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절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꽤 서늘했다. 그곳에도 한때는 사람이 살았는지 쓰러지기 직전의 오두막이 있었다. 아니면 마물 사냥꾼들의 쉼터였든지. 게다가 안에는 낡은 탁자와 의자, 여러 가지의 살림 도구도 있었다.
“이제 좀 몸에 피가 돌 겁니다.”
알랑은 다정하게 말하며 마리아를 결박했던 밧줄을 풀어 주었다. 차라리 험상궂은 무뢰한이었다면 이질감은 없을 텐데. 교양 있는 말투로 하는 짓은 잔혹한 청부업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차피 마지막인데 제가 누군지는 아셔야 하니…….”
알랑은 쓰고 있던 얼굴 가리개와 로브를 벗어 던졌다.
‘로랑의 오라비구나.’
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순간 마리아의 심장에 화기가 뻗쳤다. 알랑과 저 용병들이 제 가문 사람들을 마구 도륙했을 터. 결국 헨리와 로랑이 힘을 합해 자신을 폐위시키고 스튜어트 가문을 박살 낸 것이다. 마음 같아선 제 손으로 저들을 당장 요절내고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무력하게 잡혀 와 죽을 신세가 되었고 그 분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죽어서도 잊지 못할 듯했다.
“서로 간에 바쁜 사람들이니,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우리가 다정하게 각자의 안부를 물어볼 사이도 아니고.”
마리아는 알랑을 세심하게 살폈다. 키나 체구는 그리 크지 않으나 얼굴은 미소년처럼 고왔다. 껍데기는 그럴싸했으나 혼탁한 눈빛에 음흉함이 가득했다. 저 선한 얼굴로 여러 사람을 꼬드겼겠지. 교활하고 비열한 속내는 꼭꼭 숨긴 채. 이내 마리아는 망을 보는 두 명의 용병을 예리하게 살폈다.
‘저들의 검술이 귀신같다지.’
그들도 체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빨라서 매사 기민하게 움직인다 들었다. 사람의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칼솜씨가 출중해서 목이 떨어지고 나서야 당했음을 알 정도라고 했다. 고로 답은 정해졌다.
‘결국 나는 이들의 손에 죽게 될 거야.’
“우리 폐황후께 숨겨 놓은 재산이 있으시다죠?”
마리아가 말을 하지 않자, 알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늦게나마 깨달은 바가 있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이런, 충격으로 말을 못 하신다고 했는데. 사실 말을 하고 못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랑은 탁자의 먼지를 툭툭 털더니 마리아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나무 의자에 마리아를 앉혔다. 그는 마리아 앞에 미리 준비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딱 봐도 최고급 종이였다. 테두리에 금박이 찍혀 있어서 누가 봐도 문서가 주는 무게감을 느낄 정도였다.
“쓰십시오. 폐황후께서 가진 재산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으며…….”
알랑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마리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랑데스의 알랑 세라두에게 상속한다고 말입니다.”
‘미친 새끼.’
헨리만큼이나 뻔뻔한 인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갈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제게 숨겨 놓은 재산이 있다는 사실은 제 부모님과 낸시가 알지만, 아주 중요한 단서가 한 가지 붙었다는 건 오로지 저 자신과 교황 리베리오만 알고 있었다.
* * *
군터는 병사들을 이끌고 붉은 빛을 쫓아갔다. 빛은 마치 허공에 움직이는 별과 같았다. 스톤의 말로는 마리아의 체온 변화에 따라 마석이 뿜어내는 빛의 밝기가 달라질 거라 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는 밝았다가 최악일 때는 거의 소멸 수준까지 흐릿해질 때가 있었다. 그리되면 군터의 심장도 같이 쪼그라들었다. 대체 알랑 세라두가 무슨 이유로 마리아를 죽이러 왔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황후의 자리도 넘겨주었고 스튜어트가는 멸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마리아를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남았던가.
‘이유 따위가 뭐가 중요해.’
군터는 허튼 생각에 사로잡힌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들의 복잡한 이유는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현재로서는 그들로부터 마리아를 구해 내는 것이 급박할 뿐이지.
“대왕, 절벽 쪽입니다.”
솔샤르가 빛의 방향을 말해 주었다.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릴 건가.’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했다. 저 절벽은 떨어지면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깊고 험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절벽 아래에는 흉흉한 마물들이 득실득실하여 진짜 지옥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군터는 더 빠르게 말을 달렸다. 마리아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면 그때는 다 끝이니까. 마침 군터의 귓가에 스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덜벽 위, 톰남우 지부로 가!’
‘스톤!’
스톤은 지난 10년간 겨울잠을 자던 도중에 깨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마리아가 위험하다는 것을 스톤이 먼저 인식한 것일 터.
“절벽 위로 가자!”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솔샤르가 재빨리 선두에 섰다. 군터의 군대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절벽 위로 질주했다. 한편 마리아는 정성을 다해 글을 썼다. 아니, 알랑이 준 종이를 빽빽하게 다 채울 생각이다.
‘반드시 나를 구하러 올 거야.’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알랑이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귀족이니 잘 알겠지. 하나의 문서가 법적 효력을 내려면 내용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무엇보다 협박 때문에 억지로 쓴 표가 나면 안 됐다.
“오, 신이시여. 우리 폐황후의 숨겨진 재산이 남대륙의 섬이군요?”
알랑은 마리아의 글을 흘깃 보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륙에서도 강대국 황실과 대상단주나 가질 수 있다는 남대륙의 섬이라. 그곳에 각 별장을 지으면 벌어들이는 돈만 해도 엄청날 터.
알랑의 가슴이 흥분으로 넘실대는 순간, 그의 터질 듯한 기쁨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콰쾅- 폭음과 함께 오두막집이 사과가 세 조각 나듯이 부서졌다.
‘대왕!’
마리아는 군터와 병사들을 보곤 반색했다. 하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마리아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알랑에게 잡힌 상태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별수 없이 그녀는 실력이 출중하다고 소문만 무성한 두 세력의 싸움을 지켜보아야 했다. 흉포한 무기를 휘두르는 군터의 병사들은 보기만 해도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시무시했으나 랑데스의 용병들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그들을 공격했다. 수적으론 헬랜드의 병사가 우세해도 속도가 빠른 용병들에겐 열세였다. 마침 마리아는 군터가 제게로 달려오는 모습을 발견하곤 있는 힘을 다해 알랑을 밀어젖혔다.
“어딜!”
물론 알랑이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 꽉 움켜잡는 바람에 둘은 몸싸움을 벌였고, 그사이 군터는 점점 가까워졌다.
* * *
헨리는 두 여자로 인해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모니카와 로랑이 며칠 전부터 곧 열릴 연회 문제로 그를 힘들게 했다.
“황제, 그 드레스는 장인이 딱 두 벌만 만드는 귀한 물건이란 말이야. 내 생일 연회인데 그 정도도 못 해 주는 거야?”
“엄마, 드레스 하나에 300만 골드라니요? 너무 비쌉니다.”
“폐하, 그럼 저는 150만 골드만 쓰면 되죠.”
로랑이 한술 더 떴다. 두 여자가 제시한 드레스값은 라스토니아 병사들의 1년 치 배식 비용보다 많았다.
“국고가 텅텅 비었습니다. 연회도 취소해야 할 판이라고요.”
“뭐? 내 생일 연회를 취소한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딨어? 세금을 더 거둬들이면 되잖아.”
“엄마! 세금을 걷는 것도 정도가 있어요.”
현재 라스토니아는 황제의 폭정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제국민들이 이탈하여 다른 나라로 이주하거나 심지어 헬랜드로 가는 일도 있었다.
헨리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낸시가 다소곳이 걸어와 헨리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폐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제게 국고를 채울 방법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헨리는 모니카와 로랑을 다급히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물론 로랑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긴 했다.
“어떻게?”
헨리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정말이지, 이렇게 가다간 폭동이라도 일어날까 매일 불안했다.
“폐황후를 비싼 값에 팔면 돼요.”
“마리아를? 군터 플레이슬리 그자한테 말인가?”
“물론 그 사람도 포함이긴 해요.”
낸시는 대륙 여러 나라의 귀족과 황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대상단에서도 마리아를 원한다고 했다. 아직 이혼 절차가 마무리된 건 아니라서, 그녀의 보호자는 엄연히 헨리였다.
“아, 이제야 알겠다. 마리아의 재산은 이혼 전에 위자료로 받아 내야지. 누구보다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니, 복권해 준다고 하면 주저 없이 내놓을 거야.”
아니면 마리아의 남대륙 섬을 담보로 벨루이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내도 좋고. 아무리 마리아의 재산이라 해도 대륙법에는 보호자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헨리는 오랫동안 속을 썩이던 난제를 해결한 양 기뻐했다. 따져 보니 군터에게 빚진 1000만 골드는 별거 아니었다. 마리아 한 명으로 많은 이익을 볼 수 있게 됐으니까.
* * *
군터와 알랑의 싸움이 치열했다. 정확히는 알랑이 군터의 힘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 아무리 몸이 빠르다고 해도 군터의 무기에 타격을 받으면 금세 일어나지 못했다.
“어째서 마리아를 죽이려 하는 거냐?”
군터가 알랑을 향해 소리쳤다.
“왜긴? 다 돈 때문이지.”
“돈?”
“헨리 그자가 선수 치지 못하게 내가 미리 온 것뿐이야.”
“쓰레기 같은 놈들!”
군터가 도끼를 내리치자 알랑의 귀를 스치고 땅으로 떨어졌다. 쿵- 지진이 난 양, 땅이 파였다. 툭- 알랑의 귀가 잘려 피가 뚝뚝 떨어지자, 그는 창백한 얼굴로 군터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군터를 향해 던졌다.
“아……. 대!”
마리아가 군터를 향해 소리쳤다. 그건 필시 제게 썼던 연기가 들어 있는 주머니일 터. 하지만 늦었는지 하얀 연기가 군터를 휘감았다.
“이리 와!”
알랑이 저항하는 마리아를 끌고 절벽으로 향했다. 어서 그녀를 던진 뒤, 도망쳐야지. 연기를 흡입했으니 군터는 정신을 잃을 테니까.
“아……아악!”
마리아는 알랑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 내기는 역부족. 기어이 절벽 끝까지 내몰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