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사만타가 속옷 차림으로 군터 앞에 섰다. 뇌쇄적인 눈빛으로 다가가 그의 무릎에 요염하게 앉았다. 사만타는 군터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곤 서서히 입을 맞췄다. 키스하는 중에도 제 엉덩이를 살살 움직여 그의 다리 사이를 자극했다. 아마도 그는 점괘를 듣기도 전에 흥분해 버리고 말겠지. 사만타는 거추장스럽게 차려입은 군터의 옷을 벗기려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때 군터가 입술을 떼며 그녀의 손을 저지했다.
“왜요?”
“점괘 먼저 들어 보지.”
“아하, 제가 중요한 일을 잊었네요. 대왕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욕심이 앞서는 바람에 그만.”
사만타는 교태를 부리듯 웃으며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군터는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분명 사만타는 섹스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는 여자였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저마저 점괘를 듣기 전에 그녀의 몸을 취했을 정도니까.
한데 오늘은 왜 이렇게도 정신이 산만한지, 머릿속은 온통 자신을 외면하던 마리아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바로 앞에 매혹적인 여자가 있음에도 마리아를 떠올릴 때 온몸의 피가 뜨거워졌다. 제 앞에 있는 여자가 사만타가 아니라 마리아였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였다. 아주 간절하게.
“헬랜드는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크게 번성할 겁니다. 특히 나라에 필요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 테니, 대왕께서 살뜰하게 살펴 주셔야 합니다.”
“그런가?”
순간, 에이든이 떠올랐다. 마리아와 상관없이 그는 분명 훌륭한 인재임은 맞으니까. 예전에는 주로 세금을 내지 못해 도망친 소작농이나 범죄자가 대부분이었다. 그에 비하면 올해 이주민의 질은 매우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 액운도 있습니다.”
“액운?”
10년간 좋은 점괘만 받았는데 어째서 이번에는 행운과 액운이 함께 주어진 건지 궁금했다. 사만타는 곧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군터를 보았다.
“헬랜드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여자가 있군요.”
“!?”
“잿빛 머리에 청승맞은 여자가 보여요.”
사만타가 점괘에서 마리아를 본 듯했다. 그런데 마리아가 헬랜드의 액운이란 소린가. 아직 그녀 때문에 피해 본 건 없는데…….
“그 여자는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어요.”
사만타는 점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마음에 다른 남자를 품고선 대왕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
군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톤의 말로는 마리아의 마음에는 복수뿐이라고 했다. 그녀가 잠시나마 전남편 헨리를 그리워하는 줄 오해한 적도 있으나, 그건 제 착각이었다. 한데 다른 남자가 있다니.
“대왕께서 그 여자에게 호의를 베풀려 하시지만, 소용없을 겁니다.”
사만타는 군터가 아무리 마리아를 원해도 절대 가질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기엔 마리아라는 여자의 야망이 너무 크다고 했다. 그 얘기가 나오자 군터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차라리 마리아의 속이 야망으로 들끓거나 세속적이었으면 이미 제 품에 안겼을 터.
“대왕처럼 신의 선택을 받은 훌륭한 남자가 아닌, 아주 비천하고 쓸모없는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어요.”
그래서 마리아가 군터에게 원하는 건 오로지 재물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군터의 귀에는 마리아가 재물을 원한다는 말보다 오로지 마음에 둔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어떤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지?”
“들으시면 아주 실망하실 거예요. 대왕이 그 여자에게 연민을 느낄 가치도 없을 정도지요.”
“말해 봐. 내가 판단하마.”
자신이 바보라서 10년간 점괘를 오롯이 믿은 건 아니었다. 마녀가 하는 말 중에는 허언도 있음을 왜 모를까. 한데 마리아에 관한 것에는 귀가 솔깃해지는 아둔한 인간이 바로 자신이었다.
사만타는 대답하기 전, 눈을 감곤 주문을 외웠다. 나름 점괘를 얻으려는 행위로 보였다.
“아주 배은망덕한 여자군요. 몸에 액운이 덕지덕지 붙었어요. 남자 보는 눈도 아주 형편없고요.”
사만타는 눈을 감은 채, 거친 언사를 쏟아 냈다. 어떻게든 군터에게 그 여자를 액운으로 각인시켜 포기하게 만들어야 할 터.
“남자 보는 눈이 형편없다?”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했다. 헨리 같은 남편으로 인해 마리아의 인생이 박살이 났으니까.
“그래서 어떤 남자인가?”
군터는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며 울컥 화기가 치밀었다.
“44번.”
“뭐?”
군터는 제 귀를 의심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번호, 아니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44번이라는 숫자가 보여요. 버러지만도 못한 노예군요. 매 맞기를 밥 먹듯이 하고, 몸에는 온통 채찍 자국이 있어요. 생김새도 정말이지 흉측해요. 사람을 죽이며 벌어먹고 사는 인간 말종, 하수구의 쥐새끼만도 못한 남자입니다.”
군터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니, 그는 잠시 숨을 멈춘 채 사만타의 말을 경청했다.
“그 여자도 이 남자와 똑같이 비천해요. 곁에 두면 불행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
지진이라도 난 양 머리가, 내장이, 뼈가, 영혼이 마구 흔들렸다. 듣고도 믿기지 않을뿐더러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점괘가 말해 주고 있어요.”
“아니, 그 여자가 마음에 둔 남자…… 말이다. 분명 44번이 맞느냔 말이야?”
“맞습니다.”
군터는 제 심장 소리가 이토록 큰지 처음 알았다. 아니, 심장이 살을 뚫고 나올 정도로 아프게 뛰었다. 이내 그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했다. 그러다 눈을 감고 연신 주문을 읊는 사만타를 보자 허탈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없애야죠.”
“없애? 마리아를?”
“그 여자가 마리아인가요? 어째서 성녀의 이름인 거지. 재수 없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소리 소문 없이 그 여자가 죽도록 주술을 걸어 놨으니까요.”
“뭐를 걸어 놔?”
“이제 그 여자는 죽을 겁니다.”
* * *
마리아는 한적한 숲에서 정신이 들었다.
“읍.”
자신을 납치한 남자는 총 세 명, 그들은 제 입에 재갈을 물렸고 두 손과 발목은 밧줄로 결박했다.
“황후님을 이렇게 알현할 줄이야.”
얼굴을 가렸으나 발음이 귀에 익었다.
‘랑데스 사람이야.’
마리아는 애써 반항하지 않았다. 발버둥 치며 소리친들 그들은 자신을 절대 풀어 주지 않을 테니까.
“귀하신 분을 짐승처럼 험히 다뤄 송구하게 됐습니다.”
나름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보니…….
‘나를 금방은 죽이지 않을 것 같아. 원하는 게 따로 있어.’
그런데 이 상황이 왜 이리도 익숙하지. 마리아는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것 같았다.
“우리 폐황후께서 숨겨 놓은 재산이 있다기에 왔습니다.”
‘숨겨 놓은 재산? 할아버지가 내게 준 땅을 말하는 건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제 부모님과 낸시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신을 해코지하라고 사주한 사람이 낸시일 터. 하지만 남자는 랑데스 말을 쓰고 있다.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포기 각서에 서명만 해 주시면 곱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귀하신 분이신데 가시는 길까지 힘들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마리아는 이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낸시가 재산이 탐나서 사람을 시켰다?
‘로랑이 죽인 것처럼 꾸미려고 낸시가 일부러 랑데스 사람에게 일을 사주한 건가.’
“죄송하지만, 좀 더 얌전히 있어 줘야겠습니다.”
알랑은 제 입과 코를 단단히 막곤 다시 마리아를 향해 작은 주머니를 던졌다. 탁- 주머니가 터지며 전에 맡았던 연기가 그녀를 뿌옇게 감쌌다.
“욱!”
우선 자신을 납치한 저 랑데스 사람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그때였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구토가 밀려오더니 머리에 강한 통증이 일었다. 연기에 독을 쓴 것인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눈앞이 흔들리며 이상한 주문 소리가 뇌리에 맴돌았다. 눈앞에 섬광이 번쩍이며 몸이 두 동강 나는 양 아팠다. 아니, 자신이 흡입한 연기가 내장을 태우고 뼈를 녹여 버릴 듯했다.
“으……. 으.”
누군가가 머릿속을 날카로운 칼로 마구 헤집는 것만 같았다. 이명이 울리며 눈앞이 어질어질하더니, 먼 곳에서 메아리처럼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열다섯 살의 따뜻한 봄날이었다. 화통을 든 제 모습이 보이고 야드에 붉은 짐승 같은 남자 있었다.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크르릉……!]
이러한 생명체를 태어나 처음 보았다. 야드에 쓰러져 꿈틀대는 붉은 짐승, 아니 사내는 진창에 빠진 양 더럽고 상처투성이였다. 게다가 입에는 재갈이 물린 채였다.
[사람의 입에 재갈이라니! 당장 데려가 깨끗이 씻긴 뒤, 치료해 주도록 해.]
[아가씨,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나 포악한데요.]
[내 눈에는 분명 사람으로 보이는데? 어서 재갈을 풀어 줘.]
사내를 겁내며 감히 근처에도 못 가는 시종들을 향해 마리아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예, 아가씨.]
마리아는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년을 보고 안심했다. 그리고 아주 많이 놀란 터였다. 깨끗하게 씻은 소년은 야드에서 몸부림치던 짐승이 아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구릿빛 피부, 전형적인 전사의 몸을 가졌으나, 저와 같이 라스토니아 제국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때 소년이 몸을 뒤척이며 엎드린 채 등을 보였다.
[노예인가 봐요.]
낸시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소년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내 마리아는 소년의 등에 난 채찍 자국에 소름이 끼쳤다.
[오, 신이시여! 어떻게, 사람의 몸에.]
오랫동안 여러 번 채찍질을 당했는지, 길게 베인 상처가 등 전체를 덮는 상흔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순간, 마리아의 눈에 그의 등 가운데에 찍힌 낙인이 보였다.
[44?]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검지로 그의 낙인을 매만졌다. 그 순간, 소년은 반사적으로 몸을 튕기며 일어섰다.
[크……르릉!]
[괜……찮아요. 당신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위험하게 하지 않아요.]
마리아를 노려보는 소년의 얼굴이 정확히 보였다. 한데 보석 같은 청록빛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허……읍!”
마리아가 거칠게 숨을 내뱉으려다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다시 들이마셨다. 잠시 잊었던 기억의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소용돌이치듯이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붉은 짐승 같은 남자, 그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나 기억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