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28화 (28/120)

28화

헨리는 온종일 울며 투정 부리는 로랑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낸시와의 다툼에서 제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폐하, 사랑이 삭은 거죠?”

“삭은 게 아니라 식은 거지.”

“정말 식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로랑의 어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한 거다.”

“삭든 식든 지금 안 중요하죠?”

로랑은 목놓아 울어 젖혔다. 아이는 저도 낳았건만 어째서 낸시의 편만 드는지……. 물론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참아야 하는 현실이 짜증이 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처럼 철없이 굴어야지.

“낸시는 홑몸이 아니니까.”

“그럼 누군가가 황후죠?”

“그야 당연히 로랑이지.”

헨리는 막혔던 숨을 토해 내듯이 말했다. 로랑을 너무 사랑해서 마리아를 버렸다. 그녀만 제 앞에서 사라져 주면 꽃길이 펼쳐질 줄 알았건만,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 당혹스러웠다. 마리아는 로랑을 편애해도 단 한 번도 불만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흔들림 없이 황후로서 맡은 책무를 묵묵하게 해 나갔다.

하지만 로랑과 낸시는 눈만 뜨면 싸우느라 난리 법석을 피웠다. 게다가 내궁의 기강은 무너져서 궁인들이 황궁의 물품을 밖으로 빼돌려 돈벌이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자아, 오늘은 팔베개를 해 줄 테니 같이 자자.”

“아니, 그런 거 말고.”

로랑이 요염하게 웃으며 하얀 가운을 벗자, 얼기설기한 레이스 속옷 사이로 알몸이 훤히 드러났다. 역시 로랑의 교태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곧 두 사람은 갈등이 무색할 정도로 뜨겁게 엉겨 붙었다. 사실 낸시와 자주 잠은 잤어도 임신 중이라,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때쯤이면 성욕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헨리는 로랑의 야한 속옷을 단숨에 찢어발기곤 성난 자아를 그대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때 침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침실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하던 일을 멈췄다.

“누구냐?”

헨리의 목소리에 침실 문이 열리더니 시종장이 고개를 빼꼼하게 들이밀었다.

“폐하, 잠시만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

“아크만 부인의 시녀가 왔습니다.”

“낸시의 시녀가?”

헨리가 바로 가운을 챙겨 입자 로랑이 그의 앞을 막았다.

“가지 말아요.”

“로랑, 잠깐이면 돼.”

로랑을 잘 다독이곤 침실 밖으로 나간 헨리는 복도에서 울고 있는 베티를 향해 짜증스럽게 물었다.

“왜 우는 것이냐?”

“아크만 부인께서 하혈을……. 아무래도 유산기가 있으신 것 같아요.”

“뭐라고?”

헨리는 그길로 낸시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로랑이 뛰쳐나왔다.

“폐하!”

자신이 부르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남자.

‘아,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낸시 그년부터 조져야겠어.’

그러려면 폐황후 마리아를 죽이는 일이 시급했다. 그래야 헨리가 낸시에게 바라는 희망이 와장창 깨져 버릴 테니까.

* * *

군터는 제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솔샤르가 에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비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게다가 로랑은 누가 보아도 여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목소리까지완벽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광산에서 에로와 거의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설사 했어도 자신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린 것이기에 그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기회가 없었을 터였다.

“정식으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해 봐.”

“에로는 제 여자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우려하실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것에 관한 의심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고맙습니다, 대왕.”

“에로라고 했나? 마리아한테 똥손이라고 했던?”

“예?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농담이었어요.”

“너는 절대 마리아를 배신해선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하마.”

군터의 말에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뻐하더니, 서로를 마주 보며 진하게 눈을 맞췄다. 뜻을 이룬 것에 대한 감동을 공유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군터는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휘이 저었다.

“나가 봐.”

막상 허락하고 두 눈으로 확인도 했으나, 아직 마음은 완벽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신이 알던 솔샤르는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둘의 애정 행각을 보고 있기가 민망할밖에. 자신도 차차 에로가 완전히 여자라고 느껴야 어색하지 않겠지.

한데 이런 솔샤르의 모습을 처음 보긴 했다. 그는 어떤 여자를 만나도 좋다 싫다 표현한 적이 없었다. 아니, 진실로 사랑한 여자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에로를 보는 솔샤르의 눈빛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불편할 정도로 진지하달까.

‘네가 행복하면 된 거다.’

군터는 제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마리아에겐 소중한 친구가, 솔샤르에겐 연인이 생기는 일이니까.

“대왕, 겨울 제례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스톤이 곧 겨울잠을 잘 테니까요.”

“알고 있다? 마녀들은?”

“날짜에 맞춰 올 겁니다.”

에로가 마녀라는 말을 듣고 놀라자, 솔샤르가 조곤조곤하게 설명했다. 헬랜드는 겨울이 매우 혹독하여, 매년 마녀를 불러서 겨울 제례를 지낸다고 말해 주었다. 겨울에는 정령인 스톤이 잠이 들기 때문에 마녀들이 대신 헬랜드의 번영과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이라 했다.

“그런데 마녀를 불러서 그런 행사를…….”

에로는 사뭇 이해가 안 됐다. 다른 나라에선 마녀를 악으로 규정하여 보는 족족,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화형에 처했다. 그런데 헬랜드에선 어째서 사악한 여자들을 이용해 제례를 치르려는지 이상했다.

“마녀라고 해서 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군터가 에로의 의구심에 대하여 답해 주었다. 미리 알려 주면 곧 에로가 마리아한테도 잘 설명해 줄 테니까.

“신성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이야. 점성술과 주술에도 능하지.”

에로는 솔샤르의 설명에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완전히 수긍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그다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제 남자가 다른 여자들을 찬양하는 꼴은 보기 싫은 거니까. 그러다 에로는 실소하고 말았다.

‘사람의 감정이 참 간사해. 내가 편견에 휘둘리는 건 억울해하면서…….’

저 자신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는 군터의 의구심은 매우 정상인 것이다. 저조차 마녀들이 신성하고 아름다울 리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하지만 이젠 솔샤르의 말을 믿기로 했다.

“이번에도 점괘가 잘 나와야 할 텐데 말이다.”

군터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잘 나올 겁니다. 우리 헬랜드는 10년 동안 발전해 왔으니까요.”

“솔샤르, 마녀들에게 줄 황금을 충분히 준비해 놔라.”

“알겠습니다.”

* * *

마리아는 밤이 되어서야 모든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종일 에로와 노라를 만나지 못했다. 아침부터 군터와 약속한 맹약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몸을 정갈하게 씻은 뒤, 머리를 곱게 빗고 몸에 향기로운 향유를 발랐다. 그녀는 속옷은 입지 않고 가운만 걸친 채, 군터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군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달빛을 쬐고 있는 마리아를 보곤 잠시 멈춰 섰다. 달빛에 물든 마리아는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또한 오늘따라 이목구비가 더욱 고왔다. 특히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는 달빛에 반사되어 은구슬처럼 신비롭게 반짝거렸다. 군터는 천천히 마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음의 준비는 됐나?”

그의 물음에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깨끗하고 하얀 등에 흉흉한 붉은 용이 새겨질 거다.”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물론 그녀가 기억할 리 없지.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쉽게 꺼내기는 힘든 일이니까. 긴장하는 마리아와는 달리 군터는 흥분 상태였다. 이런 물리적인 행위가 약속을 굳건하게 지켜 줄 것이라 믿었다. 그로써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기도 하니까.

군터는 마리아의 가운을 벗기곤 그녀의 하얀 목과 어깨에 키스했다. 마리아는 그의 입술이 제 살갗을 지날 때마다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왠지 오늘따라 그의 입술이 불도장처럼 뜨거웠다. 어느새 마리아는 침대에 엎드린 채 누워 있었다. 군터는 마리아의 눈을 천으로 가린 뒤, 비단 가운으로 마리아의 하체를 덮어 주었다. 오로지 등만 노출해야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왔느냐?”

어린애가 아닌 남자 스톤이었다.

“내 것과 똑같이 새겨 넣어라.”

“빛으로 각인하기에 출혈이 심할 겁니다.”

“치유하면 되지 않나?”

“상처를 입히는 것과 치유를 동시에 할 순 없습니다. 각인이 끝나면 다음은 대왕께서 보살피셔야 합니다.”

“알았다.”

스톤은 군터에게 커다란 병을 건넸다. 상처가 나면 약을 제대로 발라 주라는 의미일 터. 마리아는 제 등에 용을 새겨 줄 남자가 궁금했다. 군터와의 대화를 들어 보면 서로 잘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의구심도 곧 까마득한 의식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따가운 빛이 마리아의 등을 베는 양 아프게 했다.

“아……!”

이젠 오롯이 통증만 느끼는 상황. 마리아는 빛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신음했다. 마치 바늘이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군터는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에 제 것이라는 표식이 각인되는 순간, 희열감에 몸을 떨었다. 또한 마리아가 통증으로 신음할 때마다 짐승 같은 욕정이 솟구쳤다.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야릇하게 새어 나오는 소리. 드디어 각인이 정점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마리아는 고통스러운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크게 신음했다. 이내 군터는 벌어진 그녀의 잇새 사이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아……. 읏!”

마리아는 제 입술을 탐하는 군터를 거부하지 않았다. 되레 제 입 안을 부드럽게 휘젓는 그의 말캉한 혀를 엄마 젖처럼 빨며 고통을 참아 보려 했다. 마리아는 처음 알았다. 시야를 가리게 되면 제 몸의 신경이 더 예민해져서 흥분한다는 것을.

“윽.”

되레 군터의 입술이 제게서 떨어지지 못하게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입 안으로 헤치고 들어가 마음껏 음미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휩쓸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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