄새, 잊지 마라.”
군터는 수건으로 마리아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 * *
“어머머! 그게 정말이야? 내가 마리아랑 궁에 간다고?”
에로는 놀라운지 연신 괴성을 질러 댔다. 하지만 곁에 있는 노라는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궁에 가는 것이 기쁘지 않은 듯했다. 마리아가 노라를 툭툭 치며 왜 그러냐 물었다.
“마리아, 내가 너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나 같은 것을 데려가고 싶은 게야?”
처음에 마리아와 에로에게 좀 못되게 굴었어야지. 물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긴 했으나 미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노라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말로 제 뜻을 표현할 순 없지만, 그녀는 연신 노라의 손을 잡아당기며 같이 가자고 했다.
무엇보다 노라가 인부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챙기는 모습을 본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텃세 부리고 포악하며 못된 여자인 줄만 알았는데 자기 사람들을 끔찍하게 챙겼다. 특히 저와 에로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나서 준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 마음이 오롯이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 낸시의 배신으로 혹독하게 배운 한 가지가 있었다. 제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보다 혹독한 고난으로 단련된 사람이 필요했다.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언제라도 자신을 위해 손을 더럽힐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들이 에로와 노라였다. 물론 자신이 그들을 먼저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같이 가거라.”
논란을 끝낸 건 군터의 한 마디였다. 그는 에로와 노라에게 마리아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곤 궁에 가서 그녀를 잘 보살피는 일을 하라고 했다. 두 여자로 인해 마리아가 삶의 의지를 되찾은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도움이 돼 줄 거라 믿었다.
“나 같은 것이 궁에서 일해 볼 줄이야.”
결국 노라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마리아는 군터를 향해 고맙다고 말했다. 물론 눈으로. 이 세상에 스톤 말고 제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군터가 아닐까 싶었다.
마침내 마리아는 광산을 떠나 헬랜드의 궁으로 향했다. 마리아는 에로, 노라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갔고, 군터와 솔샤르,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말을 탄 채였다. 그때 노라가 에로를 보며 물었다.
“누구를 주려고”
그러고 보니 에로는 마차에 탄 후부터 줄곧 뜨개질에만 매달렸다. 노라는 그런 에로가 의아했던 모양이다.
“네? 제……가 하려고요. 왕성은 겨울에 춥다고 해서.”
“그래? 나도 두툼한 숄을 떠 놔야 하나.”
노라의 목소리가 사뭇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에로가 뜨개질하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에로는 간혹 마차 창문 밖으로 몰래 솔샤르를 훔쳐보며 미소 지었다.
‘에로가 사랑에 빠졌어.’
마리아는 에로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한데 제 마음이 이상했다. 에로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뜨개질하는 순수함이 남아 있건만, 자신은 군터를 이용하여 목적을 이루려 한다. 남자를 대하는 두 마음의 괴리감이 너무 컸다. 마리아는 커튼을 살짝 젖혀 마차와 속도를 맞춰 달리는 군터를 바라봤다.
‘두 번은 하지 않아.’
남자를 믿는 일, 더불어 좋아하는 감정을 두 번 이상 겪고 싶진 않았다. 더욱이 권력으로 기세등등한 남자들에겐 언제나 여자의 유혹이 끊이지 않는 법이니까. 세상에 한 여자만 사랑하는 권력자를 본 적이 없다. 군터 플레이슬리, 저 남자도 마찬가지일 터. 지금은 제게 호감을 느끼는 듯하나, 그마저도 변질되어 버릴 게 뻔했다. 그간 가져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만족일 수도 있고.
‘마리아, 냉정해져야 해.’
어차피 군터도 제게 사랑 같은 것을 원하는 건 아닐 터. 볼모를 마음에 둘 정도로 순진한 남자 같지는 않았다. 한데 이상하게 날이 갈수록 군터에게 신경이 쓰였다. 여전히 속이 말랑말랑하여 살짝 짜증이 났다. 차갑고 단단한 돌덩어리 같아야 하는데.
그즈음 잘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해가 지는 걸 보니, 오늘도 노숙인 듯했다. 병사들이 막사를 설치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라스토니아 같았다면 마을이나 지방 영주의 성에서 머물면 되지만, 헬랜드는 아직 개척이 덜 된 왕국이라 궁까지 가려면 노숙은 필수였다.
“우리도 나가서 돕자고.”
노라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이내 세 여자는 마차에서 내려 막사 치는 일을 도왔다. 얼마 뒤, 들판에 수많은 막사가 세워졌다. 마리아와 노라, 에로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막사에 들어가 일을 도왔다. 노라는 커다란 솥에 주걱을 넣어 휘이 저으며 스튜 맛을 보곤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에로, 마차에 가서 내 가방 좀 가져와. 거기에 각종 양념이 다 들어 있거든. 아무래도 말린 버섯 가루를 좀 넣어야 할 것 같어.”
“그럴게요.”
그때 마리아가 에로를 저지했다. 에로는 한창 반죽을 하는 중이라 손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마차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막사를 나왔다. 마리아는 저만치 세워져 있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노라의 가방을 찾았다. 그녀의 말대로 커다란 마사포 가방 속에는 여러 양념 통이 즐비했다.
‘찾았다. 양념 통.’
마리아가 양념 통을 챙겨서 나가려던 찰나였다. 차가운 금속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