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밤이 되자, 헬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제례의 막이 올랐다. 야드를 밝히는 휘황찬란한 불빛, 병사들부터 일개 궁인들까지 오늘 밤은 다들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었다. 그건 헬랜드의 번영이 계속되게 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중에서도 대왕 군터가 가장 화려했다. 그는 붉은 갑주를 입고 어깨에 털 망토를 걸쳤으며 당장이라도 전쟁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양쪽 허리춤에는 거대한 검을 찼다.
그가 행사장 상석에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그가 손을 들자, 밤하늘을 때리던 병사들의 함성이 일제히 멈췄다. 이젠 야드 한가운데에 설치된 커다란 단상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옮겨 갔다.
“제례를 시작하라.”
군터의 외침에 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각종 악기의 연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있을 행사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역력했다. 하지만 군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궁을 나가신 기록은 없으니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샤르가 나직한 어조로 귀띔을 하자, 군터는 실소를 터트렸다. 기어이 마리아는 어젯밤, 아니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면 내가 너무 오냐오냐한 거지.’
이곳은 마리아가 황후로 살던 라스토니아의 황궁이 아닌 것을. 제 말에 죽고 사는 헬랜드의 왕궁이며 마리아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는 처지임을 잊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겁을 상실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터.
그때였다. 마녀들이 단상에 오르자,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단상을 둘러싼 횃불 때문에, 반짝이는 의상을 입은 마녀들이 더욱 화려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매혹적인 자태를 뿜어내는 사만타가 제일 돋보였다. 단연코 그녀는 모든 이의 동경을 한 몸에 받았다.
“대왕, 제례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니 화를 누그러뜨리라는 말이었다.
“알았다.”
1년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이니 집중해야지. 곧 군터의 시선이 단상 위에서 춤을 추는 마녀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주문을 외우고 춤을 추면서 헬랜드의 번영과 평화를 기원했다. 특히 거의 속옷에 가까운 옷에 금빛 레이스 천만 걸친 사만타는 타락한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군터를 유혹하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의 손짓 하나, 눈길 한 번, 휘날리는 머리카락까지도 오롯이 군터를 위한 것이었다.
‘참 무던한 남자야.’
사만타는 군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대마녀로 그를 아주 오랫동안 봐 왔지만, 제게 구애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다른 남자들은 곁에 머물며 은밀한 연인이 되어 달라는 유혹을 수없이 던졌다. 열이면 열, 모두가 원할 정도건만……. 유일하게 군터만 제례를 일처럼 대했다.
‘오늘은 답을 얻어 볼까.’
여기저기 방랑하며 사는 것도 지겨운 마당에. 헬랜드처럼 돈이 넘쳐 나는 왕실에 정착하여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군터도 자신을 좋아하는 눈치니 조금만 유혹하면 넘어올 것도 같았다. 아니, 자신이 있었다. 이제껏 자신을 거부한 남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순간, 알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여 그 이유 때문인 건가.
[헬랜드의 대왕이 유일하게 갖지 못한 것이 있어.]
[그게 뭔데요? 죽을 때까지 다 써 보지도 못할 만한 재물이 있는데, 갖지 못할 게 무에 있다고?]
세상에 돈으로 이룰 수 없는 게 있긴 한가? 군터가 가진 금과 마석이면 대륙의 왕국 하나 정도는 거뜬히 사고도 남을 것을.
[여자.]
[여자?]
[나도 그 여자가 필요해서 왔어. 정확히는 군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말이야.]
[어떤 여잔데요?]
[사만타가 알면 위험해. 하지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겠지?]
잘 알지. 그러나 굳이 여자의 정체를 알 필요는 없었다. 어떤 여자든 저 자신보다 아래일 테니까. 이참에 군터의 눈앞에서 영원히 치워 버리면 될 터. 그의 옆자리에 영원히 눌러앉을 계획인데, 미미한 걸림돌 정도이니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알랑을 만나서 다행이야.’
어차피 그 여자는 알랑이 데리고 간다고 했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만타는 온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 군터의 시선이 저한테서 절대 이탈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놓을 작정이었다. 그녀가 무대를 누비자, 이곳저곳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사만타는 여자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남자들은 그녀를 보며 욕정을 느꼈다. 드디어 사만타의 춤이 절정에 이르자, 분위기는 한껏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오늘 밤엔 반드시 대왕이 내게 구애하도록 만들어야지.’
사만타는 단상에서 내려와 상석에 앉은 군터에게로 다가가 요염하게 춤을 췄다. 거기에 그가 제 유혹에 쉽게 넘어오도록 주술을 부렸다. 그녀는 금빛 레이스 천을 펄럭거리며 그의 시야를 제게 묶어 두려는 것이다. 드디어 사만타의 주술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는지 군터의 눈빛이 그윽하게 변하며 시야를 가린 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넘어왔네.’
육감적인 제 몸을 가린 천을 치워 버리고 만지려는 거겠지. 이내 군터는 사만타의 바람대로 천을 걷더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
사만타는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그의 시선을 좇았다. 그곳에는 잿빛 머리를 한 여자가 있었다. 순간, 사만타는 군터의 눈에서 분노와 안도, 희열이 뒤섞인 감정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젠장!’
군터의 뜨거운 시선이 멀리 있는 여자를 촘촘하게 옥죄며 미술품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절대 얌전하지 않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등을 완전히 드러냈다. 유려한 허리를 타고 흐르는 치맛자락과 마른 듯 낭창대는 몸매지만 가슴은 봉긋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건, 그녀의 등의 문신이었다.
‘어째서 저 여자가 대왕과 같은 문신을 한 거지.’
유일하게 소유하지 못한 여자가 있다더니, 저 여자인가 싶었다. 오래전 자신도 군터에게 붉은 용 문신을 새겨 달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거절한다는 말조차 못 들을 만큼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군터는 훤히 드러낸 마리아의 등을 보면서 입꼬리를 미세하게 떨었다. 그때였다. 군터와 마리아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가 이기는지 오기를 부리듯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만타는 슬슬 짜증이 올랐다. 알랑이 제게 말해 주지 않은 게 있기 때문이다.
‘보통 여자가 아니야.’
세상에 저 정도의 미인은 많으나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진중하고 고고함이 서려 있었다. 확실히 그냥 스치고 지날 여자는 아니었다. 사만타는 제게서 완전히 돌아선 군터의 관심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발악하듯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저와 그를 금빛 천으로 덮은 뒤, 군터에게 뜨겁게 키스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했다. 공간을 뒤흔들 듯한 환호 속에서 마녀들의 춤은 끝이 나고, 군터는 사만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침실로 가, 나머지 의식을 치를 터. 대마녀는 대왕에게 점괘를 말해 준 뒤 둘만의 뜨거운 밤을 보내겠지. 여봐란듯이 사만타를 이끌고 자신의 궁으로 향하려던 군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또 나를 외면해?’
마리아가 먼저 돌아선 것도 모자라 에로, 노라와 함께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 *
군터가 사만타와 궁으로 향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건 생각보다 마음이 괜찮지 않았다. 팽팽하게 쥐고 있던 끈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잡으려고 해도 잡을 줄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살면서 남자한테 이런 실망감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심 군터 그 사람만은 헨리와 다를 거라 여겼던 모양이다.
“우라질! 오늘 밤은 대왕의 침실에 불이 나겠구먼.”
노라가 열불을 토해 냈다.
“마리아, 이건 의식일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에로의 위로에 마리아는 아무렇지 않다며 웃어 보였다. 차라리 잘되었다며 마음을 다스렸다. 애초에 군터를 남자로 생각하려던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사적인 감정이 없어져 앞으로 일이 더 잘될 것만 같았다. 한데 가슴에 폭풍이 몰아치는 양, 울렁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얼른 잠잠해졌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이런 날은 한잔해야지.”
무엇이 필요한가 했더니, 노라가 정답을 말해 주었다.
“어머머! 오늘 술 마시려고요? 제례 때 술은 금지라고 하던데?”
에로가 솔샤르에게 들은 얘기를 읊자, 노라가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그럼 넌 빠져. 나랑 마리아만 마실 테니.”
“아잉! 그건 안 되지. 어제도 둘만 놀러 가고. 나만 쏙 빼놓는 거, 있기 없기? 없기예요, 알았죠?”
그렇다면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야 했다.
“내가 미리 준비해 놨지.”
노라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리아와 에로는 노라를 따라 왕궁의 반대쪽 성벽으로 향했다. 어느 왕궁이든 좋은 점이 있다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노라는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 사람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두 사람을 맨 뒤에서 쫓아가는 마리아의 마음은 돌덩이를 안은 양 무거웠다.
‘무슨 상관이야. 신경 쓰지 말자.’
그녀는 연신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한데 자꾸만 눈앞에 군터와 사만타가 연출하는 야한 광경이 그려졌다. 그때 마리아의 상념을 깨뜨리는 소음이 들렸다.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며 낯선 자들의 향기가 풍겼다. 마리아가 미행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자,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흐릿하게 하더니, 우악스러운 손이 마리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마리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노라와 에로의 외침이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의구심을 품는 순간, 지독한 연기가 마리아를 폭풍처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