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마리아는 필사적으로 모래를 팠다. 천만다행인 건 너무 깊은 곳에 빠지거나 늪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모래에 떨어진 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왜 죽어야 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은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으며, 되레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오히려 가혹한 건 신 혹은 운명이었다. 이제껏 자신이 행한 노력은 깡그리 무시한 채 그들은 제게 고난만 던져 주었다.
‘죽지 않을 거야. 반드시 살아서 다 돌려줄 거야.’
기어이 사람을 죽이려 헬랜드까지 쫓아오다니. 제게 재산이 있다는 건 분명히 낸시가 발설했을 테고, 그것 때문에 로랑이 폐황후를 죽이라 사주한 거겠지. 죄악의 정도도 모르는 인간들 같으니. 굳이 라스토니아 황실을 보지 않아도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낸시와 로랑이 헨리의 총애를 더 받기 위해 알력 다툼을 하고 있을 터.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희생양일 테지. 로랑이야 탐욕 덩어리이니 그렇다 쳐도 낸시의 배신은 곱씹을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제게 일말의 미안함이라도 있었다면 숨겨진 재산이 있다는 비밀만큼은 지켜 줬어야 했다.
‘똑같이 되돌려줘야지.’
낸시에겐 인간의 도리를 외면한 배신의 대가를, 로랑에겐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다. 그리고 무능한 헨리에겐 분에 넘치는 황좌를 빼앗은 뒤, 그를 제 발판으로 써야지. 아니다, 제 가문 사람들의 씨를 말린 것처럼 코부르크가를 철저하게 멸해 버려야 분이 풀릴 터.
마리아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모래를 팠다. 하지만 다리 한쪽을 꺼내면 나머지 다리가 깊숙이 빠져서 몸을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때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기도 하는지, 마리아는 기어이 깊은 모래에서 빠져나왔다. 그 고생 끝에 보이는 것이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이라니. 말문이 턱 막혔다.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모래밭뿐, 끝이 보이지 않았다.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이곳은 아마 지옥의 길목이 아닐까 싶었다. 마리아는 태양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대략 방향을 잡았다. 사실 이 지점에서 북쪽으로 가면 헬랜드에 도착할지 못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걷자. 그러다 보면 사막을 지나는 도적 떼라도 만나겠지.’
일단 사람이라는 존재라도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한데 걸을수록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심한 갈증에 입술이 갈라지고, 입 안의 수분은 사라져 살갗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내리쬐는 햇볕에 점점 익어 갔다.
‘내가 어쩌다 이곳까지 왔을까.’
자신이 사막 한가운데를 걷다가 기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젠 가슴에 들끓던 분노도 사막에 묻힌 지 오래, 살고자 하는 본능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연신 한 사람을 불렀다.
‘군터 플레이슬리.’
이대론 절대 죽을 수가 없었다. 반드시 그를 만나야지. 아니, 어쩌면 군터는 자신을 구해 주러 올지도 모른다.
‘할 말이 있단 말이야.’
당신이 기억났노라고, 10년 전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알게 되었다고 말해 주어야 했다. 또한 자신을 헬랜드로 데려와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군터가 아니었다면, 헨리의 손에 죽어 제 머리는 라스토니아 황궁 문 앞에 매달렸을 터.
‘군터.’
마리아는 잠시 서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자, 그녀는 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받아 갈라진 입술을 적셨다. 이젠 기쁨인지 슬픔인지도 혼란한 상황. 그녀는 무작정 앞을 향해 걸었다. 간혹 거대한 모래바람이 불어올 때면 커다란 사구 뒤에 몸을 숨겼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모래 폭풍이 지나갈 때 군터와 있었던 일이 눈앞에 하나씩 스쳐 지났다. 그리고 깊이 깨달았다.
‘다시…… 만나고 싶어.’
이상한 남자라고, 이성은 없고 과도한 집착과 욕심만 있으며, 무엇이든 제 뜻대로만 하는 독선적인 사람이라 여겼다. 또한 자신을 남에게 보여 주며 으스댈 수 있는 전리품 정도로 취급 한다 오해했다. 따져 보면 그는 제 목숨을 여러 번 살려 주었는데. 그즈음, 마리아의 감상이 깨져 버렸다.
모랫바닥에 제 그림자 말고도 여러 개가 비쳤기 때문이다. 마땅히 반가워야 하지만, 차가운 소름이 온몸에 돋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제 머리 위에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굶주린 매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다녔다. 한데 일반적인 매와는 조금 달랐다.
‘마물이야.’
인간 냄새를 맡고 온 것일까? 마리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마물이 존재한다고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멀리서 볼 때는 그저 굶주린 매인 줄 알았는데, 매와는 생김새가 완전히 달랐다. 작은 두상에 커다란 주먹만 한 눈알이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동공이 여러 개였다. 짤따란 날개에 비해 화살촉처럼 뾰족한 꼬리는 매우 길었다. 작은 날개보다는 기다란 꼬리로 평행을 유지하며 하늘을 나는 듯했다. 무엇보다 저 날카로운 주둥이가 사람의 살을 파먹을 것처럼 날카로워서 위협적이었다.
‘저건 무슨 마물인 거지?’
마리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머리 위를 나는 마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눈에 동공이 여러 개 있다는 건 필시 시력이 굉장히 좋다는 거겠지. 반면에 코가 없는 것을 보니 인간 냄새를 맡고 자신을 찾아낸 것이 아니었다.
‘몸을 숨겨야 해.’
마리아는 커다란 사구 쪽으로 뛰어가 무작정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마물이 먹잇감이 사라졌다고 판단하여 포기할 때까지 숨어 있어야지.
* * *
헨리는 마리아의 숨겨 놓은 재산을 차지할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내게 재산을 양도한다는 마리아의 동의가 필요해.’
반역 죄인이라는 불명예를 없애 준다면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결국 마리아가 죽어서도 안 되지만, 살아 있어도 곤란한 상황이다. 죽게 되면 군터 플레이슬리가 난리를 칠 것이고, 살아 있으면 호락호락하게 제 의견에 따라 주지 않을 테지. 사실 마리아가 죽는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한때는 제 아내였으니까.
‘원래 만만한 여자가 아니잖아.’
헨리는 짜증이 난 듯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얼마 전 낸시에게 들었다. 마리아의 재산이 무엇인지. 그녀의 재산을 양도받고, 낸시의 말대로 마리아를 원하는 남자한테 비싸게 팔아야지. 아니지, 전 부인을 판다는 건 너무 저속한 표현이다. 아이도 못 낳는 석녀이나 아직은 젊은 나이었다. 마리아가 남은 인생을 잘 살 수 있도록 전남편으로서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그놈의 뻣뻣한 성격 머리만 고쳤더라면 얼마나 좋아. 솔직히 황후로서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여자인 것을.
‘아니야, 황제를 제 막냇동생쯤으로 취급했던 여자야. 자기만 잘난 줄 알고.’
헨리는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대륙의 섬이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란 말이지.’
그나마 다행인 건 마리아와의 이혼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자신은 여전히 그녀의 보호자이자 남편이었다. 때마침 시종장이 종이 더미를 든 채 헨리를 찾아왔다. 그는 헨리의 책상에 종이 더미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 처리해 주셔야겠습니다.”
“초대장이잖아?”
“예, 선황후님의 생신 연회 초대장입니다. 제국의 귀족뿐만 아니라 친교국 황족과 귀족들에게 보낼 예정입니다.”
“이봐, 그런 일을 왜 짐이 해야 하지? 이런 건 엄연히 내궁에서…….”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 일개 정부의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내면 다들 무시당했노라 불쾌해할 것이다. 더구나 마리아와 친분이 돈독한 외국 황족들도 꽤 많았다. 그렇다고 생일 당사자인 모니카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 마땅히 황후의 업무였다.
“골치 아프군. 시종장이 짐의 대리인 자격으로 하도록 해.”
“제가요? 그렇다면 초대 글이라도 폐하께서 써 주시면…….”
“전에 마리아가 써 놓은 거 찾아서 대충 베껴서 보내면 되잖아.”
“아, 예, 그렇군요.”
하지만 시종장의 낯빛은 어두웠다. 마리아는 초대장 하나에도 상대의 안부를 아주 자세히 물으며 세심하게 내용을 쓰는지라 대충 베끼기가 어려웠다. 또한 사람마다 내용을 달리했기에 천편일률적으로 써서 보냈다간, 귀빈들이 흡족해하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자신은 심각한 악필이었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여자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황제, 이 엄마 생일날 말이다. 호수에서 뱃놀이하고 싶은데 말이야.”
“뱃놀이요?”
돈 드는 건 귀신같이 찾아서 하는 어머니. 눈물 나게 고마웠다.
“폐하, 아니 헨리……. 눈에 넣으면 아픈 우리 아들은 황자가 될까요? 언제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이라고 해야지.”
예전에는 로랑의 서툰 라스토니아 말이 귀엽다고 느꼈는데 이젠 살짝 짜증이 나려 했다. 무엇보다 로랑의 아들은 한동안 황족의 호적에 올려 줄 수가 없었다. 마리아와의 일이 아직 해결도 안 됐는데 무슨 황자 타령인지.
“폐하, 오늘 밤은 제게 와 주실 거죠? 유산하고 나서부터 매일 눈물만 나서…….”
낸시는 또 눈물 바람이었다. 헨리는 눈을 질끈 감고는 두 손으로 애먼 얼굴만 문질렀다.
‘황실이 개판이야.’
이 순간만큼은 마리아의 부재를 절실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