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마리아가 나를 떠날 거라니?’
군터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갔다. 혹여 헨리 때문인가. 아직도 그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아니면 황후라는 자리를 되찾기 위해? 여러 의구심이 군터의 속을 복잡하게 들쑤셨다. 한데 스톤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마이아는 봇쑤할 꾸래.”
“복수?”
“웅, 엄마랑 아빠랑 둑인 따람한태 봇수할 꾸래.”
“!?”
어째 지난번하고 말이 달랐다. 일전에 스톤은 제게 말했다.
“마리아가 전남편을 그리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랑은 복잡 미묘한 거라서 미움과 별개로 상대를 원하는 마음이 공존한다고 했다.
“내가? 기업이 앙 나능데.”
“뭐?”
“굿떠, 바보야? 엄마랑 아빠랑 둑인 따람을 누가 그이워해? 미어하지.”
스톤은 코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악마 새끼!”
군터는 스톤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닫고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가 스톤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을 무렵, 잠시 정신을 잃었던 마리아가 깨어났다.
“마이아! 굿떠가 날 때이여고 해.”
스톤의 말에 마리아가 군터를 보자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곤 손을 내렸다. 이내 마리아는 스톤을 품에 안아 주었다.
‘대왕께서 전에도 너를 때렸어?’
마리아의 물음에 스톤의 얼굴 가득 장난기가 피어올랐다. 스톤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군터를 보며 말했다.
“마이아가 무러봤떠. 굿떠가 전에두 나를 때였냐고.”
“그런 적 없다.”
군터는 마리아를 향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람을 뭘로 보고, 자신이 어린애한테 손대는 그런 허접스러운 인간으로 보였나. 괜스레 짜증이 났다.
“아함! 돌립따.”
스톤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막사를 나갔다. 이젠 두 사람만, 남은 상황. 군터는 마리아를 응시했다.
‘복수를 다짐했다? 그래서 나를 떠나려 한다.’
그런 거였나. 적어도 죽으려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제 곁을 떠나려 하는 마음은 품어선 안 될 터. 그건 곧 죽음이니까.
“마리아.”
군터가 이름을 불러 준 적은 매우 드물었는데. 마리아는 사뭇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복수하고 싶나?”
“!?”
마리아는 속내를 들켜 버리자 깜짝 놀랐다. 스톤한테도 말한 적이 없건만, 어떻게 안 거지.
“복수하려면 강해져야 한다. 오늘처럼.”
차마 하기 힘든 일도 할 수 있어야 하며, 때론 저 자신이 아닌 것처럼 냉혹해져야 했다.
“복수는 나 자신을 무기로 만들어 상대를 벌하는 거다.”
어떤 무기로 만드느냐는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을 터. 하지만 마리아는 아주 큰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녀의 복수 의지는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다.
“마리아, 나를 배제한 어떤 행동도 하지 마라. 허락하지 않을 테니.”
군터는 마리아의 두 뺨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천천히 손을 내려 그녀의 가는 목을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며 말했다.
“넌 내 것이다. 죽어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해.”
마리아의 목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어둑해진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마리아는 숨이 턱 막혔다.
‘내 몸뚱어리는 당신한테 저당 잡혀 있지만, 마음은 내 것이에요.’
“군터 플레이슬리라는 이름을 잊지 마.”
무슨 뜻이지? 그의 이름을 잊을 리 없잖아. 누가 지어 줬는진 몰라도 그와 잘 어울렸다. 또한 대륙의 유명한 기사의 이름과 같아서 잊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을.
“네가 내게서 벗어나려 했다간,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가 나직한 어조로 말하고 있으나 크게 흥분한 군터의 마음이 마리아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지며 지그시 미소 지었다.
‘내가 그렇게 무모하진 않아요. 헨리한테 복수하려면 당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거든요.’
감정을 감추는 데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유리했다. 마리아는 연신 흥분한 군터를 다독였고, 그도 점점 치솟던 화기를 누그러뜨렸다. 마리아는 군터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군터의 말이 옳아. 복수하려면 나를 쓸 만한 무기로 만드는 게 먼저야.’
예전의 마리아 스튜어트는 잊어야지.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명예와 체면, 자존심을 목숨처럼 여기던 마리아는 죽었다.
마리아는 먼저 침대에 눕곤 군터를 향해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러자 군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사랑하지 않아도 웃어 줄 수 있어.’
부모님을 다시 만나고 멸문당한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만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군터의 말대로 제 몸을 무기로 그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못 할 일이 없었다.
‘당신이 나를 소유한 게 아니라, 내가 이용하는 거예요.’
마리아는 군터의 팔을 베더니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에게 안도감을 주는 게 먼저니까. 한데 의도와 다르게 졸음이 밀려왔다.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건, 아주 고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본의 아니게 소년과의 몸싸움까지. 정말이지,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군터는 제 팔을 베고 잠든 마리아를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눈을 감았다.
* * *
에로는 솔샤르의 막사 앞에서 서성였다. 차마 그와 만날 용기가 나야 말이지.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에로의 등을 거세게 때렸다.
“아얏!”
에로가 소리치며 돌아보자, 노라가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잉, 아프잖아요.”
“그냥 말을 해. 잠깐 얘기 좀 나누자고.”
노라는 망설이는 에로가 답답했다. 기어이 목도리를 완성하여 솔샤르의 막사까지 가더니, 깜깜무소식. 혹시나 해서 왔더니 예상대로 문밖에서 애먼 돌멩이만 발로 차는 꼴에 기가 막혔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 줘야겠다.
“부관님! 잠시 나와 보시죠.”
노라가 크게 소리치자, 에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짝팔짝 뛰었다. 이내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드디어 막사에서 솔샤르가 나왔다. 그는 에로와 노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부관님께 할 말이 있답니다.”
노라는 운을 떼곤 쌩하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에로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아득했다.
“무슨 일이지?”
솔샤르는 막 잠자리에 들려 했는지 목소리에 피곤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가끔 하품도 하곤 했다.
“저기, 지난번에 감사했다고…….”
솔샤르가 돌무더기에서 자신을 구해 내고 막힌 숨통에 공기를 불어 넣어 준 덕분에 살았으니까.
“음, 감사 인사는 전에도 여러 번 하지 않았나?”
“그……랬죠.”
굳이 이렇게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또 할 필요까진 없는 것을. 솔샤르는 에로의 행동이 의아했다.
“이거요.”
에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털로 짠 목도리만 솔샤르에게 건넸다.
“목도리네.”
“네, 왕성의 겨울은 춥다고 해서. 곧 겨울이 올 거고…….”
“네가 짠 거야?”
“네……? 네.”
솔샤르는 갈색 목도리를 받아 들곤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물건 아주 오랜만에 보아서 신기하달까.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에로티크.”
“에로…… 티크?”
“이름이 좀 그렇죠?”
“아니, 어울려.”
“예?”
그런 말 처음 들었다. 갑자기 에로의 심장이 쿵쾅대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제 이름은 에론 티크였다. 전쟁이 끝나면 여자가 아닌 남자로 제대로 살라는 부모님의 뜻이었건만, 자신은 어려서부터 에론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은 여자라고 믿고 있으니까.
“몇 살이냐?”
“스물두 살이요.”
“그렇구나. 아무튼 고맙다. 잘 쓰마.”
에로는 솔샤르가 자신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주자 뛸 듯이 기뻤다. 그도 자신을 남창, 변태라고 꺼리면 어쩌나 했는데. 예상 밖에도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 주어서 고마움마저 느꼈다.
* * *
광산에서 길을 떠난 지 일주일 만에 왕성에 도착했다. 궁으로 가다 보니 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헬랜드의 왕궁은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호화스러웠으나 왕성 거리는 그렇지 못했다. 도로는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고, 하수관 공사는 미흡했으며, 집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막 도시를 건설하는 중이라 여러 곳에서 분주하게 공사를 하는 중이긴 했다. 한데 일하는 것에 체계가 없다고 해야 할까.
‘일의 순서를 정해 놓고 해야 하는데.’
분야별로 일을 분담해야 효율적일 텐데. 집 하나를 다 짓고 근처의 도로를 정비하는 순서로 일을 진행하는 듯했다.
‘내가 이런 걱정을 다 하네.’
처음 헬랜드 왕성에 왔을 때만 해도 숨 쉬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지금은 같은 풍경을 보며 일의 체계를 따지니, 만감이 교차한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광산에서의 몇 개월은 제 삶의 큰 과도기가 되었다.
궁에 도착하자, 전에 마리아를 시중들던 시녀들이 우르르 달려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온천으로 가시죠.”
시녀들은 마리아와 에로, 노라의 행색을 보곤 씻는 일이 급하다 여겼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한 게, 흙먼지 날리는 길을 달리고 때론 진흙이 튀기는 길을 지났으니, 모든 이의 행색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다. 마리아는 온천으로 가기 전 군터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자 에로가 살짝 귀띔을 해 주었다.
“대왕께선 부관님하고 집무실로 가셨어. 급히 처리하실 일이 있으시대.”
“세상에, 내가 온천탕에 다 가 보고. 마리아 때문에 출세했네그려.”
노라는 온천에 가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온천에 도착하자 에로가 득달같이 달려가 물에 손을 적시며 소리쳤다.
“어머머! 물이 미끌미끌해. 신기하다, 얘.”
마리아는 신기해하는 에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노라는 다소 진지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에로, 우리가 아무리 허물이 없는 사이여도 너랑 같은 탕에서 목욕하는 건 좀 그렇네.”
노라가 에로를 훑으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정신적으론 다 이해가 되지만, 실제로 완벽하게 받아들이기란 그리 쉽지 않은 거니까.
“둘이 먼저 해요. 저는 좀 있다가 할게요.”
“그래 주면 고맙고.
에로는 마리아와 노라가 목욕하는 동안 잠시 온천을 나갔다. 이내 마리아와 노라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벗고 탕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