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군터는 막대한 부를 가졌으나,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선 만만치 않은 일을 해야 했다.
‘자정이 넘었는데, 왜 안 오지?’
마리아는 흠칫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요즘 노라를 따라 뜨개질을 시작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소일거리 삼아 할 일이 필요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군터가 늦으니 사뭇 신경이 쓰였다. 일국의 왕이라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웬만하면 자정 전에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건만……. 마리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대왕이 궁금해서 가는 거 절대 아니야. 나도 자야 하니까. 엄연히 서열이 있는데 내가 먼저 잘 순 없잖아. 그게 왕실의 법도잖아.’
배운 사람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도는 아니까. 얼른 가서 말해 주고 와야지. 늦게까지 일할 거면 저 먼저 자겠노라고. 그래야 괜한 오해를 하지 않을 터. 드디어 마리아는 그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한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그녀는 마른침을 삼킨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든 군터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들이 책상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깨울까? 침대에 가서 편히 자라고?’
한데 이 광경이 왜 이리 생경하면서도 익숙할까. 마리아는 곧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헨리는 피곤에 절어 책상에서 엎드려 잘 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제게 떠넘긴 일을 처리하느라 자신은 거의 매일 책상에서 잠들고 눈뜨기를 반복했었다. 그래서 군터의 고단한 모습이 낯설면서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마리아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군터가 작성하다가 만 문서를 보게 되었다.
‘글씨가…….’
마리아의 하늘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글씨를 쓸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슨 글자인지, 못 알아보겠어.’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생긴 것만큼만 글씨를 쓰면 최고의 명필이었을 텐데. 마리아는 책상에 있는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차용증이야.’
각 왕실이나 상단에 돈을 빌려주고 받은 문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두지 않아서 훗날 돈을 받으려고 해도 문서를 제대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군터는 기억력이 좋으니 문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저장해 놨을 수도 있겠지.
‘날짜든 금액이든 이름이든……. 기준을 만들어서 문서를 분류해 놔야 할 것 같은데.’
대략 보니까, 날짜와 이름별로 분리하려고 한 모양이다. 마리아는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가 혼란을 느끼지 않을 법한 선에서 문서를 분리한 후, 겉표지를 만들어 붙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겉표지에는 채무자의 이름과 날짜를 적어 놓았으며 꼬리표에 이름의 첫 자를 적었다. 그래야 문서가 쌓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역시 뜨개질보다 재밌어.’
원래 하던 일이라서 그런지, 뜨개질보다 능숙하고 재미도 있었다. 그때였다. 군터가 추운지 몸을 떨며 움츠렸다. 마리아는 다급히 침실로 달려가 자신이 뜨개질하던 숄을 대충 매듭을 지어서 가져왔다.
‘역시 손재주는 없어.’
군터에게 숄을 덮어 주면서도 제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에로와 노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솜씨가 대단했다. 한데 자신이 뜬 숄은 중간에 구멍도 나고 무늬도 일정치 않았다. 그러면 좀 어때, 잠깐 덮고 말 건데.
‘이제 일을 제대로 해 볼까.’
우선 마리아는 군터가 일하는 방식을 파악했다. 그래야 훗날 혼란이 없을 테니까. 그녀는 먼저 차용증을 정리한 뒤, 이주민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았다.
‘이것도 엉망이야.’
이래선 왕국민들을 제대로 통치하기 어려울 터. 하지만 이런 일을 군터 혼자 하기엔 무리였다. 그녀는 최대한 보기 쉽게, 남녀노소별로 크게 분류해 놓은 뒤, 출신 국가도 기재해 놓았다. 그렇게 일에 열중하면서도 가끔 잠든 군터를 살피기도 했다. 조잡한 숄을 덮어 줬는데도 곤히 자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자는 모습은 순해 보여.’
마리아는 다시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군터는 꼼짝없이 책상에 엎드려 있느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저 여자는 확실히 미련퉁이가 맞았다. 어떻게 자신이 자고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는지…….
‘내가 너를 눈으로만 본다고 믿지 말라고 했지?’
사실 군터는 마리아가 집무실에 들어오는 순간, 잠에서 깼다. 마리아의 살냄새가 어찌나 향긋한지, 자신을 찾아와 준 것이 너무 기뻐서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적당히 자는 척하다가 일어나야지 싶었는데, 제 몸에 숄을 덮어 주는 행동이 너무 예뻐서 그 순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슥슥- 종이에 펜을 끄적이는 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군터는 몰래 실눈을 뜨고 그녀를 힐끔거리며 관찰했다. 일에 열중한 모습을. 문서를 정리하는 손은 빠르고 주판알을 튕기는 것도 꽤 잘했다. 누가 보면 대상단을 경영하는 상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감탄도 잠시였다. 갑자기 가슴에 만감이 교차했다.
‘마리아, 내가 너를 얻기 위해 어떤 10년을 살았는지 모르지?’
한데 이렇게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온기를 나누고 있다니. 제 꿈의 절반 이상이 이루어졌다.
‘꿈을 더 꾸려면 자야겠지, 마리아?’
군터는 다시 잠을 청했다.
* * *
깜빡 잠들었던 군터는 일어나 제 책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엉망이었던 문서가 말끔하게 정리된 건 물론이고, 복잡했던 서류가 아주 정갈하고 간단해졌다. 자신이 필요한 차용증이 있으면 문서의 꼬리표를 보고 바로 찾을 수 있게끔 분류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마리아의 글씨체는 그녀처럼 정숙하고 아름다웠다. 사람이 쓴 글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모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군터는 자신이 빨간 숄을 내내 어깨에 덮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칭찬 좀 해 줘야겠어.’
군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아를 찾으러 복도로 나갔다. 마침 문 앞에 서 있는 시종장에게 마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들 응접실에 계십니다.”
“다들?”
자신만 빼고 모여 있다는 말이었다. 잠깐, 그 다들에 설마 솔샤르도 포함이 될까? 아니겠지. 마리아, 에로, 노라를 이르는 말일 터. 한데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솔샤르의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새어 나왔다. 살짝 소외된 것 같아서 짜증이 일었다.
“헙!”
군터가 기침하자, 화기애애하게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바로 일어나 인사했다.
“대왕.”
솔샤르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한 것이…….
‘꼴사나워.’
하지만 자신은 솔샤르의 꼴사나운 목도리보다 더 대단한 것이 있어 금세 기분이 풀렸다.
“나도 차 한 잔 주지.”
군터가 응접실 상석에 자리하자, 에로가 바로 차를 가져왔다. 그런데 제 옆에 앉은 마리아의 안색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 퀭한 눈 밑으로 드리운 검은 그림자가 입꼬리까지 내려왔다.
‘어제 너무 무리했어.’
“마리아가 정리했나?”
군터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이내 마리아는 사뭇 놀라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깔끔하게 잘했다.”
“!?”
마리아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군터의 칭찬에 그다지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군터는 그런 마리아의 태도가 당혹스럽기만 했다. 자신은 분명 겁박이 아니라 칭찬을 했는데. 그때 노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왜 그러지?”
“대왕, 그 걸레 같은 숄은 어디서 나셨는지요?”
“걸……레?”
설마 제가 어깨에 두르고 있는 빨간색 고운 숄을 말하는 건가. 군터는 의아한 얼굴로 노라를 쳐다봤다.
“보세요. 실밥이 다 풀리려고 하잖아요. 누군지 몰라도 똥손이네요.”
에로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마리아를 흘낏 보며 약 올렸다.
“이것아! 대왕 앞에서 똥손이라니, 말을 가려 해야지.”
노라가 득달같이 에로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뭐라고 해요. 저 태어나서 저렇게 엉망진창인 숄은 처음 보는데.”
“그래도 똥손이 뭐야. 고양이 손이지.”
“고양이 손? 그게 더 웃겨요.”
다들 숄을 누가 짰는지 잘 알지만, 장난기가 발동하여 한마음으로 놀려 댔다. 그러면서 군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기다리는 눈치랄까. 물론 마리아는 무안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포근했다.”
군터의 말에 모두 놀랐는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몸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고 위로가 됐다.”
그는 진지한 어조로 제 느낌을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그의 말은 오롯이 마리아에게 하는 거였다. 그때 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군터에게 다가갔다. 마리아가 숄을 벗기려 손을 대자, 군터는 그녀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순간, 나머지 사람들은 후다닥 일어나 재빨리 응접실을 나갔다.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지.”
“?”
“이 숄 말이다. 나를 위해서 뜬 건가?”
‘연습용인데. 이런 걸 어떻게 선물로 줘.’
그 물음에 마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제 대답 여부에 따라, 그의 기분은 완전히 바뀔 테니까. 어차피 그에게 잘 보여야 하기도 하고. 걸레 같지만 군터가 가장 먼저 덮었으니, 그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군터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솔샤르의 목도리보다 훨씬 잘 만들었다.”
“!?”
장난삼아서 하는 말이면 웃고 말 텐데,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어조에 마리아는 놀랐다. 아니, 설렜다. 원래 이런 칭찬에도 가슴이 막 울렁거리며 심장이 뛰고 그러는 건가. 군터를 좋아할 리, 아니 사랑할 리 없다고 자신했는데, 왜 마음은 멋대로 움직이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