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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39화 (39/120)

39화

‘쉽게는 못 죽어!’

마리아는 알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가 우악스럽게 끌고 가 절벽으로 떠밀어 댔고, 그녀는 알랑의 멱살을 붙잡은 채였다.

“어차피 죽을 텐데, 힘 빼지 말라고.”

그는 비열하게 웃으며 마리아를 밀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 앞에 다다른 사람이 얼마나 절박한지, 어떤 괴력을 낼 수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죽을 거면 같이 죽어!’

마리아는 필사적으로 알랑에게 매달렸다. 고맙게도 그가 장식이 치렁치렁한 옷을 입어 준 덕에 붙잡고 늘어질 데가 많았다.

“아! 시발 ×같이 끈질기네!”

한껏 여유를 부리며 교양을 떨던 귀족도 다급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힘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체력적으로 그를 당해 내긴 역부족. 마리아는 그 와중에도 군터가 걱정됐다. 연기를 많이 흡입하면 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으……. 앗!”

알랑이 제 몸에서 혹을 떼어 내는 양 있는 힘을 다해 마리아를 밀어젖힌 찰나, 연기가 걷히며 군터의 도끼가 날아왔다. 퍽- 알랑의 머리가 떨어지는 반동에 그를 잡고 있던 마리아의 몸이 절벽으로 떨어졌다.

“마리아!”

그는 마리아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광경을 보는데도 현실감이 없었다. 무슨 판단을 하기도 전에 군터도 마리아를 따라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대왕!”

솔샤르는 용병을 다 해치우곤 절벽으로 뛰어왔다. 하지만 마리아가 떨어진 뒤 곧이어 군터가 절벽으로 몸을 던지는 광경을 보았다.

마리아는 절벽에서 떨어지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을 줄 알았다. 한데 세상을 움직이는 시계가 고장 난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따라서 몸을 날린 군터의 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가슴이 아팠다.

‘그러지 말지. 난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는데, 왜 당신까지……?’

무모한 사람. 아니 무식한 인간 같으니. 멍청하고 허세만 잔뜩 들어서 자신이 영웅인 줄 착각하는 인간. 마리아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군터의 손이 마리아의 목에 달린 레이스 옷깃을 잡았다.

“헉!”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며 몸의 하중이 밑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가 허공에서 제 옷깃을 잡았지, 라는 의구심이 생기는 순간, 저기 절벽 위에서 밧줄을 던지곤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솔샤르가 보였다. 일전에 군터가 죽으려 했던 자신을 밧줄을 던져 살려 낸 상황과 똑같았다. 마리아의 가슴에 안도감이 폭풍처럼 밀어닥치며 눈물이 쏟아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네 영혼까지 꽉 잡고 있으니. 나 너 절대 안 놓쳐.”

마리아는 울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가 신도 아니면서 어떻게 영혼까지 붙잡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의 절박함을 모르지 않았다. 순간 오래전에 열일곱의 소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를 갖고 싶다.]

[내가 좋아요?]

[좋다는 게 뭔지 모른다. 그냥 네가 갖고 싶다.]

얼굴이 빨개져서 툴툴거리던 소년은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다. 한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를 원망하고 경계했으며 이용하려고 했다. 어째서 사람은 궁지에 몰리고 나서야 깨닫는 것일까.

‘나 이제 당신을 기억해요.’

그때 지직! 군터가 잡은 레이스 옷깃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

군터는 그녀를 제대로 움켜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위에서 받쳐 주는 힘이 여의치 않은지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지지직- 레이스는 더 거의 다 찢어져 떨어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걱정하지 마. 나 너 안 놔.”

마리아는 울면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왠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마리아는 어렵게 입을 뗐다. 한데 군터가 잡고 있던 레이스 옷깃이 다 찢어지며 두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갈렸다.

“!”

소스라치게 놀라는 군터와 달리, 마리아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된 듯 덤덤해 보였다.

‘나를 놔요. 당신은 살아야 해요.’

“마리아!”

자신을 부르는 군터에게 마리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군터 플……레이슬리!”

“!”

마리아가 아득히 멀어지기 전, 그녀의 얼굴이 말해 주었다. 드디어 모든 기억이 떠올랐노라고. 죽음을 앞둔 여자가 왜 그리도 예쁘게 웃던지.

“아…… 안 돼! 마리아!”

군터는 절규하며 손을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그녀를 쫓아가려 발버둥을 쳤지만, 밧줄은 점점 위로 당겨졌다.

“놔! 이 새끼들아!”

그는 아이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마리아를 불렀다. 제발, 그녀가 다시 제게 닿기를 원하며 오열했다.

* * *

로랑은 시녀의 말을 듣곤 코웃음을 쳤다. 낸시와 헨리의 망상에 찬물이라도 끼얹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주인 흉내 내는 꼴이 웃기지도 않아. 멍청한 년.’

낸시는 자신이 마리아라도 된 양, 그녀가 황후 시절에 입었던 드레스와 화장, 장신구, 심지어 말투까지 똑같이 흉내 냈다. 그렇게 한다고 천한 근본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게다가 곧 제 오라비 알랑이 폐황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올 터. 폐황후를 팔긴 뭘 팔아. 그 여자가 얼마나 의뭉한데, 사실 알랑이 마리아의 재산을 자신이 가져도 되냐고 물었을 적, 그러라고 했지만, 분명 불가능할 거라 예상했다. 그렇게 은밀한 재산에는 반드시 자물쇠가 잠겨 있을 터. 어떤 조항이든 헨리에겐 불리하고 마리아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놨을 것이다. 아무렴, 교황 리베리오가 그 계산도 못 하고 재산을 줬으려고.

‘미련한 것들. 그래도 폐황후가 죽었으니, 1000만 골드는 갚지 않아도 되겠지.’

군터는 마리아를 누가 죽였는지 절대 모를 테니까. 그러니 볼모를 간수 못 한 그의 책임이었다.

‘낸시, 헨리가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니? 그 사람은 뼛속까지 황족이야. 나는 되지만 너는 절대 안 돼.’

[로랑, 짐을 믿어라. 낸시가 마리아가 숨겨 놓은 재산이 있다고 해서 잘해 주려는 것뿐이야. 그런 천한 것을 내 곁에 두지 않아. 짐에겐 로랑, 너뿐이다.]

‘그럼요. 저는 폐하를 믿어요. 물론 머리는 안 믿지만요.’

낸시가 용을 쓰는 게 짠해서 모르는 척 봐주려고 했는데, 낸시도 마리아처럼 헨리의 손에 내쳐져 봐야 정신을 차릴 터였다. 때마침 헨리가 로랑의 침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랑.”

“낸시랑 했어요?”

“그럴 리가.”

헨리의 말에 로랑은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실크 가운을 벗었다. 곧 굴곡진 나신이 그의 눈앞을 어지럽게 했다. 로랑은 침대로 올라가 그를 유혹하듯 몸을 꼬더니 곧 야릇한 신음을 내면서 엎드린 채 그에게로 기어갔다.

“폐하, 그 바지 속에 숨어 있죠?”

그녀의 손가락이 헨리의 불뚝한 바지춤을 가리켰다.

“응?”

“무시무시한 짐승이요.”

로랑의 교태에 헨리는 바지를 벗으며 음흉하게 웃었다.

“짐승 맛 좀 보여 줘?”

역시 로랑은 말로도 남자를 흥분시키는 여자였다.

* * *

왕궁 로비가 부산스러웠다. 솔샤르가 정신을 잃은 군터를 업고 나타나자 궁인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그중에서도 노라와 에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노라, 마리아가 안 보여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에로는 노라를 보며 울먹였다. 분명히 납치된 마리아를 구하러 갔는데, 군터마저 업혀 오다니. 아무래도 일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솔샤르의 표정도 매우 침울해 보였다. 예상보다 싸움이 치열했는지 병사들이 반 이상 줄어서 돌아왔다.

“몰라, 몰라, 어떡해.”

기어이 에로가 눈물을 터뜨리자, 노라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군터는 정신이 혼미한 채로 꿈속에서 헤맸다.

‘책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아주 많아요. 그리고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져요.’

마리아가 군터의 곁에 앉아 책장을 넘겨 주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흘러내린 잔머리에서 향긋한 꽃내음이 풍겼다. 어째서 사람한테서 꽃향기가 나는 것일까. 역한 땀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나야 정상인데……. 여러모로 마리아는 제게 신세계였다.

‘나랑 살자.’

‘군터, 나는 당신과 살 수 없어요.’

‘너는 나를 네 것이라 등에 표시도 했다.’

그러면 책임을 져야지. 마리아가 제 등에 그린 그림은 단순히 살갗에만 새겨진 게 아니라 심장, 아니 영혼에도 박힌 것을.

‘나는 곧 라스토니아의 황후가 되어야 해요.’

‘황후?’

마리아를 가지려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불같은 야망이 가슴에 피어올랐다. 그래도 당장 그녀를 다른 이에게 빼앗겨야 한다는 현실에 화가 나서 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깨물었다.

‘아파! 무슨 짓이에요. 군터?’

마리아는 잇자국으로 벌게진 손목을 보며 인상을 썼다. 한데 왜 저 소녀는 짜증 내는 얼굴마저도 성스러워 보이는 건지.

‘약속이다.’

‘약속?’

‘반드시 너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약속.’

‘군터,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도 존재해요. 나는 황제 폐하와 국혼하여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 거예요.’

‘아이는 몇을 낳아도 상관없다. 마리아만 있으면 된다.’

일부러 말귀도 못 알아먹는 모자란 등신처럼 굴었다. 현실적인 신분 차이와 이어질 수 없는 관계가 존재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바로 저 자신이었다. 노예 출신의 용병, 더 내려갈 바닥도 없지만 두려워할 하늘도 없는 무지한 존재였다.

하지만 마리아를 이대로 체념하기에는 제 인생이 끝날 것만 같은 고통이 찾아들어 심장이 아팠다. 해서 교황 리베리오를 찾아가 다짜고짜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추종하는 교황이 성지 순례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평생 만날 수도 없을 테지만, 운명은 자신을 그와 강한 인연으로 묶어 놓았다. 이교도들의 공격을 받은 그를 무작정 구했던 게 인연이 되어 여기까지 왔다.

‘영감, 마리아가 좋다.’

‘허허허, 누구나 마리아를 좋아하지.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의뭉하게 웃는 리베리오의 말에 허파에 연기가 찬 듯 답답했다. 혹여 그에게 제 이야기를 하면 답을 알려 줄까 해서 물었는데. 교황이면 무엇이든 다 아는 존재가 아닌가.

‘군터라고 했던가?’

‘마리아가 지어 준 이름이다.’

‘마리아를 좋아하느냐?’

‘좋아한다는 게 뭔지 모르는데.’

‘눈만 뜨면 생각나고 그 사람만 떠올리면 심장이 뛰지. 비실비실 웃음도 나고 말이다.’

‘어……. 맞는데.’

제 말에 리베리오가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났다. 사실 좋아한다는 감정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런 감정조차 가질 여유 없이 살아왔기에. 제겐 그런 걸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었다. 욕심이 나니, 무조건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북쪽 헬랜드로 가거라. 그곳에 가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 봐.’

마리아를 얻기 위해 다 해냈다고 믿었는데, 손에 넣자마자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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