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갑자기 왕궁이 부산스러워졌다. 마녀들을 보기 위해서 왕궁 곳곳에 있던 궁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마리아와 에로, 노라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시간에 에이든에게 다녀오려 했지만, 에로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야드까지 나오게 됐다.
“마녀들 맞아?”
마녀라고 하기에는 옷차림이 심하게 화려하고 야했다. 대략 스무 명이 조금 넘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미모가 뛰어났다. 누가 보아도 저들을 마녀라 부르기엔 무리였다.
“내 보기에는 창부들 같구먼.”
노라가 입을 삐쭉거리며 투덜댔다. 마녀라고 티를 내며 여행해 봐야 험한 꼴밖에 더 당할까. 그러니 일부러 저리도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는 거지. 마치 여러 나라를 다니며 공연하는 무희들처럼.
“신전에서 왔다고 해도 믿겠어요.”
에로의 목소리도 매우 저조했다. 자신도 어디 가선 외모로 빠지지 않는 편인데, 마녀들은 바쁜 궁인들이 일부러 구경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여자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저 여자가 대빵인가 봐요.”
에로의 말에 마리아가 곧바로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알았어. 고운 말 쓸게. 대장인가 봐.”
그제야 마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또한 마녀들이 왔다고 반색하던 군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마녀의 이름이 ‘사만타’라고 했던가. 제 연인의 이름을 부르듯 아주 자연스러웠는데.
[사만타는?]
[오자마자 대왕을 찾고 있습니다.]
[가자.]
객관적으로 봐도 대마녀, 사만타는 모두의 시선을 받을 만했다. 빛나는 금발에 화려한 이목구비, 육감적인 몸매, 요염한 자태까지. 무엇보다 저리도 달콤하게 걷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나도 예전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졌었는데.’
마리아는 사만타한테서 부러운 점이 딱 하나였다. 이제는 빛을 잃어 잿빛으로 바래 버린 자신의 머리카락.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왜 다른 여자의 머리카락 색에 갑자기 제 마음이 서글퍼지는 걸까. 괜스레 눈물이 나오려 했다. 이제껏 잘 참았건만, 아직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모양이다.
“어머머! 저 남자들 좀 봐.”
그때 에로가 크게 역정을 냈고, 마리아와 노라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군터와 솔샤르가 사만타를 향해 한껏 미소 짓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만타는 낭창대는 팔로 군터의 목을 감싸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에게 키스했다.
“!?”
“뭐야, 뭐야? 대왕께서 마녀랑 키스하는 거야?”
에로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를 쳤고, 노라는 두툼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씩씩거렸다. 마리아는 군터와 마녀가 키스하는 광경을 피하지 않았다. 오래된 연인처럼 스스럼없어 보이는 것을 넘어, 두 사람은 그림같이 잘 어울렸다.
순간, 쿵쿵- 마리아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녀는 손으로 지그시 제 심장을 짓눌렀다. 이것이 심장 뛸 일은 아닌 것을……. 그때였다. 대마녀와 키스하는 군터의 시선이 마리아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다른 여자와 감미롭게 키스하면서 여봐란듯이 쳐다보는 남자. 제 등에는 자신의 여자라는 문신까지 떡하니 새겨 놓곤 정작 다른 여자와 입 맞추는 모습을 보여 주다니. 아니지, 그에게 제 문신이 소유욕의 부산물일지는 몰라도 제게는 에로를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거래에 불과했다. 그러니 의미를 둘 필요는 없었다.
마리아도 굳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왠지 오기가 난달까. 아니, 피할 이유가 없었다. 마리아는 일부러 에로와 노라를 번갈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축제를 보기 위해서 나온 구경꾼처럼.
‘오늘부터 잠은 노라와 자면 되겠어.’
분위기를 보아하니, 군터와 대마녀는 기나긴 밤을 활활 불태울 듯하니.
* * *
알랑은 레이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뒤 로브를 걸쳤다. 그런 차림새로 마녀들 틈에 몸을 숨겼더니, 다행히 국경을 넘을 때도 심지어 왕궁에 들어올 때마저도 제지당하지 않았다.
‘폐황후를 찾아야 하는데 말이지.’
그는 오로지 마리아를 찾는 데 급급했다. 전에 몇 번의 연회를 통해 인사를 나눈지라 마리아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니, 굳이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녀는 어디에서도 눈에 띄었다. 황후의 품격이 철철 넘쳤으니까. 하지만 황후에서 볼모로 신분이 급락했으니, 못 알아볼 수도 있을 터. 그는 마녀들을 구경 나온 궁인들의 면면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시선이 멈췄다.
‘마리아 스튜어트.’
단번에 찾았다. 머리카락 색이 좀 바뀌고 전보다 덜 화려해도 틀림없이 폐황후, 마리아였다. 이래서 사람의 존재감은 옷이나 장신구가 좌우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 많은 궁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으니까. 단순히 미인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마리아를 볼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는 강하지만 부드럽고 처연한데 도도하달까. 죽이긴 좀 아까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로랑의 앞길을 막으니 어쩔 수가 없다.
‘일이 술술 풀리네.’
역시 돈의 힘은 컸다. 아무리 어려운 세상의 일도 해결 못 할 것이 없으니까. 라스토니아의 태양이며 지존이라는 헨리 코부르크 황제도 결국 돈에 시달리며 아등바등하고 있으니.
‘나의 수고비는 폐황후의 숨겨진 재산인 거로 하지.’
알랑은 같이 온 용병과 몸을 숨겼다. 일단 왕궁의 지리를 익힌 뒤, 제례가 열리는 날, 폐황후를 납치하여 궁을 빠져나가야 할 터. 그러자면 궁에 있는 여러 입구를 미리 알아 둬야 했다.
‘사만타한테 혼이 쏙 빠졌어.’
군터를 보니 어렵지 않게 마리아를 납치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한데 저자가 알고는 있을까. 사만타의 실력이 과장됐다는 것을.’
하긴 무식한 야만인들이 무얼 알까. 오합지졸이 모여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나라인 것을. 어쩌다 돈이 생겨 왕 노릇을 하는 것이지. 신은 참 불공평했다. 저런 짐승들한테 과한 부를 주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사랑하는 여동생의 방해물을 없애 주고, 돈이나 챙기면 돼.’
마리아의 죽음으로 군터와 헨리가 전쟁을 치르든 말든 상관없다. 누가 죽였는지 밝혀지지 않는 이상, 서로의 잘못이라 핏대를 세우고 치고받으며 싸울 터. 결국 불쌍한 건 마리아뿐이었다.
* * *
마리아는 온종일 눈앞이 어지러웠다. 어째서 군터와 사만타가 키스하는 광경이 사라지지 않는 걸까.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연신 곱씹는 저 자신을 보고 말았다. 한심하고 짜증 나고. 아니, 우울했다. 그러다 조금씩 뒤집힌 감정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네가 지금 그런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잖아.’
마리아는 사념에 흔들리는 저 자신을 채찍질하며, 에이든을 만나기 위해 이주청으로 향했다. 아직 거주지를 배정받지 못했으니 이주청 산하의 숙소에 있을 터였다. 미리 그곳 사람들에게 연통을 보낸지라 도착하면 에이든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마리아가 이주청 숙소에 도착하자, 정문 앞에 그가 나와 있었다. 에이든은 초조한 듯 두 손을 맞잡은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침 에이든도 마리아를 봤는지 반색하며 뛰어왔다.
“마리아, 와 주었구나.”
며칠 만의 상봉이 반가워 두 사람은 포옹하며 인사했다. 에이든은 쉴 새 없이 마리아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가 대답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마리아는 에이든에게 반드시 확인할 것이 있기에, 미리 종이와 펜을 준비했다. 우선 자신은 이곳에서 아주 잘 지낸다는 글로 에이든을 안심시켰다. 실제로 이 정도면 볼모가 아니라 손님 수준이니까.
“그러잖아도 너를 다시 만나면 큰아버님과 큰어머님에 관해 말해 주려고 했어.”
그는 비장한 얼굴로 마리아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위대가 성을 쳐들어간 날, 안에는 랑데스의 용병과 정체 모를 병사들이 있었다는 말을 해 주었다.
“로랑 세라두의 가문에서 용병을 보내 우리 가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들었어.”
하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정체를 꼭꼭 숨기고 있어서 지금껏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는 말도 해 주었다.
“마리아, 내가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 줄게.”
“!?”
“큰아버님과 큰어머니의 시신을 황궁에 있는 내 친구가 감식했거든. 그런데 아니래.”
‘아니래?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라고?’
놀란 얼굴로 눈을 홉뜬 마리아를 향해 에이든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시신을 바꿔치기하고 그녀의 부모님을 데려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 세라두 가문에서 데려갔을 수도 있고, 정체 모를 병사들이 숨겼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큰아버님이 미리 계획하신 것일지도 몰라.”
역시 스톤의 예언이 옳았다. 일단 부모님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다만 세라두 가문만 아니었으면 했다. 로랑을 황후 자리에 앉히기 위해 제 부모님을 이용하려 할 테니까. 한데 왠지 그들은 아닌 듯했다. 자신이 꿈에서 본 것처럼 부모님은 한적한 어촌에서 편안하게 지내실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리아는 내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여간해선 소리 내서 울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엉엉- 마리아가 크게 소리 내 울자, 에이든은 그녀를 제 품에 안곤 다독여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은 채 울었다.
“마리아, 이제는 내가 너를 지켜 줄게.”
에이든은 눈물로 젖은 마리아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에이든이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신은 그저 에이든이 이곳에서 엘리자벳과 잘 정착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스튜어트가의 보석, 마리아 스튜어트. 누구보다 빛나던 네가 어쩌다가…….”
에이든은 잿빛으로 퇴색해 버린 마리아의 머리를 만지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의 애틋한 걱정도 오래가지 못했다.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