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마리아는 솔샤르가 목에 두른 목도리를 보았다. 에로가 정성 들여 짠 목도리를 진짜 하고 다닐 줄이야. 그건 필시 솔샤르도 에로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
“말해 봐. 네가 나선 이유가 뭔지 말이다.”
군터는 의아한 얼굴로 솔샤르에게 재차 물었다. 솔샤르가 감옥 안에 있는 에로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가 굳이 이곳까지 왔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제 여자입니다.”
솔샤르는 결심이 섰는지 군터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곁에 있던 마리아는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정도로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야? 누가 네 여자냐?”
군터는 정확히 듣고도 당혹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감옥에 갇힌 에로 말입니다. 제 여자입니다.”
이번에는 군터가 사색이 되었다. 그는 입술만 달그락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솔샤르가 제게 한 말을 연신 곱씹었다.
“솔샤르, 혹시 너도 알고 있었느냐? 에로가 사내라는 거 말이다.”
군터의 물음에 솔샤르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암묵적인 시인을 했다. 그러자 군터는 손으로 제 머리를 짚곤 실소를 터뜨렸다.
“나만 멍청하게 몰랐다는 거지?”
“대왕께서 신경 쓸 일이 많으시니, 관심이 에로에게 미치지 않은 겁니다.”
정확히는 마리아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겨서 다른 이에겐 무관심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군터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솔샤르는 누구보다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인데, 어째서 여장 남자를 좋아하게 됐을까. 솔샤르는 다른 사내들에 비해 문란하지 않았다. 일부러 매음굴에 찾아다니진 않지만 그렇다고 여자와 즐기는 것을 마다한 적은 없었다.
그동안에 성적 취향이 바뀐 것인가. 오랫동안 솔샤르를 봐 왔으나, 그가 남색을 즐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믿기지 않았다.
“솔샤르, 에로를 구하려는 의도라면 이쯤에서 멈춰라.”
군터는 엄한 목소리로 솔샤르를 다그쳤다. 하지만 마리아는 솔샤르가 두른 목도리에서 답을 찾았다.
‘에로를 진짜 좋아해.’
군터는 손에 들고 있던 검마저 떨어뜨릴 만큼 충격을 받았는지, 고개를 흔들며 뒤돌아섰다. 그때 솔샤르가 군터의 발길을 붙잡았다.
“제게 목도리를 짜 준 여자는 처음이었습니다. 그것도 어릴 적 제 어머니가 짜 준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의 말에 군터가 계단을 올라가다 멈추어 서더니 다시 돌아섰다. 이내 그의 시선이 솔샤르의 목에서 멈췄다. 얼마 전부터 꼴사납게 두르고 다니던 저것이 에로가 짜 준 거라니.
“고작 목도리 하나에 좋아하느냐 물으실 수도 있지만, 제겐 크나큰 감동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나 더는 볼 수 없는 어머니의 추억을 에로가 일깨워 주었다.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가 짠 것과 똑같을 수 있는지, 선물을 받고도 한참이나 정신이 멍했었다. 치열하게 사느라 어머니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했는데, 에로가 그 낡은 추억을 끄집어냈다. 에로는 종종 제 숙소에 찾아와 얼굴을 붉히며, 말린 과일을 넣은 과자를 주고 가곤 했다. 한데 그런 과자는 어려서도 먹어 보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었으니까. 한데 에로가 그때에 누려 보지 못한 소소한 것들을 하나씩 챙겨 주는 것이 좋았다. 가슴에 온기가 돌다 못해 울컥할 정도로.
“누구나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나름의 계기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군터는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름의 계기’ 분명히 있다. 제가 그 증거니까. 오롯이 10년을 좋아하고 원했으며 기어이 제 손에 쥐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당장 무어라 확정을 내릴 순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고민이 필요하달까.
‘그래도 네가 남자를 좋아할 줄은 몰랐다.’
군터는 다시 돌아서 계단을 올라갔다. 이내 마리아는 재빨리 검을 챙겨 군터의 뒤를 쫓았다. 솔샤르와 에로,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솔샤르는 에로가 갇힌 감옥 앞에 홀로 남았다.
“문을 열어라.”
“예.”
그의 명령에 시위들이 감옥 문을 열었다. 에로는 슈미즈 차림에 맨발인 채로 돌바닥에 앉아 있었다. 솔샤르는 자신이 두른 망토를 풀어 그녀의 몸에 덮어 주었다.
“부관님.”
“에로, 나도 네가 좋다.”
“예? 제가요?”
에로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건 필시 동정일 것이다. 군터의 손에 죽거나 아니면 광산으로 쫓겨나게 생겼으니 도와주려는 거겠지. 어떻게 저 같은 별종을 좋아할 수 있을까. 자신이 솔샤르를 좋아하는 건 진실이지만 그는 아닐 것이다.
“진심이야.”
“!?”
“왜요? 저는 마음은 여자지만 몸은 남자인데…….”
“네가 무엇이든 그냥 너라서 좋다.”
곧 에로의 시선이 솔샤르의 목도리에서 멈췄다. 그래서 한 번 더 놀랐다. 그를 위해 정성 들여 짜긴 했어도 실제로 그가 목에 두르고 다닐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내 여자 해라.”
“네? 진……심이세요? 그래도 돼요?”
“이제부터 너는 내가 지켜.”
솔샤르의 고백에 에로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 * *
군터는 집무실에 와서도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신이 솔샤르에 관해 모르는 것이 있었나. 형제처럼 자라서 뼛속까지 다 안다고 여겼건만, 어째서 그가 남색가인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솔샤르는 남색을 즐기지 않아.’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부정만 하기에는 솔샤르의 말이 연신 가슴에 맴돌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나름의 계기가 있다는 말. 저 또한 경험한 일이었다. 한데 다른 사람의 감정을 두고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는 짓은 이기적인 인간들이나 하는 짓일 터. 일국의 대왕이라면 더더욱 경계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군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깊은 고민을 해야 할 터. 그때 보드라운 손이 피부에 느껴졌다.
“!”
군터가 고개를 들자, 마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통쾌한가?”
에로를 죽일 명분이 없어져서, 결론적으론 제 뜻대로 되어서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리아가 살짝 얄미웠다.
그때 마리아는 군터의 두 손을 잡아끌더니 창 쪽으로 데려갔다.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번처럼 간절하면 분명히 제 마음이 전해질 거라 믿었다. 창가 앞에서 두 손을 맞잡은 두 사람. 마리아는 군터의 두 눈을 응시했다. 반항기로 가득했던 어제와 다른 눈빛이었다.
“에으어…… 치구에오. 나으와이 군으 이게 하오으.”
“하! 재밌네.”
군터의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다. 마리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다 이해가 됐다.
“에로는 친구이고 함께 궁에 있고 싶다는 건가?”
그의 정확한 해석에 마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러곤 다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머이든…… 다 하…… 하우느.”
“뭐든지 다 할 테니 부탁을 들어 달라는 소리지?”
군터는 자신이 마리아의 말을 알아듣고 입 밖으로 꺼내는 찰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마리아는 군터가 제 말을 이해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녀는 너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그를 와락 껴안았다. 하지만 군터는 검지로 마리아의 이마를 지그시 밀어냈다.
“!?”
“마리아, 잊은 것이냐?”
‘내가 뭘 잊어?’
“부탁할 때는 아주 간절하게 그리고 그에 맞는 값을 치러야 하는 거라고, 전에 말했을 텐데?”
‘간절하게?’
마리아는 군터의 얼굴에 연신 입을 맞췄다. 하지만 군터는 얼굴을 뒤로 빼며 말했다.
“뽀뽀로 해결될 나이는 아니지 않나?”
‘섹스라도 하자는 거야?’
못 할 것도 없다. 저도 어린애가 아니고 경험이 없지도 않은 것을. 다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뿐이다. 하지만 군터의 호감을 사기 위해선 언젠가 해야 할 일이긴 했다. 혈기왕성한 남자가 원하는 것을 매번 피할 순 없으니까. 마리아는 큰 결심이라도 한 양, 숨을 몰아쉬곤 옷을 벗으려 했다.
“아니, 아니. 너는 내가 아무 때나 발정하는 짐승인 줄 아는 거냐?”
‘아닌가? 맞는 것 같은데.’
마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군터를 바라보았다. 한데 왠지 그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군터는 여봐란듯이 윗옷을 벗어 던졌다.
‘맞잖아. 지금 하자는 거. 근데 왜 아니라고 해?’
결국 그가 원하는 건 섹스였다. 그러나 군터의 입에서 아주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굳은 맹약이 필요하다.”
‘맹약?’
“네가 내 여자라는 맹약 말이야. 평생 없어지지 않는 증거가 필요해.”
그는 도무지 이해 안 되는 말만 하더니 이내 마리아에게 자신의 등을 보였다. 군터의 넓은 등에는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한 붉은 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새롭지는 않았다. 그때 아주 찰나였으나, 마리아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스쳤다. 한 남자의 등에 펜으로 용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 곁에는 낸시가 있고, 남자는 군터처럼 구릿빛 피부를 가졌다. 하지만 기억은 오래가지 않았다. 찻잔에 피어오른 김처럼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너의 등에도 나처럼 새겨라. 네가 내 여자라는 증거.”
“!?”
“할 수 있나? 네가 하면 에로는 너의 곁에 있을 수 있다.”
군터는 예리하게 마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제 말을 들어주길 간절히 원하기도 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
군터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결정이 늦어질수록 에로는 감옥에 오래 갇혀 있어야 할 테니까. 게다가 못 할 것도 없다. 죽음도 각오했는데, 저런 그림이 뭐 대수라고.
‘나는 당신의 여자가 되려는 게 아니야. 당신이 가진 힘이 필요한 거지.’
그와의 인연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참이다. 사랑하지 않고도 공고한 연대는 가능한 거니까.
‘나를 원하는 남자는 권력과 부가 있다.’
그러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자신의 안위와 장차 해야 할 복수를 위해서라도 군터를 제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기대는 하지 말아요. 당신을 사랑할 일은 없을 테니까.’
마리아는 군터에게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