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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32화 (32/120)

32화

마리아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에이든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감격스러운지 가슴을 들썩이며 오열했다.

“마리아,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처형됐다는 말도 있고, 볼모가 되어 먼 나라로 잡혀갔다는 소문도 파다했거든. 그런데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마리아는 우는 에이든의 등을 연신 토닥였다.

“네 머리는 어떻게 된 거야?”

에이든은 회색으로 바래 버린 마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빛나는 금발을 가졌었다. 하긴 그런 엄청난 일을 당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에……어디.”

마리아가 간신히 입을 떼자, 에이든은 유령이라도 본 양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아, 왜 그래? 어째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건데?”

누구보다 총명했으며 매사 교양 넘치게 말하던 라스토니아의 황후 마리아였건만,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는지, 보면서도 도통 믿기지 않았다.

“충격 때문이다.”

그에 대한 대답이 뒤쪽에서 날아왔다. 아주 딱딱하고 엄한 목소리였다. 마리아와 에이든은 돌아서 군터를 바라보았다.

“헬랜드의 대왕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라스토니아에서 온 에이든 스튜어트입니다.”

눈치 빠른 에이든은 군터를 금세 알아보곤 그에게 예의를 갖췄다. 그제야 험상궂게 구겨졌던 군터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에이든 스튜어트?”

“마리아의 오라비입니다.”

“오라비!”

어쩐지 마리아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스튜어트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출중했다. 그 말에 군터는 화색을 되찾았다. 하긴 마리아에겐 위로 오라비가 몇 명 있긴 했다. 물론 그들의 행방도 묘연하긴 하지만……. 아마도 그중의 한 명일 터. 오래전에 보았던지라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 않았다. 그러나 친오라비라고 해도 마리아의 손을 꼭 붙잡은 모습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친오라비조차 질투의 대상으로 여기는 자신이 유치하여 짜증이 났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이 얽힌 두 사람의 손에 머물렀다.

그때 마리아가 곁에 있던 탁자로 다가가 종이에 글씨를 끄적였다. 그녀는 자신이 쓴 종이를 에이든에게 보여 주었고, 곧 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리아가 무어라 했는지 말해 보아라.”

군터는 여유 있게 팔짱을 끼며 물었다. 대체 마리아가 제게도 보여 주지 않고 에이든한테만 무슨 말을 쓴 것인지 궁금했다.

“아, 마리아가 대왕께 제 소개를 하라는군요.”

“소개? 오라비라고 하지 않았나?”

“예, 그것 말고……. 그러니까.”

에이든은 한참 뜸을 들이곤 말문을 뗐다. 사실 제 자랑을 대놓고 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니까.

“저는 라스토니아 제국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이후에는 대륙 법원에서 판사로 일한 적도 있고 법전 공동 집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고급 인력이었다. 군터는 살면서 이런 학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열일곱에 겨우 글을 깨달은 자신과 비교된달까. 아니지, 자신은 현자라 추앙받는 리베리오 교황의 목숨을 구했으며 제 여자는 마리아 스튜어트였다. 또한 현재는 헬랜드의 대왕이 아닌가. 기죽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에이든은 이주민 신세로 헬랜드로 왔으니 이젠 자신의 신하에 불과한 것을.

“환영한다.”

진심이었다. 이런 고급 인력이 장차 헬랜드를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될 테니까. 더구나 마리아의 오라비라니……. 좋은 일이기니 하나 이상하게 썩 반갑진 않았다. 아주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었으면 했다. 마리아의 관심이 여러 개로 갈라지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

“솔샤르, 저자에게 합당한 처우를 해 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 한 소녀가 에이든을 향해 뛰어왔다.

“아빠.”

금발 머리를 한 소녀로 대략 열 살쯤 되어 보였다. 한데 친척이라 그런지 마리아를 아주 많이 닮았다. 소녀는 제 아빠의 손을 꼭 잡곤 마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모님?”

“엘리자벳, 인사해라.”

마리아는 갓난아기 때 보았던 조카를 20년이나 흐른 뒤에 훌쩍 커 버린 모습으로 만나 놀라기도 했지만, 감동이 더 컸다. 엘리자벳은 마리아를 와락 껴안으며 친근하게 굴었다. 그리고 군터는 그런 광경을 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저들이 있어서 마리아가 조금이나마 덜 외롭다면 좋은 일일 테지.

“가족이 모두 이주한 모양입니다.”

솔샤르가 에이든과 엘리자벳을 보며 말했다.

“곧 아이의 엄마와도 인사를 나누시겠군요.”

“그럴 테지. 이제 그만 가자, 솔샤르.”

군터는 마리아가 에이든 가족과 마음껏 회포를 풀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려고 했다. 그때 솔샤르가 뒤돌아 에로에게 손을 흔들어 주자, 군터가 불퉁한 얼굴로 핀잔을 주었다.

“적당히 해.”

“송……구합니다.”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간다는데 인사도 해 주지 않는 무심한 마리아. 언제쯤 마리아에게 저라는 사람이 1순위가 될지, 참 막연하기만 했다. 서운한 마음을 안고 돌아서는 군터의 등 뒤에서 아주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아빠, 이제 마리아 고모랑 재혼하면 되는 거야?”

“엘리자벳!”

“아빠가 예전부터 마리아 고모 짝사랑했다며?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단 말이야.”

“어른들의 일에 버릇없이……!”

엘리자벳을 타박하긴 해도 에이든은 그리 싫지 않은 목소리였다. 마리아의 가족 상봉을 잠시나마 흐뭇해하며 발걸음을 옮겼던 군터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아의 오라비라고 하지 않았나?”

군터는 얼굴이 굳은 채로 솔샤르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친오라비가 아닌 모양입니다. 사촌인가 봅니다.”

군터는 허공을 향해 화기를 내뿜곤 마리아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 * *

마리아는 며칠째 군터의 집무실에서 나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전보다 자신의 행동반경이 좁아졌다고 해야 할까.

‘나한테 행정규칙을 만들라니.’

라스토니아에서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한 나라의 법체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이럴 때 에이든처럼 박식하고 경험 많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되련만. 그날도 군터가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안부도 제대로 묻지 못했다.

[마리아, 이리 와라.]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며 손까지 내미는 상황에 숨이 턱 막혔다. 군터의 표정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엘리자벳이 에이든의 뒤로 숨어 버렸을까. 그대로 끌려와 집무실에서 그와 매일 일만 하며 함께 식사하고 목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이 너무 많아.’

에이든에게 부모님과 오라버니, 가문 사람들이 어찌 됐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옴짝달싹할 수 없으니 정말이지 답답할 지경이었다.

“마리아, 내궁의 법도에 관해서도 문서로 만들도록 해.”

“!?”

군터는 마리아가 하나의 일을 끝내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일을 주었다. 게다가 업무의 과중함에 대한 마리아의 불만을 단번에 상쇄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너처럼 정갈하고 아름다운 글씨체다.”

군터가 자신이 열심히 쓴 문서를 꼼꼼히 살피며 감탄할 때면 언제 힘들었나 싶을 정도로 서운함이 풀렸다. 저 자신도 칭찬에는 약한 보통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도 오늘은 허락을 받아 내야지. 에이든한테 물어볼 게 너무 많아.’

마리아는 최대한 일을 신속하게 끝낸 뒤, 종이에 용건을 써서 군터에게 건넸다.

<에이든 오라버니를 만나고 올게요.>

“다녀와.”

“!?”

“식사하고.”

‘그럼 그렇지.’

그래도 허락한 게 어디야. 하지만 마리아는 식탁의 음식을 보곤 한숨이 나왔다. 왜 오늘따라 이런 음식으로만 준비한 건지.

“나는 포도 껍질이 이에 끼는 것이 싫다. 껍질을 까서 줬으면 좋겠다.”

마리아는 몇 분째 포도 알 껍질을 까는 데 몰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식사 시중은 시킨 적이 없건만, 다른 이유가 있나?

“스튜에서 당근은 다 골라내서 다오.”

‘당근을 골라내라니? 다져서 넣은 당근을 어떻게 골라내지?’

아무튼 스튜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당근을 전부 골라내서 따로 담아서 주긴 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줄어들지 않았다.

“생선 가시는 위험하다. 발라 다오.”

온갖 시중을 들어 주다 보니 식사만 두 시간을 했다. 한데 군터는 정작 많이 먹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그런데 그는 음식이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에이든 스튜어트가 선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할 거다.”

그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경고 같기도 하고. 그제야 마리아는 군터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에이든에게 아내가 없으니 제게 다른 마음을 품을까 봐, 과도한 경계심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할 뿐, 정작 상대의 마음은 개의치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남자를 원하지 않아요. 필요도 없고, 믿지도 않아요.’

제게 필요한 건 헬랜드의 대왕 군터 플레이슬리의 신임이었다. 저 자신을 복수의 무기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남자.

‘어떤 남자한테도 내 마음을 주는 일은 없어요. 당신도 예외는 아니에요.’

그가 홀로 소유욕이나 집착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려도 제 알 바가 아니었다.

‘당신도 날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요.’

설사 당장은 좋아한다고 해도 사람의 감정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때마침 솔샤르가 나타나는 바람에 분위기가 반전됐다.

“대왕, 마녀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사만타는?”

“오자마자 대왕을 찾고 있습니다.”

“가자.”

군터는 냅킨으로 입과 손을 대충 닦은 뒤, 솔샤르와 식당을 나갔다. 마리아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방금까지 제게 집착하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긴 대마녀와 아주 돈독한 사이라고 했지, 아마. 1년에 한 번 가장 중요한 제례를 지내고 같이 밤을 보낼 정도로. 그것도 10년간이나.

‘남자들은 똑같구나.’

마리아는 가시를 골라내다 만 생선을 내려놓은 뒤, 손을 닦았다. 한데 왜 이렇게 실소가 터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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