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34화 (34/120)

34화

언제 왔는지 노라가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귀족 나리,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하게 마리아 좀 데려가야겠수.”

노라는 다급히 다가와 마리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물론 그녀가 왜 그러는지 말해 주지 않아도 잘 아는 터였다. 노라가 자신을 찾아 이 먼 곳까지 온 데는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을 터.

‘대왕이 날 찾나 보네.’

어떤 이유든, 자신의 시야를 오랫동안 벗어나면 득달같이 찾아 대니까. 마리아는 에이든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는 것으로 그의 경직된 얼굴을 풀어 주려 했다. 이렇게 급히 가 버리면 그가 걱정할 게 뻔하니까.

‘시킨 일은 다 했는데.’

정말이지, 눈알이 빠질 정도로 많은 문서를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나왔다. 한데 노라는 마리아를 데리고 군터가 있는 본궁이 아닌 다른 길로 향했다. 이내 마리아는 노라의 손을 잡아끌며 급한 발길을 멈춰 세웠다.

“고약한 사내놈들,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다 똑같지.”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손짓하자, 노라가 짜증 난 어조로 말했다.

“대왕께서 너를 찾으러 이주청으로 가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먼저 선수 쳤다.”

‘에이든이 신경 쓰이나 보네.’

한데 노라가 왜 다른 길로 데려가는 거지? 곤란함에 처한 자신을 도와주려는 의도라면 당장 군터의 침실에 얌전히 데려다 놓고도 남을 텐데.

“아니, 너를 두고 낮에 그 창부 같은 마녀랑 입술을 비벼 대고 지랄을 하더니, 밤이 되니까 너를 찾느라 생난리를 치더라고.”

‘지랄……!’

마리아는 노라의 걸쭉한 말투에 크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에이든을 만나 감격에 겨워 울 때는 언제고, 민망할 정도로 금세 웃어 버린 것이다. 노라는 군터의 심보가 얄미웠던 모양이다.

“쉽게는 못 주지. 속이 시커멓게 타고 조바심이 나 봐야 해.”

노라는 자신이 궁의 비밀 공간을 알아 놨다고 으스대며 마리아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가는 중에도 내일 밤에 있을 제례 때까지 대왕한테 코빼기도 보여 주지 말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음, 좋은 생각 같아.’

솔직히 지금 심정으론 군터를 보고 싶지 않았다. 사만타 때문이 아니라, 오랜만에 저만의 시간이 필요하달까. 한데 노라도 저와 같은 마음인 듯싶었다. 노라는 본궁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탑 쪽으로 마리아를 데리고 갔다. 호기롭게 탑까지 간 건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계단이 좀 많지? 내가 요즘 살 좀 빼려고 찾아낸 곳인데, 막상 위에 올라갔더니 경치가 끝내주더라고.”

마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보아도 계단이 300개는 넘어 보였다. 이러다 탑 꼭대기에 오르기도 전에 심장이 멈춰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가자, 마리아.”

마리아는 노라를 마주 보며 굳은 의지를 다진 후, 눈앞에 펼쳐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호기롭게 잘 올라갔으나 서서히 숨이 차오르며 허파가 터질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주저앉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명백해서 다시 이를 악물고 올라갔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체구도 큰 노라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가는 것에 묘한 경쟁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고 300개가 넘는 계단을 다 올라가자, 경이로운 광경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

왕궁에서 가장 높은 석탑에 서자,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별을 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반대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왕궁 곳곳을 밝힌 불빛이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밤경치가 이토록 황홀할 줄이야.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다 별거 아닌데. 사람이나 집이나 심지어 왕궁마저 코딱지만 하잖아.”

정말이지, 혼자 명상하기에는 최적화된 곳이었다.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혼자 있고 싶을 때 종종 와야지 싶었다. 그때 노라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야.”

“?”

“마리아,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며?”

노라는 마리아를 찾으러 이주청까지 갔다가 에이든과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마리아는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라가 마리아의 어깨를 짚으며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마리아, 여기서는 소리쳐도 밑에까지 들리지 않아.”

그래서 자신은 노예로 팔려 간 제 자식들이 보고 싶을 때면 이곳에 올라와 크게 이름을 부른다고 했다.

“크게 불러 봐. 살아 계시니, 어디에서든 마리아의 목소리를 들으실 게야.”

마리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에이든한테 부모님의 소식을 들을 때도 감동했지만, 노라의 제안은 제 심장을 쥐어짜는 양, 아프면서도 설레게 했다.

“제대로 말 좀 못 하면 어때? 여기 마리아를 흉볼 사람은 없어. 그리고 부모님들은 마리아가 소리만 쳐도 알아들으셔.”

“!?”

“내 자식이니까. 옹알대기만 해도 부모는 다 알지.”

마리아는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겪은 가장 비극적인 일은 부모님의 죽음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폐황후가 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마리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뒤, 두 손을 모아 입에 댔다.

‘그래, 내가 부르면 꿈에서라도 들어 주실 거야.’

“아……이지!, 어……이니!”

마리아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눈앞을 가려도 바로 앞에 제 부모님이 계신다고 상상했다.

“기이……주어. 만이나……. 으!”

그러자 곁에 있던 노라도 울며 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아주 오랜만에 행복감이 차올랐다.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쳐도 다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들었다.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으로도 현재를 견디기에 충분했다. 마리아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부모님을 부르며 아이처럼 울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한참 울고 난 뒤 노라가 울먹이며 말을 꺼냈다.

“내 새끼들 몸값 거의 다 모았어. 반드시 되찾아 와야지.”

마리아는 우는 노라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녀 덕분에 묵혀 놨던 감정이 해소된 것 같아서, 고마움마저 느꼈다.

“마리아, 그분…… 좋아하지?”

격했던 감정이 서서히 잠잠해질 무렵 노라가 은근하게 물었다.

“!?”

뜬금없는 소리. 한데 자신은 노라의 예리한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 제 동공이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그저 아니라고 격렬하게 도리질만 했다.

“속으로 연신 좋아하지 않을 거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런 말을 자꾸 되뇌면 그건 이미 그 사람한테 감정을 줬다는 증거야.”

왠지 허를 찔린 듯했다. 이내 마리아는 군터와 사만타가 키스할 때 ‘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거 알아?’라고 무안을 주었다. 진짜 그랬던가. 하긴 헨리가 로랑과 바람났을 때보다 더 놀라긴 했다.

‘내 마음인데 왜 마음대로 안 되는 거지.’

참 이상한 일이다.

* * *

‘마리아, 속상해라. 아니, 질투해.’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사만타와 키스했다. 사만타의 입술을 짓누르고 있는데도 제 모든 신경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마리아에게로 쏠렸다. 한데 그녀는 에로와 노라를 보며 시시덕거릴 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순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실망감과 열패감에 화가 솟구쳤다.

그래도 조금은 자신을 좋아해 줄 거라 믿었는데. 그녀의 등에 제 것이라 쐐기까지 박았건만. 이 모든 일이 저 혼자만 날뛴 헛짓거리에 불과했나?

‘너 정말 바보 천치인 거냐? 대체 나는 너한테 뭐지?’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의 시선은 오롯이 한곳만 좇았다. 사방이 의미 없는 풍경이라면 선명한 건 오로지 마리아뿐이었다. 그리고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무심함을…….

“대왕께서 원하신다면 오늘 밤부터 기쁜 마음으로 모시겠습니다.”

사만타의 간드러진 유혹이 제 귀에 닿지도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마리아가 제 시야에서 사라진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고단할 텐데 쉬어라.”

군터는 그대로 돌아서 집무실로 향했다. 솔샤르가 알아서 마녀들을 접대할 테니, 자신은 정무에만 신경 쓰면 된다. 하지만 분해서 일을 못 하겠다.

‘내가 너무 놔줬지.’

마리아의 살을 발라서 뼈에 제 이름을 박아 넣었어야 했는데. 마음 같아선 그리해야 속이 좀 풀릴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자정이 넘어도 제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건, 엄연히 반항이었다.

‘엄벌로 다스려야지. 밤새도록 잠도 못 자게 괴롭힐 테다.’

제 육중한 몸에 짓눌린 채 엉엉 울게 만들어야지. 마리아가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지 않겠다고? 그런 개소리를 왜 지껄였는지 후회가 막심했다. 이젠 그녀의 의견 따위 상관없다. 마리아의 마음마저 온전히 제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허세는 집어치울 참이다. 진즉에 저만 보고 생각하고 따르도록 굴복시켰어야 했다.

“안 계십니다.”

이주청에 먼저 달려갔던 솔샤르가 소식을 가져왔다.

“없어?”

에이든인지 뭔지 하는 사촌 놈한테 달려갔을 거라고 확신했건만, 없다니. 여하튼 에이든은 오늘 밤 목숨을 구했다. 에이든에게 다녀와도 된다고 영혼 없는 허락을 하고선 이렇게 노여워하는 자신이 마치 미친 인간 같았다. 만일 둘이 함께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면 자신이 어떤 짓을 할지 스스로도 상상이 안 됐다.

“궁인들을 풀겠습니다.”

일이 아주 많이 커져 버렸다.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을 만큼 이성이 마비되고 본능만 남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너 때문일까? 아니면, 나 때문일까?’

이번만큼은 오로지 저 때문에 일이 커졌노라 인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정이 넘을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마리아의 잘못이니까. 반항이고 죽을죄였다.

‘어서 내 앞에 나타나는 게 좋을 거다,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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