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대마녀와 밤을 보낸다고.’
마리아는 문밖에서 에로와 노라의 대화를 대략 엿들었다. 그중에서도 겨울 제례가 끝나면 대마녀와 군터가 같이 밤을 보낸다는 말은 아주 정확히 들었다.
‘그래서 뭐, 나랑 무슨 상관인데.’
사랑하는 사이이거나 부부인 것도 아닌 것을. 그저 군터가 일방적으로 제 등에 문신을 새겨, 제 것이라 표시해 둔 것이 전부였다. 그건 오로지 군터의 사정이지, 제 감정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에로를 위해서 허락한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한데 왜 실망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곤 흔들리는 꼴이라니.
‘대왕이 누구와 자든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마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도 황후의 자리에 있어 봐서 알지만, 일국의 왕에게는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종종 생기곤 한다. 특히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의 절차라면 대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터.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마리아는 애써 잡념을 떨치려 도리질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시녀들이 커다란 상자를 하나씩 들곤 나타났다.
“그게 뭐예요?”
에로가 시녀들에게 묻자, 그들은 상자를 하나씩 열며 설명했다. 겨울 제례 때 쓸 물건들이라고.
“비단이네.”
“이건 장신구인데.”
“어머, 화장품도 있어요.”
상자가 차례대로 열리자 에로와 노라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 시녀 중 한 명이 세 사람을 향해 설명했다.
“겨울 제례 때 입으실 예복입니다.”
“우리도 참석해요?”
에로는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사실 겨울 제례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라는 줄 알았다. 한데 참석해야 한다니. 자신도 예쁜 옷과 장신구를 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겨울 제례는 헬랜드 왕국의 가장 큰 행사입니다.”
그때 노라가 비장한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에로에게로 돌렸다.
“에로, 기회가 왔다. 우리의 솜씨를 발휘할 때라고.”
“당연하죠.”
에로는 노라의 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겨울 제례 때 반드시 보여 주어야지. 이 왕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마녀들이 아무리 대단한 미인들일지라도 그에 못지않게 꾸미면 될 일이다. 두 사람은 마리아를 불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마리아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자기들이 예뻐 봐야 얼마나 예쁘다고. 흥! 절대 지지 않아.”
에로는 비단을 몸에 두르며 강한 의지를 다졌다. 마리아는 그런 에로의 반응이 재밌어서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정작 에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 네가 제일 빛날 거야.’
마리아는 에로를 보며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여자만큼 빛나는 존재도 없다고.
* * *
군터와 솔샤르, 그리고 여러 정무대신이 모여 심각하게 회의 중이었다. 타국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쓸 만한 사람들이 들어와야 하는데, 맨 농노나 양아치뿐이니.”
“그러게 말입니다. 기사들은 자존심 때문에 선뜻 이주를 못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받아야지 어쩌겠습니까? 왕성 건립이 시급한데.”
“그것도 문제지만, 새롭게 이주한 사람들을 어느 지역에 어떻게 배치하고 어디에서 관리하느냐를 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명 정무대신이란 사람들인데, 의견만 내놓을 뿐 해결책은 딱히 제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도 대부분 헬랜드의 전사 출신들이라 싸움에만 능할 뿐 행정에 관해선 문외한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성 건립이 시급하고 인구수를 늘려야 한다고 해도 아무나 받아들일 순 없다.”
군터는 단호했다. 각국의 훌륭한 인재들이 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으나 이주민을 추려 보면 범죄를 저지르고 헬랜드로 도망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이번 이주민 중에는 라스토니아 출신의 기사들도 몇 명 있습니다. 심지어 귀족도 있습니다.”
솔샤르의 말에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기사들이야말로 문무를 갖춘 고급 인력이니까. 처우만 보장해 주면 쉽사리 배신하지 않는 것이 그들만의 규칙이기도 했다. 게다가 귀족이 헬랜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다니, 왠지 자부심마저 느꼈다. 그때 군터가 솔샤르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마리아를 데려와라.”
“예……? 예.”
솔샤르는 처음에는 놀라는가 싶더니 곧 군터의 의도를 알아챘다. 솔샤르는 다급히 마리아를 데리러 나갔다. 그러자 정무대신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남자들 회의에 어째서 여자를…….”
“아니, 여자들이 뭘 안다고.”
군터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무식해도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 착각하는 우매한 인간들뿐이었다. 물론 저 자신도 한때는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은 남자들의 것이라 여겼다. 한데 그 생각을 깨 준 사람이 열일곱 살에 만난 마리아 스튜어트였다. 어린 소녀는 방황하는 한 소년의 삶을 바꿔 주었으니까.
“또 모르지, 한때는 황후였으니 다른 여자들보다는 개미 코딱지만큼은 더 잘 알겠지.”
“시끄럽다.”
대신들의 비아냥에 군터가 일침을 가했다.
“송구합니다, 대왕.”
때마침 솔샤르가 마리아를 데려왔다. 그녀도 처음에는 남자들만 빼곡한 회의실에 자신을 부른 것에 놀란 눈치였다. 군터는 마리아에게 현재 논의하고 있는 상황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마리아는 군터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곤 커다란 종이에 자기 생각을 쓰기 시작했다.
솔샤르는 군터의 따뜻한 시선이 마리아에게 닿는 광경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마침내 마리아가 글쓰기를 마치자, 솔샤르는 종이를 정무대신들을 향해 보였다.
“와!”
“역시 황족 출신은 다릅니다.”
“그러게요. 글씨체를 보십시오.”
“근데 뭐라고 쓴 거죠?”
“좋은 말이겠죠.”
대신들은 수려한 글씨체를 보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군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자신도 열일곱까지 글을 알지 못했다. 한데 마리아를 만난 뒤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세상은 싸움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많이 배우고 알아야 함을 깨달은 터라, 리베리오에게 글을 배웠다.
“솔샤르, 읽어 봐라.”
더 재밌는 건, 솔샤르도 자신과 함께 리베리오 교황에게 글을 배웠다는 것이다.
“첫째, 이주청을 설립할 것.”
“아하! 이주청.”
정무대신들은 그런 관청이 있는 줄도 몰랐다.
“둘째, 이주청의 사람들은 공용어와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쓸 것. 셋째, 이주민 중에 범죄자는 몸에 표식이 있을 테니 반드시 가려낼 것. 넷째, 이주민에게 임시 체류권을 주어 헬랜드에서 잘 적응해 가는 사람에게만 왕국민임을 인정할 것. 다섯째, 각국에 사신을 보내 분야별로 특출 난 인재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헬랜드의 왕국민이 되기를 권유할 것. 여섯 번째…….”
군터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제 곁에 마리아와 같은 인재가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차게 기뻤다. 따지고 보면 한 나라의 체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녀였다. 솔샤르가 글을 다 읽자, 회의장에 적막감이 맴돌았다.
“앞으로 정무 회의를 할 때마다 마리아도 참석해.”
군터의 말에 사람들은 술렁였다. 물론 마리아도 크게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반발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정무 회의에 여자가 나대는 일은 없습니다.”
“맞습니다, 대왕. 다른 나라도 황후라고 할지라도 정무 회의에 참여하진 않습니다.”
“애만 잘 낳으면 되는 거지……. 남자들 하는 일에 여자가 감히…….”
쾅! 군터가 탁자를 주먹으로 때리자, 모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솔샤르, 반대하는 저놈들의 목을 쳐서 성문에 매달아.”
군터의 노여움이 예상보다 컸다.
“예, 대왕.”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밖에 있던 병사들이 들어와 군터의 의견에 반대한 대신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나갔다. 그러자 마리아가 군터에게 다가가 고개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저런 무식한 새끼들은 정무대신의 자격이 없다.”
군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마리아는 다급하게 종이에 제 생각을 써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군터는 마리아가 건넨 종이를 읽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격이 없는 건, 대왕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을 처벌할 때는 법에 따른 절차와 재판이 필요해요. 대왕의 한마디에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옳지 않아요. 그건 나라가 아니에요.>
다 옳은 말이었다. 자괴감을 느낄 정도로. 특히 법에 따르라는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다. 따져 보니 헬랜드에는 국법도 없는 것을. 순간, 예전의 마리아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음식을 먹을 때는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야죠.]
어째서 기시감을 느끼나 했더니, 그때와 흡사한 상황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후! 모두 나가.”
군터는 치솟는 화를 간신히 짓누르며 말했다. 이내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마리아도 군터의 눈치를 보다가 나가려던 찰나였다.
“이리 와.”
“!”
‘대왕이 화가 많이 났나 봐. 내가 너무 심했나.’
아무래도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듯했다. 마리아가 다가서자 군터는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곤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너는 예전에도 지금처럼 또박또박 알려 줬다.”
“!?”
마리아는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예전에 그와 만난 적이 있었나, 기억에 없는데. 마리아는 그의 얼굴에서 답을 찾으려 했지만, 그는 더 이상은 말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한마디에 마리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당신과 만난 적이 있어요?’
당장 물어보고 싶어도 말을 하지 못해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 별안간 군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날 선 눈으로 마리아를 노려보았다.
“마리아.”
“‥…….”
“나를 좋아해라.”
“?”
“아니, 사랑하도록 해. 아주 많이.”
“‥…….”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