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마리아는 소년을 데려가려는 솔샤르에게 뛰어가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솔샤르는 난감한 얼굴로 군터와 마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쳇! 죽이고 싶으면 죽여!”
마침 소년이 호기롭게 소리치며 난동을 부렸다.
“제이미!”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잖아.”
“제이미, 어서 잘못했다고 빌어라!”
“싫어. 저 여자를 죽이지도, 가진 물건을 제대로 훔치지도 못했는데!”
“제이미, 제발!”
제 엄마가 울먹이며 말리는데도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소년은 되레 기름을 부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때 마리아는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짝! 소년의 뺨을 내리쳤다.
“!”
소년은 놀란 얼굴로 마리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물을 글썽이곤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거란 사실을 잘 알기에 호기를 부렸을 뿐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범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며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가 죽으면 우리 엄마랑 동생을 지켜 줄 사람이 없어요.”
아이의 용서에서 진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살려 주세요.”
소년의 눈물에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노라는 아이의 사정에 감정이 솟구쳤는지 연신 앞치마로 눈물을 닦았다. 물론 마리아는 소년을 용서했다.
‘나는 더 이상 라스토니아의 황후가 아니야. 하지만 어른이잖아.’
그 말인즉슨 제겐 부릴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 자비란 이름으로 여유롭게 호구를 자처하는 일도 없어야 할 터. 그러나 어른이라면 용서하고 아이를 바른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살려 주마.”
아주 오랜 정적 끝에 군터의 명령이 떨어졌다. 마리아는 놀라서 그에게로 다가가 진심이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죽이지 않을 거다. 물론 눈을 파거나 손목을 자르지도 않아.”
군터의 말에 마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만 저 아이는 알아야 한다. 제 잘못이 무언지 말이다.”
그의 말에 마리아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강도 짓은 절대 해선 안 되는 범죄임을 자각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 점에 관해선 마리아도 군터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이를 데려와라.”
그의 명령에 솔샤르가 소년을 군터 앞에 데려다 놨다. 소년은 군터의 강한 기운에 짓눌려 파들파들 떨었다.
“강도 짓은 옳지 않지. 하지만 인간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
모두가 술렁였다. 그중에서도 마리아가 가장 어리둥절했다. 조금 전까지 강도 짓을 했다고 죽인다고 해 놓고는 앞뒤 안 맞는 모순적인 말을 하다니. 게다가 소년이 기껏 제 잘못을 깨닫기까지 했는데.
“사내로서 가족을 지키려는 그 용기도 가상하다.”
“예?”
되레 소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군터를 바라봤다.
“그래도 강도 짓을 해선 안 되지. 하지만 강도 짓을 했다고 너를 죽이려 한 건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소년은 겁에 질려 물었다.
“넌 절대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질렀거든.”
이내 군터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내 여자를 다치게 한 것, 더 나아가 죽일 뻔한 것. 오늘 네가 잡히지 않았더라도 나는 끝까지 쫓아가 너를 죽였을 거다.”
군터의 시선이 소년에게서 마리아를 향했다.
* * *
마리아는 지쳐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곧 군터의 커다란 손이 마리아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마리아는 가쁜 숨을 쉬며 그의 손을 보다가 덥석 잡았다.
“!”
마리아의 몸이 허공을 향해 떠오르는가 싶더니 곧 군터의 품에 안겼다. 그는 마리아를 품에 안곤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그는 막사로 가는 내내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 헤프게 괜한 동정심을 베풀었노라 마리아를 비웃지도 않았다. 되레 큰일을 끝낸 아이를 다독이는 아버지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짓궂은 사람이야.’
슬슬 군터가 얄미워지려 했다. 그러다 마리아는 자조했다. 사실 자신은 아직 심장이 물러 터졌다.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장차 헨리를 단죄하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다.
“강해져야지.”
놀랍게도 군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흡사 제 속내를 읽은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치료해 줄 거다. 그 어미도 보살펴 줄 거고.”
“두…… 사를 과서에 보……애.”
마리아는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여겼고, 제 뜻을 최대한 군터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두 사람을 광산에 보내 달라는 것이냐?”
“으……. 으.”
마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광산에 가면 두 사람이 할 일이 있고 배도 곯지 않을 수 있으며 돈도 벌 수 있으니까.
“좋은 생각이지만, 나는 반대다.”
“!?”
“광산이 아니라, 나의 궁으로 데려갈 거다.”
‘궁으로?’
군터는 놀란 마리아의 표정을 보곤 아주 짧고 굵게 설명했다. 소년을 헬랜드의 전사로 키우겠다고. 그제야 마리아는 그의 뜻에 수긍했다. 군터가 그런 결정을 한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저도 어리면서 제 엄마와 동생을 지키겠다는 용기가 가상하지 않나?”
비록 잘못은 했으나 제 가족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그 대담함이 좋았다. 또한 숲에서 소년을 쫓을 때 간파했다. 그동안 먹지 못해서 그렇지, 몸놀림도 빠르고 특히 칼을 다루는 손재주가 매우 좋았다.
잠시 상념에 젖어 있던 군터는 제 뺨을 매만지는 손길에 깜짝 놀랐다. 어느새 마리아가 자신을 응시하며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련하게 사람을 쳐다보면 어쩌라고. 마리아는 감동해 버렸는지 몰라도 일단 그녀가 제 몸에 손을 대면 일이 커져 버리는 것을.
“네가 시작했다.”
가슴에 온기가 돌며 애틋한 감동에 취하는 건, 어디까지나 마리아의 방식일 뿐. 자신은 그녀가 손대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이내 군터의 입술이 마리아를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마이아, 다쪘떠?”
막사 안으로 스톤이 아장아장 걸어 들어왔다.
‘저 빌어먹을 꼬맹이 새끼.’
“뇩카지 마, 굿떠!”
스톤은 속으로 제 욕을 하는 군터를 하얗게 흘겨보곤 마리아를 향해 손을 뻗어 빛을 쏘았다. 어느새 마리아는 정신을 잃었고 스톤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지난번에 마력을 많이 소진해서 당분간 변신은 어렵다고 하지 않았나?”
“많이 좋아졌습니다.”
스톤은 아주 자연스레 마리아의 옷을 벗기려 했다.
“내가 하지.”
군터는 일그러진 얼굴로 마리아의 윗옷 단추 몇 개를 풀었다. 곧 한쪽 어깨와 다친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쯧쯧, 심하게 베였군요.”
군터가 보기에도 아주 깊고 길게 베였다. 한데 스톤의 굴곡진 입술이 실룩대는 본새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아니나 다를까, 스톤은 마리아의 상처를 혀로 핥기 시작했다.
“미친 거냐?”
제 여자의 팔을 다른 남자가 혀로 핥는 광경을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한다니. 군터의 입에서 자동으로 험한 말이 튀어 나갔다.
“상처가 이렇게 깊은데 언제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치유합니까?”
“마법으로 치유할 수도 있지 않나?”
“이런 건 침이 효과가 좋습니다.”
스톤의 어조가 사뭇 진지했다. 제발 심각한 상처를 두고 유치한 질투 따윈 집어치우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사랑 앞에선 아주 애야, 애.’
스톤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북부의 붉은 용이라 불리는 사내도 사랑 앞에선 치졸하게 질투하는 보통 사람일 뿐. 더불어 군터를 약 올릴 생각에 왠지 신이 났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야지 싶었다.
스톤은 붉은 혀를 꺼내 마리아의 팔에 일자로 그어진 상처를 핥았다. 자신의 타액을 흠뻑 묻히곤 키스하듯 입술로 상처를 꾹꾹 눌렀다. 그때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스톤은 이미 예상한 듯 얄궂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올렸고, 그곳에는 분노로 얼굴이 어둑해진 사내가 필사적으로 인내하며 몸을 떨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냐?”
“제가 어쨌는데요?”
스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혀로 핥고 입술로 애무하는 것처럼 말이다.”
푸숙- 소리와 함께 갑자기 어른 남자 스톤은 다시 아이가 되었다.
“굿떠, 애무가 모야?”
스톤은 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항상 이런 식이지, 말하다가 불리하면 애가 되어 버리는 못된 버릇.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약아빠진 새끼, 다음에는 단단히 손 좀 봐줘야지.’
“납뿐 땐각 하지 마. 나 때매 마이아 산처가 벌떠 나아짜나.”
의기양양한 스톤의 시선을 좇은 곳에는 자상은 사라지고 멀쩡해진 마리아의 팔이 있었다. 역시 정령의 힘은 대단했다. 순간 군터는 궁금했다. 대체 마리아의 기억이 언제쯤 돌아올지.
“스톤, 마리아의 기억 말이다.”
“크은 충겨글 또 겨끄묜 대.”
스톤은 군터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아는 터였다.
“뭐?”
스톤은 군터에게 일전에 마리아의 마음을 들여다본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말도 못 하게 되었으며 부분적으로 기억도 잃게 되었다고 했다.
“차라리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편이 낫겠다.”
이제껏 겪은 힘든 일보다 더한 충격을 받으면 된다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마리아를 망가뜨리고 싶진 않았다. 그럴 바에는 제 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편이 나았다. 말 좀 못 하고 기억 좀 안 나면 어때서.
“마이아는 언댄가 굿떠를 떳났 꺼야.”
“!”
스톤의 말에 군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