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31화 (31/120)

31화

마리아는 매일 군터가 맡긴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왕국이 건립된 지 10년밖에 안 된지라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마리아는 첫 번째로 이주민의 관리와 감독에 관한지침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혼자 하기엔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군터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약속을 해 주었다.

‘짓궂기만 한 남자 같지는 않아.’

회의 때마다 참석해 군터의 모습을 지켜본 마리아는 자신이 그의 단면만 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절감했다. 그는 누구보다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싶어 했다. 대충 일하고 황제의 권위만 내세우던 헨리보다 군주의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마리아, 언제까지 글만 쓸 건데?”

노라와 바느질하던 에로가 툴툴거렸다. 저와 노라는 어떻게 하면 마리아가 겨울 제례 때 가장 돋보이도록 꾸밀까 고심 중이건만, 정작 그녀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철없는 것아, 마리아는 건들지 말어. 나랏일이 보통 힘들어?”

“아잉, 그래도…….”

“어서 와서 이거나 마저 꿰매도록 해.”

노라의 핀잔에 에로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제례 때 입을 드레스는 그 자체로도 이미 훌륭하지만, 좀 더 화려한 멋을 살리기 위해 손을 댄 상태라 매우 바빴다. 그러니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는 것을.

마리아는 잠시 일을 멈춘 뒤,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노라가 그런 마리아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마리아, 내 것이다 싶으면 절대 빼앗기지 마.”

“?”

“두 번은 뺏기지 말란 소리야.”

“노라!”

에로가 버럭 화를 냈다. 폐황후가 된 마리아의 아픈 기억을 굳이 들춰낼 필요까진 없는데. 남편한테 버림받고 황후 자리도 빼앗기고 졸지에 이곳까지 쫓겨온 신세. 마리아만큼 인생이 극단적인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런 말을 하다니.

“예전엔 그랬지만 앞으론 그러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노라의 얼굴이 매우 진지했다. 정말 하기 싫은 말이긴 해도 꼭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더 빼앗길 게 뭐가 있다고.’

두 사람이 괜한 노파심에 하는 말이겠지. 어차피 다 잃은 것을. 사실 헬랜드에서 자신이 남에게 빼앗길 만큼 소유한 것이 있던가. 마리아가 피식 웃고 말자, 노라가 답답한지 한숨을 쉬었다.

“남자들은 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손에 꽉 쥐고 놔주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눈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단 말이지.”

그러면서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 다른 여자와 한 번쯤 자는 건, 마음은 주지 않는 본능적인 욕구 해소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우리 솔샤르 님은 아닌데……. 아얏!”

딱! 노라가 눈치 없는 에로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아프잖아요.”

“아무튼 겨울 제례 때 대왕 곁에서 떨어지지 말어.”

노라가 걱정을 가득 담아 충고를 건네고서야 에로는 큰 깨달음을 얻은 양, 마리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마리아는 군터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리아.]

[‥…….]

[나를 좋아해라.]

[?]

[아니, 사랑하도록 해. 아주 많이.]

[‥…….]

[명령이다.]

사랑하는 것도 명령하는 남자라니, 오만하기 짝이 없지만, 듣는 순간 심장이 떨렸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너를 갖지 않을 거다.]

군터가 제게 그 말을 한 이후로, 그와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도 제 손가락 하나도 건들지 않았다. 전에도 느꼈지만, 군터 플레이슬리는 제게 바라는 것이 아주 많은 듯했다. 아니, 어울리지 않게 순수한 면이 있다고 할까. 진실한 마음이나 사랑……. 뭐 이런 감정. 저조차 깊은 사랑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당혹스러운 것을.

‘나도 그런 거 해 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리아는 혼란을 떨치듯 일어나 다시 책상 앞으로 향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것을.

* * *

군터는 오늘 도착한 이주민 상황을 보고 받은 뒤, 승인 처리를 하느라 바빴다. 우선 마리아의 말대로 임시방편으로 이주청을 설립하고, 행정 업무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책임자로 정했다. 마리아가 다음 절차도 정리하고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대왕, 겨울 제례 때 말입니다.”

솔샤르가 군터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대마녀와 밤을 보내실 겁니까?”

“그건 관례잖느냐.”

“하지만 마리아 님이 아시면…….”

“공사는 구분해야지. 제례가 끝나고 대마녀의 점괘를 듣고 같이 밤을 보내는 건 일에 속한다.”

마리아가 신경이나 쓸까. 차라리 질투라도 해 준다면 좋으련만. 저 혼자 좋아서 날뛸 뿐이지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을 터였다.

“대왕께서 마리아 님을 자신의 여자라고 정하셨으니, 미리 말씀은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나는 일을 하는 거다.”

군터는 대답하면서도 내심 마리아의 반응이 궁금하긴 했다. 혹여 그녀가 신경 쓰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이 찾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씁쓸해졌다. 저만 하는 짝사랑이란 자각을 하자 괜스레 그녀가 야속하달까.

“여자들은 아닌 척해도 속으로 담아 놓곤 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심사숙고하십시오.”

“심사숙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여자의 마음입니다.”

군터는 진지하게 말하는 솔샤르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마.”

군터는 사실 겨울 제례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요즘 들어 제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왕국의 체계를 바로잡을까 내지는 언제쯤 마리아가 자신을 기억해 낼까 하는 바람뿐이었다.

‘넌 모르지. 우리가 운명이란 거 말이다.’

군터는 허탈하게 웃으며 문서를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머리를 식힐 때가 된 듯했다.

“이주청으로 가 보자. 이번에는 어디에서 어떤 인간들이 왔는지 살펴는 봐야지.”

“예.”

* * *

알랑 세라두는 헬랜드 국경 근처에서 마녀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곧 헬랜드의 겨울 제례가 돌아오니 마녀들의 대대적인 돈벌이가 시작될 터였다. 그는 솜씨 좋은 용병 두 명만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 머릿수가 많아 봐야 괜히 눈에 띄기나 할 테니까.

때마침 마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하얀 백마를 탄 대마녀 사만타가 단연 돋보였다.

“사만타”

알랑이 다가가자 사만타가 말을 멈췄다. 빛나는 금발에 빼어난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사만타는 마녀라는 호칭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여신이라 칭송할 터였다. 그녀를 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알랑은 가슴이 설렜다.

“알랑? 여긴 웬일이세요?”

알랑은 말에서 내린 사만타가 자신을 향해 요염하게 걸어오는 모습을 감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했다.

“여전히 달의 여신처럼 아름답군.”

알랑은 귀부인을 대하듯이 사만타의 손등에 정중히 입 맞췄다.

“달콤하게 사람의 귀를 녹이는 건 여전하시네요.”

“녹아 주지 그러나?”

알랑은 사만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만타에게 좋은 제안을 하고 싶어서 기다렸어.”

“돈벌이군요?”

“돈벌이라니, 그 꽃잎 같은 입술로 세속적인 말은 삼가야지.”

“하여튼 말로 사람을 녹이는 데는 최고라니까.”

사만타가 까르르 소리 내 웃었다. 자신이 그를 모를까. 알랑 세라두가 이토록 험한 곳까지 왔을 때는 급한 사정이 있거나, 돈이 될 만한 한탕거리가 있어서일 터였다.

“우리를 헬랜드에 데려가 줘.”

“알랑과 용병들 말인가요?”

사만타가 놀라며 되물었다. 이제껏 제례를 지낼 때는 남자, 아니 검을 쓰는 사람들을 데리고 간 적은 없었다. 자칫 군터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밥줄 끊어지는 건 순식간이니까. 마녀들은 헬랜드의 겨울 제례를 지내 주고 받는 돈으로 1년을 생활하는지라 이번 기회는 굉장히 중요했다.

“걱정하지 마. 사만타한테 피해 주는 일 없어. 헬랜드에 가서 확인할 일이 있어서 그래. 분란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게…….”

“들여보내 주기만 하면 돼. 그럼 헬랜드의 대왕이 주는 만큼 사례하지.”

“정말인가요?”

사례하겠다는 말에 사만타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쉽사리 허락해선 안 될 터. 알랑의 숨은 속내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물론 의뭉스러워서 술술 불진 않겠지만. 저들의 계획을 알아야 대처를 할 테니까.

“좋아요.”

“고마워, 사만타.”

* * *

마리아는 이주청으로 향했다. 행정 문서를 만들려면 이번에 어떤 이주민이 왔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많이 왔네. 300명은 돼 보이는데.”

에로가 이주청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매년 헬랜드로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야만인의 땅이라고 얼마나 천시했는데, 서서히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이주민들이 여러 갈래로 줄을 서자, 기록관들이 그들에게 고유 번호를 부여하고 기록하는 일을 시작했다. 마리아는 행정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잘하고 있는지, 자리마다 다니며 살폈다. 개중에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번호를 엉망으로 부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글로 다시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마리아, 네가 시킨 대로 서류정리를 잘하고 있는지 확인했어.”

마리아는 이곳에 오기 전 에로가 할 일을 글로 알려 주었다. 노라도 같이 왔더라면 좋겠지만, 그녀는 글을 모르는지라 에로만 데리고 왔다. 다행히 에로가 눈썰미도 있고 말도 잘해서 큰 도움이 됐다.

“가자, 마리아.”

에로의 말에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아 스튜어트.”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금발의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든?’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 에이든이 바로 제 앞에 서 있다니. 마리아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에이든이 한달음에 달려와 마리아를 품에 안았다.

“살아 있었구나. 마리아!”

‘어떻게 에이든이 여기에?’

역시 에이든의 가문도 헨리의 박해를 피하지 못한 거겠지. 마리아는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에로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마리아,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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