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40화 (40/120)

40화

‘군터 플……레이슬리.’

마리아는 정확하게 제 이름을 말하곤 시커먼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그녀의 눈빛은 자신이 10년 전에 보았던 소녀가 틀림없었다. 이 잔혹한 광경이 자신을 농락하듯 느리게 보였다. 마리아를 향한 자신의 절규, 모든 의지를 내려놓은 양, 편안했던 그녀의 표정까지. 여전히 자신은 허공을 부유하는 듯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마리아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잡힐 듯하다가도 손끝에 닿으면 끝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안 돼! 마리아!”

군터는 그녀를 부르며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그녀를 잡으려는 듯 팔을 뻗은 채였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대왕!”

솔샤르가 반색했다. 하지만 군터는 눈과 귀가 먼 사람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여전히 절벽에 영혼이 묶여 있는 사람 같았다.

“어디를 가십니까?”

솔샤르가 다급히 그를 뒤쫓아가며 물어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발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미 눈치를 챈 터였다.

“안 됩니다. 겨울잠에 든 스톤을 도중에 깨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정령의 시간은 신성하여 함부로 방해했다간 큰 해를 입을 수도 있다. 더욱이 스톤은 헬랜드를 지키는 정령이기에 자칫 나라의 존립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솔샤르는 앞서 나아가 군터의 앞을 막았다.

“교황님께 부탁드리죠.”

“늦어. 교황청에 가는 사이에 마리아는 죽어.”

“그럼, 시신이라도 찾아야……. 윽!”

군터는 우악스럽게 솔샤르의 멱살을 잡았다.

“죽여 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물어라. 마리아는 죽지 않았으니.”

이성을 잃은 군터는 솔샤르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흔들곤 그를 내팽개쳤다. 한데 군터의 어조는 예상했던 것보다 침착했다. 정확히는 정신을 절벽 밑으로 던지고 온 사람 같달까. 마리아가 살아 있을 거라 믿고 싶은 바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마리아의 몸뚱어리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천운으로 살았다고 해도 절벽 밑에는 온갖 흉측한 마물이 득실대고 있었다.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곳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군터였다.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한들, 그의 발길을 멈춰 세울 순 없었다. 그는 스톤이 잠든 방문 앞 도착하자 서슴없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쿠쿵- 엄청난 진동과 섬광이 일며 군터의 몸이 허공으로 나가떨어졌다.

“으……. 윽!”

“대왕!”

문에서 무려 20보는 떨어진 지점에 떨어진 군터는 귀가 심하게 윙윙거렸다. 이내 스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시 저한테만 들리는 소리일 터.

‘어째서 인간은 정도를 모르는 거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종족 같으니.’

스톤이 맞지만, 자신이 알던 그가 아니었다. 금기를 어긴 것에 대한 정령의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더는 의존하지 마라. 스스로 답을 찾아.’

“큭!”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군터의 잇새에서 거친 신음이 흘렀다.

“나는 마리아를 찾아야 한다.”

그도 스톤의 말에 응답했다. 무작정 의존하려는 게 아니라,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혹시라도 위기에 처했다면 그 시간조차 줄이고 싶기에, 예전처럼 스톤의 힘을 조금 빌리려 했을 뿐이다. 기댈 존재는 스톤밖에 없으니까.

‘고작 그런 게 사랑이라니.’

“뭐?”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런 망할 새끼! 그 입을 찢어 주랴!”

군터는 자신을 비웃는 스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자 솔샤르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군터를 바라봤다. 대체 누구와 이야기하기에 혼잣말하는지. 혹여 마리아가 죽어서 군터가 정신이 나간 건 아닌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마리아의 죽음은 누가 정하는 거지?’

이제껏 군터를 비난하던 스톤의 어조가 사뭇 진지해졌다. 그리고 군터는 그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본디 인간의 죽음은 신이 정한다고 알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가져도 단명하기도 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벽에 금칠하며 질기게 사는 것일 터. 하지만 마리아는 예외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생사를 신에게 맡기는 것조차 싫기 때문이다.

“내가 정해.”

군터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저 자신도 솔샤르처럼 마리아가 죽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스톤에게 어깃장을 부린 것임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받아들이기 두려워서. 말로만 강한 사랑, 정작 겁에 질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타인의 힘을 빌리려고만 했다.

‘너의 믿음을 믿어 봐. 때론 인간의 믿음이 힘을 발휘할 때가 있으니까.’

“!?”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

“무엇을 다시 시작하라는 거지?”

‘…….’

스톤은 더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내라는 건가. 하지만 군터는 금세 답을 찾았다.

“솔샤르! 군대를 소집해!”

“예?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설마……?”

그때 작은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요란스레 울렸다.

“대왕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한 소년이 군터의 앞까지 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후! 넌 누구냐?”

“제이미……입니다.”

제이미는 군터가 자신을 까맣게 잊은 것이 당혹스러웠다. 헬랜드의 전사로 키우겠노라 궁으로 데려오고선. 왕궁 훈련장에서 병사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종자 노릇을 한 지도 꽤 되었건만.

그의 짜증 섞인 물음에 아이는 살짝 겁을 먹은 듯했다.

“제이미? 그게 누구지?”

“일전에 마리아 님이 숲에서 잡은 아이입니다.”

솔샤르의 설명에도 군터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린애가 낄 데가 아니다.”

“저도 마리아 님을 구하러 가고 싶어요.”

“이런……!”

군터는 버럭 화를 내려다가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에서 예전의 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너를 돌봐 줄 사람은 없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걸리적거리면 버리고 올 거다.”

“예. 대왕님.”

때마침 솔샤르가 자신의 의구심을 묻고자 곁으로 다가왔다.

“대왕, 절벽 밑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절벽이든 어디든, 지옥문이 있다면 부숴 버릴 거다.”

그래야 마리아를 찾을 테니까.

* * *

마리아는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자신의 말로는 이렇게 비참한 것을. 그래도 부모님이 살아 계시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을 살리려 몸을 던졌던 군터의 모습은 죽어도 잊지 못할 만큼 제 가슴을 뜨겁게 했다.

‘다 끝이야.’

잃어버렸던 기억이 돌아왔는데 그것이 곧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마리아는 죽음을 기다리며 두 눈을 꼭 감았다. 제 몸이 땅에 떨어지면 산산조각이 날 테니까. 그때였다. 진짜로 가슴이 뜨거웠다. 군터의 마지막 모습에 감동하여 온기가 돈 것이라 여겼는데, 실제로 제 살갗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석이 빛을 내잖아.’

그 붉은 빛은 점점 커져 마리아를 둥글게 감쌌다.

‘결계?’

그 순간부터는 바람의 저항도 받지 않은 채 허공을 유유히 떠다녔다. 험준한 숲을 지나고 강을 건너, 처음 보는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는?’

마리아는 황금빛 사막을 보았다. 절벽으로부터 꽤 먼 곳까지 유영해 온 듯했다. 스톤이 준 마석 덕분에 살았구나! 안도하는 찰나, 결계가 깨지며 마리아는 모랫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꺅!”

황금빛 사구가 크고 작은 언덕인 양 장관을 이루었다. 광활한 사막 어딘가에 떨어진 인간은 아주 미미해서 표시조차 나지 않았다. 다시 그녀의 의식으로 까마득한 암흑이 밀려왔다.

[44번!]

[네.]

마리아가 숫자를 부르자 붉은 머리의 소년이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돌아봤다.

[대답하면 어떡해요!]

그녀는 숫자에 반응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이름이 뭐라고요?]

그는 알까? 자신이 지어 준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지. 더불어 자신이 가장 동경하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했다.

[군터 플……레이슬리.]

[그분은 대륙의 전쟁 영웅이셨어요. 전설 같은 분이시죠. 그리고 용맹하고 정의로우신 분이에요.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존재기도 해요.]

[네가 가장 좋아하는 존재?]

그런 이름을 제게 붙여 줬단 말이지. 군터는 그제야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군터.’

어째서 그때의 기억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것일까. 이제껏 잊고 있었던 소소한 것까지 빠짐없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비참했을 때, 제 앞에 나타난 군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어둠침침한 방의 문이 열리며 거대한 인영이 비쳤다.

[마리아.]

당시에는 넋이 나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분명 군터의 목소리였다.

[말을 못 하십니다. 충격 때문에.]

[!]

낸시의 대답에 군터는 경직된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군터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고 곧 그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각처럼 매끈한 얼굴, 보석 같은 청록빛 눈동자, 진중한 입매까지. 그가 1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가자, 마리아.]

군터는 침대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마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왜 그를 몰라봤을까. 그 지옥 같은 라스토니아 황궁에서 자신을 구원하려고 온 사람이었건만.

[군터, 아니 대왕님! 어디로 가요?]

[헬랜드.]

군터는 마리아를 안곤 어둠침침한 그녀의 침실을 나왔다. 하얀 빛이 머릿속을 지우는 양 비쳤다. 돌무더기에 파묻혔던 것처럼 모래밭에 묻혀 그를 기다리고 있다니. 그때처럼 마리아는 손으로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버텨! 내 허락 없이는 너는 죽어선 안 돼!]

제게 소리치던 군터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군터를 다시 만나고 싶어.’

그에게 할 말이 아주 많은 것을. 다 기억났노라고. 당신을 오해해서 미안했노라고, 구해 줘서 고마웠노라고. 반드시 제 입으로 정확히 말하고 싶었다.

* * *

군터는 마석의 빛을 쫓았다. 마리아의 목에 마석 목걸이가 걸려 있는 한, 빛을 낼 거라고 믿었다. 허공에 붉은 점처럼 떠다녀서 알아보기 미세하나 제 육감이 먼저 답을 찾아 길을 인도했다.

“절벽은 아니다.”

“절벽 밑으로 떨어지셨는데 여기는 아니라고요?”

“그래.”

스톤이 했던 말처럼 이제부터 제 믿음을 따라갈 생각이다. 순간 그의 눈에 미약하나마 마리아의 붉은 빛이 보였다. 자꾸만 멀어지는 방향을 보니, 정반대 쪽이었다.

“사막으로 가자.”

군터는 사막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차라리 절벽이 나을 뻔했는데, 왜냐하면 헬랜드의 3분의 1이 사막이기 때문이다. 바다처럼 드넓은 사막에서 그녀를 찾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래를 다 파내서라도 찾아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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