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낸시는 로랑의 사주를 받고 정보를 빼내는 시녀를 찾아냈다. 물론 그녀를 벌하거나 궁에서 내치지 않았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로랑의 정보를 캐 오라고 역으로 이용했다.
[로랑 양이 폐황후를 죽이려고 헬랜드로 사람을 보낸 것 같아요.]
[증거 있어?]
[로랑 양의 오라버니와 하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랑데스 출신이라서 귀족 말을 조금 알아듣거든요.]
‘뱀 같은 년.’
겉으론 백치인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음험한 짓은 다 하지. 이 사실을 헨리가 알아야 하건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로랑은 교활해서 헨리 앞에선 얼굴만 예쁜 바보처럼 행동하니까. 하지만 알랑 세라두가 마리아를 죽이긴 쉽지 않을 터.
‘군터, 그 사람이 그냥 두진 않을 거야.’
정확히 10년 만에 마리아를 찾으러 온 것을 보고 저 자신도 그의 집착에 혀를 내둘렀으니까. 그런 남자가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터. 만일 알랑이 실패한다면 세라두 백작 가문은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군터가 세라두 가문을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래야 로랑의 가슴에 못이라도 하나 박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로랑은 아주 크나큰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헨리가 마리아를 오롯이 미워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무려 10년을 부부로 지냈는데 미움만 있을까. 애정은 식었어도 알랑의 손에 비참하게 죽는 것까지 바라지 않는다. 차라리 제 손으로 죽였으면 죽였지. 또한 마리아는 여전히 쓸모가 많은 존재니까.
‘로랑만 없으면 황후가 될 수 있는데.’
선황후 모니카는 욕심만 채워 주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여자였다.
‘나도 마리아처럼, 아니 마리아보다 능력 있는 황후가 될 수 있어.’
낸시는 폐부 끝까지 욕심이 차올라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사랑하는 남자 헨리와 황후의 자리 둘 다 원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제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리아, 죽지 마세요. 너무 쉽게 죽으면 나한테 도움이 안 되잖아요. 마리아도 로랑보다는 차라리 내가 황후가 되는 게 좋지 않아요?’
자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마리아의 수족으로 살았으니, 이건 마땅한 대가였다.
* * *
군터는 사막에 도착했다. 한데 막상 사막에 도착하자, 마석의 빛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넓디넓은 사막에서 마리아를 찾아야 하는데, 발을 디디기도 전에 숨이 턱 막혔다. 사막이 뿜어내는 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대단하다 느낄지 몰라도 육감이 발달한 자신은 사막 자체가 얼마나 잔혹한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는 가장 높은 사구에 올라섰다. 그때 밑에서 제이미가 소리쳤다.
“대왕님, 여기저기에 오래된 사람의 뼈가 있어요.”
“사람의 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럼 하나만 찾으면 될 터였다. 군터는 사구에 올라 하늘이나 모래 어디든 마물이 보이길 바랐다. 그들은 이능이 있으니 근처에 있다면 곧 나타날 터. 또한 마리아가 있는 곳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때마침 저 멀리 하늘을 배회하는 새 무리가 보였다.
“매인가? 아니야.”
단순히 매라고 하기엔 덩치가 너무 컸다. 군터는 직감적으로 마물임을 알아차렸다.
“비페르라는 마물입니다.”
“비페르?”
혼잣말하는 군터의 물음에 제이미가 대답해 주었다. 한데 제이미가 어째서 마물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묻고 답할 여유가 없었다.
“시력이 굉장히 좋거든요. 놈 중에는 우주를 꿰뚫을 정도의 시력을 가진 놈이 있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런데 멍청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 공격하지 않아요. 죽었다고 판단하거든요. 비페르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만 잡아먹어요.”
제이미는 허리에 찬 가방에서 표창을 꺼내 양손에 꼭 쥐었다.
순간 군터는 마리아가 어느 구덩이에 잘 숨어 있기를 바랐다. 괜스레 놈들 앞에서 도망치려고 움직였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테니까. 그는 사구에서 빠르게 내려와 모든 병사에게 소리쳤다.
“북쪽 하늘을 봐라.”
그의 명령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북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터졌다. 뒤쪽에서 마물이 떼를 이뤄 나타난 것이다. 제이미는 재빨리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뛰며 소리쳤다.
“놈들의 꼬리를 공격하세요!”
“꼬리?”
솔샤르가 제이미를 향해 소리쳤다. 묻고 답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나, 병사들은 제이미의 말대로 비페르의 꼬리를 향해 화살을 쏘고 창을 휘둘렀다.
“날개로 날아다니는 게 아니에요. 꼬리로 움직이는 거라고요!”
제이미가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병사들의 귀에 닿기도 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군터도 일단 병사들을 공격하는 비페르를 처치하기 위해 달렸다. 그는 제이미의 말을 다 들은 터라, 긴 창에 달린 칼로 비페르의 꼬리를 공격했다.
“대왕님, 비페르의 눈은 다쳐선 안 돼요!”
제이미는 마물을 향해 표창을 날리며 소리쳤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무튼 눈알은 피해 주세요.”
군터는 제이미의 말대로 눈 공격은 최대한 자제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주둥이가 언제 제 머리를 쪼아 댈지 몰라, 방심할 틈이 없었다. 그때 더 많은 비페르가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놈들은 빠르게 날아와 병사들을 낚아채 가거나 머리를 쪼아 뇌를 꺼내 먹었다.
“으아아악!”
여기저기에서 병사들의 비명이 난무했다.
“빌어먹을! 앞뒤로 찢어져!”
그러다 제이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비페르는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걸로 간주하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두 모랫바닥에 누워!”
“예?”
“절대 움직이지 마라. 숨만 쉬어!”
병사들은 군터의 명령에 일제히 모랫바닥에 누웠다. 그러자 비페르의 공격이 뚝 멈췄다. 하지만 언제 놈들이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쏟아지는 사막의 햇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누워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몇 시간, 어쩌면 며칠을 이대로 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을성이 없는 놈들이니, 오래 있진 않을 거예요.”
제이미의 마지막 말에 희망을 걸어 볼 수밖에.
* * *
세 시간쯤 지났으려나, 비페르는 조금씩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더니 곧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방심하기에는 일렀다.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도 멀리서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고선 바로 날아와 공격할 테니까. 그때 저 멀리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마리아의 마석이 다시 빛을 내고 있어.’
군터는 흥분하여 입술을 떨었다. 그는 솔샤르에게 뒤에 있는 마물을 처치하라 명령했다.
“대왕, 어쩌시려고요?”
“나는 북쪽으로 간다.”
“혼자 움직이시는 건 위험합니다!”
군터는 솔샤르의 만류에도 홀로 북쪽으로 향했다. 괜스레 병사들을 이끌고 가 봐야 비페르의 눈에 띄기만 할 테니까. 차라리 혼자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그때 별안간 불어닥친 모래바람이 군터를 휘감으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길을 묶었다.
“후!”
오래전 리베리오에게 현생과 저세상을 잇는 중립 지역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망자가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기 전 꼭 거쳐야 하는 곳. 혹여 이 사막이 그곳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살면서 온갖 수난을 겪어 봤기에 딱히 무서운 게 없었다. 한데 이곳 어딘가에 마리아가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마리아, 내가 찾아낼 때까지 죽지 마라. 아니 죽어도 나한테서 못 벗어나.’
정말이지 한 발을 내딛기가 힘이 들었다. 가슴까지 감기는 모래에 그대로 휩쓸려 가 마리아를 보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죽을 것만 같았다. 군터는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괴성을 지르며 모래 속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순간 가슴에 간직해 놨던 마리아의 기억이 하나씩 떠올랐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냐?]
[왜 무서워요?]
[사람들은 날 보면 도망가니까.]
[이상하다, 군터 되게 잘생겼는데.]
사람의 말이 귓가에 닿기도 전에 사르르 녹을 수 있다는 것을 마리아 때문에 알았다. 같은 입을 가지고 있는데도 누구는 입만 열면 욕이 나오고, 또 누구는 그 입으로 먹기만 한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쁜 입으로 웃음소리를 내고, 상대가 기분 좋을 말을 해 주곤 했다. 말이 한 사람의 희망이 되는 경험, 그건 참으로 경이로웠다. 웃음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다 못해 가지고 싶다는 욕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버텨 비로소 다시 만났는데…….
‘숨만 쉬고 있어. 내가 찾아낼 테니까.’
그때였다. 그의 간절함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북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마석이 더 붉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의 심장도 거세게 박동했다.
“마리아!”
그는 허공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제 소리가 그녀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한편 마리아는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재빨리 제 몸을 덮었던 모래를 치워 냈다. 게다가 제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던 마물도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때는 지금이었다. 그녀가 모래 구덩이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던 찰나, 다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해, 마리아!”
아주 잠깐 환청인가 싶었다. 마물이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서 만들어 낸 주술인 줄 알았다. 한데 저 멀리 한 사람이 보였다. 붉은 갑주를 걸친 남자가 제 이름을 부르며 걸어오고 있었다. 마리아는 환영인 것 같아 소매로 눈을 여러 번 비볐다. 한데 환영이 아니었다. 실제로 붉은 옷을 입은 존재가 보였다.
‘군터.’
마리아도 그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