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낸시는 황후의 드레스 룸에 들어가 옷을 골랐다.
“베티, 이것도.”
마리아의 드레스 원단은 최고급 양단인 데다 장식품으로 달린 보석도 최상급이었다. 고로 황후의 드레스 한 벌이면 수도의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황후였을 적, 사치가 심했던 건 아니었다. 거의 친교국에서 보내온 선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낸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리아의 드레스 중에서 어떤 것이 값어치가 나가고 덜 나가는지.
“아크만 부인, 윗분들 허락 없이 옷을 가져가도 될까요?”
베티가 매우 불안해했다.
“윗분이라니? 내궁의 수장인 황후가 없는데 누가 윗분이야?”
그렇다고 헨리가 자신과 로랑 중에서 내궁 살림을 맡길 사람을 정한 것도 아닌 것을. 물론 선황후인 모니카도 배제된 것으로 알고 있다. 모니카의 허영심은 대륙 전체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니까.
“낸시는 도둑질하는 중이야?”
여지없이 로랑이 쫓아왔다.
“주인 없는 옷 좀 가져간다고 문제 될 건 없잖아요. 어차피 폐황후의 옷인걸요.”
낸시는 당당했다. 값비싼 양단을 태워 버리면 결국 낭비밖에 더 될까. 그러느니 가져다가 조금 고쳐서 입으면 좋지. 궁인이라면 현재 국고가 텅텅 비어서 새 드레스를 맞출 여력이 안 된다는 것쯤은 다 아는 터였다.
“누군가가 허락을 하신 건데?”
어설프면서도 날 선 로랑의 말투가 낸시를 자극했다. 이내 낸시는 옷을 고르다 말고 로랑에게 다가가 말했다.
“로랑, 라스토니아 말 잘하잖아요? 연기는 폐하 앞에서만 해요.”
낸시가 정색하자, 로랑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곤 또박또박 쏘아붙였다.
“너같이 미천한 출신한테 황후의 옷이 가당키나 해?”
로랑은 또렷한 라스토니아 말로 낸시에게 무안을 주었다.
“폐황후의 옷도 궁도 다 내 것이야. 그러니 손 떼고 꺼져.”
“로랑이나 나나 아직 폐하의 정부인 건 마찬가지잖아요?”
“뭐? 이게 정말!”
로랑은 화에 치받쳐 낸시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에 질세라 낸시도 로랑의 머리채를 잡았다. 곧 두 여자는 서로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고함을 지르며 격렬하게 몸싸움을 했다. 보다 못한 시녀들이 끼어들었는데, 서로의 주인을 위한답시고 싸움은 더 커져 시녀들도 같이 뒤엉키고 말았다.
우당탕! 몸싸움에 집기가 부서지고 고가의 장식품이 쓰러지는 등, 황후의 드레스 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때 벽력같이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싸움을 저지했다.
“다들 그만두지 못해!”
시종의 보고를 받은 헨리가 다급히 두 사람을 말리러 왔다. 한데 제 눈으로 보고도 너무 기가 막혀 한동안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 여자는 세라두 백작 영애였고, 다른 여자는 한때나마 황후를 보좌했던 시녀가 아닌가. 한데 뒷골목에서 술 파는 아낙네들처럼 천박하게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꼴이라니.
“로랑, 낸시한테서 손을 떼!”
“폐하!”
“낸시는 임신 중이잖아.”
그의 말에 낸시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니, 로랑도 억울하다며 같이 우는 바람에 이젠 싸움터가 아니라 울음바다가 돼 버렸다. 마침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모니카는 헨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래서 황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거지.”
모니카의 말에 헨리는 확실히 깨달았다. 마리아가 밉기는 했으나 황후로서는 완벽한 여자였노라고. 이대로 가다간 황궁은 곧 콩가루가 될 게 뻔했다.
* * *
군터는 왕궁에 돌아오자마자 급한 정무부터 마쳤다. 그때 그의 눈에 솔샤르의 목에 걸린 목도리가 보였다.
“꼴사납게 뭐냐?”
분명 여자가 만들어 준 거겠지. 솔샤르는 유난히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또한 여자를 아주 좋아하기도 했다. 매일 밤, 솔샤르를 찾아오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선물받았습니다.”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여자한테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목에 차다니. 왠지 부럽기도 하고……. 아니지, 제겐 마리아가 있는 것을. 세상 어떤 여자도 견줄 수 없는 완벽한 존재가 제 곁에 있는데, 그깟 목도리가 다 뭐라고.
“대왕,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솔샤르도 오랜 여정 때문인지 매우 고단해 보였다.
“왕궁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며칠 푹 쉬도록 해.”
“감사합니다. 대왕.”
“가 봐라.”
“예.”
그가 나간 뒤, 시종장이 들어오자 군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고단하다. 온천으로 가자.”
그의 말에 시종장이 서둘러 군터의 옷을 벗겨 주었다. 군터는 평소 온천에 가기 전에는 옷을 다 벗고 비단 가운만 걸친 채로 가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온천에 있나?”
“예, 그렇습니다.”
이내 군터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마리아와 단둘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그간의 피로를 풀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 좋으십니까?”
시종장이 군터를 향해 물었다.
“뭐가?”
“대왕께서 방금 콧노래를 부르셔서…….”
“내가?”
군터가 되묻자, 시종장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껏 군터가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처음 보아서, 놀랍기도 했으나 기쁜 마음이 더 컸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사람임을 너무 잘 아는 터라, 그도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군터는 붉은 비단 가운을 휘날리며 온천으로 향했다. 그는 앞선 시종장이 뒤로 처질 만큼 빠르게 걸었다. 마침내 온천에 가까워지자, 마리아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눈치 빠른 시종장이 먼저 들어가 군터가 왔음을 알리자, 밖에까지 들리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하지만 군터는 급한 마음에 온천 안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아주 엄청난 광경을 보고 말았다. 한 남자가 홀로 탕 속에 있는 모습. 게다가 남자는 여자처럼 예쁘게 생겼다. 얼굴만 본다면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를 보니 분명 남자의 몸이었다.
“넌 누구냐?”
군터의 목소리에 에로는 다급하게 물속에서 나왔다. 그 순간, 대왕은 에로의 알몸을 정확하게 보았다. 저와 같은 것이 하체에 달린 남자라는 것을. 에로는 재빨리 나와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궁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군터의 심기가 좋지 못했다. 자신과 마리아만 사용하는 온천에 외간 사내가 목욕하고 있다니. 에로는 군터에게 인사하곤 다급히 온천을 빠져나가려 했다.
“거기 서.”
군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자, 에로가 바로 멈춰 섰다. 이내 에로는 눈을 부릅뜬 채로 제게 다가오는 군터를 보곤 깨달았다. 군터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마리아의 곁에 항상 있었건만, 어째서? 물론 답은 금세 알아차렸다. 여자 옷이 아닌 맨몸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니 마리아의 친구라고 연관을 짓지 못하는 것이다. 에로는 일이 크게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에로인데요. 마리아의 친구예요.”
“마리아의 친구?”
이제 보니 이름도 모르고 있다. 순간 군터의 우악스러운 손이 에로의 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아악!”
“죽고 싶은 것이냐?”
“아으……. 어.”
때마침 밖에서 마리아와 노라가 뛰어와 군터를 말렸다. 군터는 낯선 남자가 있는 온천에 마리아가 찾아온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에로의 편을 들며 군터에게 다그치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 입 다물어!”
군터는 마리아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마리아는 이렇게 무서운 군터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어째서 사내새끼가 내 여자를 아는 거지?”
“그게 아닙니다.”
퍽- 군터의 주먹이 에로의 얼굴을 강타하자 그녀는 그대로 대리석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 으에오.”
어느새 마리아가 군터의 다리를 붙잡으며 말렸다.
“놔라. 너마저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
군터는 이성이 날아간 짐승 같았다. 살기만 남아서 눈에 보이는 대로 죽이려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군터는 발로 에로의 목을 거세게 짓눌렀다.
“아악!”
결국 에로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곤 기절했고, 마리아는 두 손을 휘이 저으며 군터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그…… 아니. 아이……. 어.”
에로는 당신이 오해할 만한 그런 존재가 아니며, 제겐 둘도 없는 친구라고 설명했다. 물론 제정신이 아닌 군터가 알아들을 리가 없다. 되레 그는 마리아의 턱을 거세게 움켜쥐고는 무섭게 소리쳤다.
“나를 기만해서 좋았나? 네 눈에는 내가 바보 등신으로 보였냔 말이다.”
마리아가 감히 저 아닌 다른 남자를 곁에 두었다니, 게다가 두 사람의 사이도 아주 친해 보였다. 한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었다니.
“마리아, 똑똑히 봐라. 너와 붙어먹은 저 새끼를 산 채로 태워 죽일 테니.”
군터의 독한 말에 마리아는 울며 도리질 쳤다. 결국 보다 못한 노라가 나섰다.
‘내가 이 사달이 날 줄 알았지.’
그래서 목욕 전에 마리아에게 물어봤던 것이다.
[마리아, 대왕께서 에로가 남자인 거 아셔?]
[아차, 모르는 것 같던데.]
마리아는 아마 모를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지 모르겠네.]
노라는 소년에게 보여 준 군터의 태도에 사뭇 놀란 터였다. 마리아를 향한 군터의 집착이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다. 그런 남자가 제 여자 곁에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면야 문제 될 건 없지만 걱정은 됐다. 결국 우려가 현실이 돼 버렸다.
“대왕, 제 말씀 좀 들어 보세요.”
노라는 군터 앞에 넙죽 엎드린 채 소리쳤다.
“너도 한통속이었나? 마리아가 저 새끼와 붙어먹는 걸 눈감아 줬느냐 말이다?”
“오해십니다.”
노라는 두 손을 격하게 흔들며 부정했다.
“오해?”
노라는 최대한 침착하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다. 에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또한 자신을 비롯하여 마리아가 에로를 어떻게 여기는지도 말했다. 다행히 군터는 노라의 말을 중간에 끊을 만큼 화를 내진 않았다.
“그래서 저놈이 여자다?”
“예.”
노라의 대답에 군터는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자학했다. 마리아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녀 곁에 누가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예전의 저였다면 어림도 없던 것을. 누구보다 사람의 본성을 예리하게 간파하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건만. 마리아에게 미쳐서 한 치 앞도 보질 못했다니.
“웃기지 마. 저 새끼 몸에 ×이 달린 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대왕!”
“시종장, 병사들을 불러라!”
그의 명령에 병사들이 온천에 모습을 나타냈다.
“저놈을 감옥에 가둬라.”
군터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