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군터가 에로의 정체를 확인한 후, 왕궁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졌다. 마리아는 에로가 갇힌 감옥 앞에 주저앉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종장이 여러 번 찾아와 데려가려 했으나 그때마다 거세게 반항했다.
“마리아, 대왕께 돌아가. 그러다간 너까지 대왕의 노여움을 사고 말 거야.”
작은 창살 너머로 튀어나온 에로의 손이 마리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마리아는 에로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녀를 차가운 석탑에 갇히게 하려고 함께 궁에 오자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너를 두고 어떻게 가.’
마리아에게 에로는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절망감에 죽고 싶을 때, 유일하게 제게 손을 내민 사람이며, 돌무더기에 묻혀 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함께 바닥을 전전하던 사람은 쉽게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리아를 통해 알게 되었다.
‘노라, 제발 대왕을 설득해 줘요.’
마리아는 속으로 내내 빌었다. 노라의 해명이 군터의 돌덩어리 같은 마음을 움직이게 해 달라고. 하지만 그의 노여움은 생각보다 컸다.
“대왕께서 너를 아주 좋아하시나 봐. 아니, 사랑하시는 것 같아.”
“!?”
마리아는 놀라서 눈물을 뚝 그쳤다.
‘대왕이 나를 사랑한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때는 강대국이었던 라스토니아의 황후를 손에 넣었으니 대륙의 모든 왕실에 보여 주고 싶은 거겠지. 자신은 그럴듯한 전리품에 불과했다. 진짜 사랑이라면 상대의 말을 믿어 주는 게 옳았다. 아니, 그 남자의 사랑 따위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무턱대고 화만 내며 의심부터 했다.
“질투 때문에 그런 거야.”
‘질투도 사랑이 있어야 하는 거지. 대왕은 나를 소유하고 싶은 것뿐이야.’
사랑과 집착은 엄연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그런 감정을 착각하지 않는다.
한편 노라는 오늘도 대왕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마리아를 봐주지 말라는 대왕의 명령을, 저는 아주 충실하게 이행했습니다.”
며칠 전보다는 군터의 노여움이 가라앉긴 했으나 그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래도 노라는 매일 그를 찾아와 광산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다.
“귀족에 대한 반발심도 한몫했기에 악랄하게 마리아를 괴롭혔습니다. 한데 그런 와중에도 마리아에게 빵을 나눠 주고 손을 내민 사람이 에로였습니다.”
“!?”
그건 좀 뜻밖이었다. 일하지 않으면 무조건 굶는 것이 광산의 철칙 중의 하나였건만, 제 빵을 반씩이나 주었다니.
노라는 에로가 여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관해서도 말했다.
“노라, 네 말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녀의 말을 쭉 들으니 적어도 두 사람은 자신이 의심했던 그런 음란한 남녀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마리아가 광산에 처음 갔을 적,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죽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데 에로가 그런 마리아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었다니. 그 공은 인정했다.
“그렇다고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자는 여자가 아니다.”
아무리 스스로를 여자라고 우겨도, 저 자신이 용납이 안 됐다. 마리아의 곁에 수컷은 오로지 저와 스톤만 존재해야 했다.
“대왕, 마리아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노라는 마지막으로 읍소했다.
“소중한 이가 무얼 원하는지 알아주는 것도 마음을 얻는 노력이자 방법입니다.”
“노라, 나를 가르치려 드나?”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저는 그저…….”
“걱정하지 마라. 에로라는 사내를 죽이진 않을 테니까.”
“정말입니까? 고……맙습니다. 대왕.”
노라는 여러 번 머리를 숙이며 군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느니 하는 무서운 말을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대신 그 사내를 다시 광산으로 돌려보낼 거다.”
“예?”
“그러니 네가 마리아를 설득해서 내게 데려와.”
“알……겠습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에로의 목숨을 살린 건 기쁜 일이지만, 마리아는 만족하지 않을 텐데. 세 사람이 궁으로 오는 마차에서 얼마나 많은 꿈을 이야기했는데……. 비록 마리아가 말은 하지 못했어도 누구보다 들떠 있었다. 희망으로 반짝이던 미소가 여전히 눈앞에 생생한 것을.
마리아는 노라가 전해 준 소식에 안도와 실망이 교차했다.
‘세 사람이 함께하지 않는 왕궁 생활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마리아, 버틸 수 있겠어?”
노라가 마리아를 보며 결연하게 물었다. 이내 마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대왕을 꺾어 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군터 플레이슬리는 누구보다 의지가 강하고 고집이 센 남자였다. 그랬으니 10년 만에 왕국을 세우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 남다른 끈기와 추진력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밀고 나갔다. 그런 사람이 쉽게 양보할까. 노라는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리아의 간절함을 꺾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제아무리 태산 같은 남자라고 해도 그 남자를 뒤흔드는 건 결국 여자니까. 특히 군터가 마리아를 바라볼 때의 눈빛은 사뭇 남달랐다. 아주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서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리아, 이번에는 네가 에로를 지켜 주는 거다.”
노라의 말에 마리아는 할 수 있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리아는 제 발로 군터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를 향한 반감은 여전한 상태였다. 낮에는 군터를 피해 노라와 시간을 보내며 일부러 그를 피해 다녔다.
“마리아, 자정이 넘었어. 어서 가 봐.”
노라가 재촉하자 마리아는 별수 없이 군터의 침실로 향했다. 어떤 이유든 잠은 그와 함께 자야 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침실에선 그의 곁으론 한 발짝도 다가서지 않았다. 군터가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으니, 저도 그럴 수밖에. 물론 그와 자신이 지닌 힘의 크기가 비교도 되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반항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옆에 누워.”
군터가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너의 결백을 믿는다. 그렇다고 네 곁에 사내를 둘 순 없어.”
군터의 말에 마리아는 실소했다. 믿어 주지 않아도 된다. 그 전에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자신과 에로를 이상한 쪽으로 몰며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퍼부었으니, 응당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와야지. 할 말이 참 많지만, 이럴 때는 차라리 말을 못 하는 게 싸움을 피하는 현명한 방법이었다. 적어도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군터는 답답했는지 휘파람을 불어 스톤을 불러들였다.
“돌립딴 마랴. 왜 자꾸 불르는 건데?”
스톤이 징징거리자, 마리아는 두 팔을 벌려 안아 주었다.
“마리아의 말을 내게 전해라.”
‘에로가 남자라서 내 곁에 둘 수 없다면, 나는 어떤 남자의 곁에도 있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이 대왕이라도 말이야.’
“너모 말이 봅짭하자나.”
스톤은 졸린지 짜증을 냈다.
“마이아는 굿떠의 겨태 잇기 실태.”
“뭐? 그걸 결정할 처지가 아니라고 전해.”
군터는 화난 얼굴로 마리아를 보며 스톤에게 말했다. 마리아는 자신을 보는 군터의 눈에서 아득한 집착을 느꼈다. 대체 이 남자가 언제부터 자신을 소유하려 한 것일까. 원한다면 그는 왕궁을 미인으로 꽉 채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1000만 골드짜리 볼모라서? 그래서 이토록 사람을 옭아매는 건가. 마리아는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하지만 그의 감정이 욕심이라면 그걸 갖지 못할 거라고 희망을 꺾어 버리면 된다.
‘죽어도 대왕의 여자가 되는 일은 없다고 전해 줘.’
“나 가 꼬야.”
스톤이 마리아의 품에서 폴짝 내려오더니 두 사람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곤 문을 향해 뛰었다.
“스톤, 마리아의 말은 전하고 가라.”
군터가 무섭게 소리치자 그제야 스톤은 걸음을 멈췄다.
“마이아는 젓때 굿떠의 녀자가 안 댈 꺼래. 잉제 댔찌?”
스톤이 사라지자, 군터는 크게 가슴을 들썩이더니 한달음에 달려와 마리아를 짓눌렀다.
“윽!”
육중한 그의 몸이 마리아를 덮쳤다.
“이미 넌 내 여자야. 제대로 깨우쳐 줘야 하나?”
그가 무섭게 으르렁대자, 마리아는 그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웃어?”
마리아는 군터가 무섭게 소리치는데도 그를 피하지 않았다.
‘당신은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야.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나를 가질 수 있었어. 그런데도 망설였던 이유가 뭔데? 혹시 내게 진실한 감정, 뭐 그런 걸 원했던 거야?’
감정 없는 텅 빈 껍데기는 싫으니까. 온전하게 자신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이 그의 눈에 득시글거렸다. 이내 군터는 허탈하게 웃으며 마리아를 짓눌렀던 제 몸을 뗐다.
“너 때문에 내 마음이 변했다.”
군터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곤 방 안을 서성이며 실소를 터뜨렸다. 이내 그의 표정이 매우 진지해졌다.
“?”
“내일, 에로 그 사내를 죽일 거다.”
아무리 고민해도 다른 남자 때문에 제게 날을 드러내는 마리아가 용납이 안 됐다.
* * *
아침이 되자 군터는 검을 들고 감옥으로 향했고, 마리아는 필사적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어떻게든 그가 에로를 죽이지 못하게 막아야지. 아무래도 어젯밤의 제 호기가 참극을 부른 게 틀림없다. 그냥 애원할 것을. 이 남자는 제 의지대로만 살아온 사람이란 것을 간과한 게 큰 실수였다. 드디어 감옥 앞에 도착하자, 마리아는 무작정 군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으으어……. 내 자모이오여.”
그녀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마리아, 늦었다. 너는 어제 내게 아주 큰 실수를 했거든.”
군터는 어젯밤 마리아한테서 보고 말았다. 자신을 경멸하는 마리아 스튜어트의 모습을. 마치 그녀는 제게 ‘비천한 주제에 감히 나를 원해?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마리아는 다를 거라 여겼는데. 제 착각이었나. 꼬박 10년간 헛된 환상을 품고 살았던가.
그때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자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예상 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솔샤르.”
“대왕. 에로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왜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