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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43화 (43/120)

43화

마리아는 군터를 확인하곤 정신없이 달렸다. 제 바람 하나쯤은 이뤄졌으면 했는데,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오다니. 마리아는 뛰다가 넘어지고 굴러도 다시 일어나 군터만 보며 뛰었다. 한데 왜 그의 부름에 목소리가 터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절벽에서 떨어질 때는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군……!”

군터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마리아를 보곤 눈앞이 번쩍였다. 틀림없이 살아 있는 마리아가 맞았다. 그도 그녀를 향해 뛰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는데도 좀처럼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묵직한 모래가 발목에 감기며 마리아에게 뛰어가는 그를 방해했다.

“마리아!”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존재를 확인한 것뿐. 다른 건 하나도 필요 없었다. 더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감사했다. 이런 대양 같은 사막에서 마리아를 온전히 살아 있게 해 주어서.

마리아는 연신 그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벌렸다.

‘말해야 해. 언제까지 버벅거릴 건데, 이겨 내란 말이야! 제발!’

그녀는 저 스스로를 다그치며 뛰었다. 더는 안 된다고, 제발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상처에서 벗어나라 소리쳤다. 불현듯 그와 헤어지던 1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10년 뒤에 너를 찾으러 올 거다.]

무작정 제 할 말만 하던 남자. 그런데 그는 정말 돌아와 주었다. 자신만 그의 말을 잊었던 것뿐. 군터는 잊지 않았다. 마리아의 가슴에 감동이 북받쳐 올랐다. 지금이라면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를 수도 있을 듯했다.

“군……. 어!”

마리아는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제 속에 맴도는 열망을 터뜨리고 싶었다.

‘할 수 있어. 내가 지어 준 이름을 불러야 해!’

“군……더. 군터!”

“마리아.”

군터는 제 이름을 부르는 마리아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내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군터 플레이슬리!”

“!”

울면서 제 이름을 부르는 여자. 모래바람에 잿빛 머리가 휘날리고 뿌연 먼지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가려도 그는 귀로 정확히 듣고 눈으론 선명하게 보았다. 군터가 뛸 때마다 그의 심장도 터질 듯이 박동했다. 마침내 그녀가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군터가 마리아를 향해 두 팔을 뻗자, 그녀도 그를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 끄아악, 끄르륵! 괴성이 울리며 공중에서 마물이 날아와 마리아를 낚아챘다.

“꺅!”

마리아의 비명에 군터는 숨이 멎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등에 찬 도끼를 꺼내 던지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여러 발의 표창이 마물의 꼬리에 꽂혔다. 군터가 돌아보자, 제이미가 마물을 향해 연신 표창을 날리고 있었다. 끄르르륵! 마물들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며 낚아챈 마리아를 떨어뜨렸다.

“아아악!”

그녀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군터는 재빨리 뛰어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마리아를 가까스로 받았다. 그 반동으로 인해 두 사람은 얼싸안은 채 모래 언덕을 굴렀다.

“신이시여!”

군터는 신을 찾으며 마리아의 생존을 감사했다. 그녀의 머리카락, 숨소리, 체온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환영이 아니었다. 이내 마리아는 고개를 들어 군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군터 플레이슬리, 당신이 기억났어요.”

“말을 하는 건가?”

“네.”

그렇다면 절벽에서 떨어질 때, 실제로 마리아는 제 이름을 불러 준 것이 맞았다.

“정말 내가 기억이 났나?”

“저를 찾으러 올 거라고 말했었잖아요.”

무려 10년 전의 일을 기억하다니. 마리아의 정신이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래, 그랬지.”

군터는 마리아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말한 대로 이루어지리라. 그 신빙성 없는 말 한마디를 믿고 지금까지 달려왔더니, 드디어 말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리아는 군터의 가슴에 고개를 떨군 채 오열했다. 군터는 그런 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감동에 젖었다.

“고마워요, 군터.”

“!?”

“나를 포기하지 않고 찾으러 와 줘서.”

마리아가 가슴을 들썩이며 말했다.

“나는 지옥이든 천국이든 네가 가는……. 읍.”

군터가 더 말을 이을 새도 없이 마리아는 그에게 키스했다. 곧 두 사람은 하나로 엉켜 모랫바닥을 굴러다녔다. 모래 언덕 위에선 여전히 병사들이 마물과 싸우고 있지만 두 사람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 * *

에로와 노라는 한달음에 뛰어와 마리아를 부둥켜안았다. 세 여자는 왕궁이 떠나가라 울었다.

“마리아, 미안해. 끝까지 너를 구해 줬어야 했는데.”

에로는 마리아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아주 힘들었다. 그건 노라도 마찬가지였다. 죽자 살자 놈들한테 덤벼들었어야 했는데, 찰나였지만 살기등등한 그들에게 겁을 먹고 말았다.

“에로와 노라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마리아는 두 여자를 위로했다. 훌쩍거리던 두 여자는 마리아가 유창하게 말을 하자 눈물을 뚝 그쳤다. 그들은 눈을 끔뻑이며 마리아만 쳐다봤다.

“저 이제 말할 수 있어요.”

그제야 두 여자는 잠시 멈췄던 숨을 거칠게 내뱉더니 다시 울어 젖혔다. 이번에는 마리아가 말을 하게 되었으니, 감동하여 흘리는 눈물이었다.

군터와 솔샤르는 한 발짝 뒤에서 세 여자의 감격스러운 상봉을 지켜보았다. 그때 군터의 뇌리에 스친 것이 하나 있었다.

“제이미!”

“네?”

군터의 부름에 제이미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잘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고……맙습니다. 대왕.”

“장차 헬랜드를 지키는 훌륭한 전사가 되어라.”

“네, 꼭 대왕님처럼 멋진 남자가 될 겁니다.”

발그레해진 소년의 얼굴에 열정이 차올랐다. 흐뭇하게 제이미를 보던 군터의 시선은 곧 제이미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에 멈췄다.

“그건 무엇이냐?”

“아, 마물의 눈을 파 왔습니다.”

제이미는 마물을 잡자마자 칼로 눈을 도려내 철사 끈에 줄줄이 엮어서 가져왔다. 그래서 눈알은 공격하지 말라고 했던 모양이다.

“어째서? 돈이 필요한 것이냐?”

“아뇨. 사막의 마물들은 시력이 뛰어나거든요. 눈알을 지닌 사람이 비추는 광경을 집에서도 볼 수 있어요.”

“그걸 누구한테 들은 거지?”

“저희 아빠는 마물 사냥꾼이셨어요.”

군터는 반색했다. 제이미가 구해 온 저 많은 눈알이 장차 유용하게 쓰일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그때 마리아가 다가와 제이미를 꼭 안아 주었다.

“고마워, 제이미. 나를 구해 줘서.”

“마리아 님.”

제이미는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마리아는 그제야 절실히 깨달았다. 제게 고난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가긴 했으나, 행복도 함께 왔노라고. 가면을 쓴 채 가짜 충성을 맹세하며 신의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아닌, 많은 결핍도 모자라 마음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이 제게는 훨씬 진실했다.

“아이고, 마리아. 어여 가서 씻어야겠다. 온몸이 먼지투성이네.”

노라가 득달같이 쫓아와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이내 노라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군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왕, 제가 마리아를 아주 깨끗하게 씻겨 놓겠습니다요.”

“뭐? 아……. 그래야지.”

군터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자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마리아가 두 여자와 온천으로 사라진 후, 군터는 솔샤르를 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알랑 세라두의 머리는?”

“상자에 잘 담아 두었습니다.”

“솔샤르, 군대를 이끌고 세라두 백작가로 가거라.”

“예, 개미 한 마리도 살아 있지 못하게 불태우겠습니다.”

그때였다. 시종장이 다급하게 군터에게로 뛰어왔다. 그의 손에는 하얀 종이가 들려 있었다.

“대왕, 라스토니아 황실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

군터는 모니카의 생일 연회 초대장을 보곤 실소를 금치 못했다.

* * *

마리아와 군터는 다정하게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군터는 10년간 자신이 어찌 살았으며 어떻게 왕국을 건립했는지를 덤덤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네가 내 인생의 이정표였다.”

“저는 그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데요?”

“내겐 그런 친절조차 사치였거든. 죽을 때까지 먹어 보지도 못할 고급 음식처럼 말이야.”

마리아는 군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그의 끈기와 집념에 감탄했다. 그저 태어났으니 죽지 않고 사는 것이 목표였던 남자가 이런 성과를 이룬 건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었다.

“군터는 제가 해 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줬어요.”

“?”

“제 목숨을 여러 번 구해 줬잖아요.”

그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은 목숨. 언젠가 부모님과 다시 만날 기회도 사라졌겠지.

“마리아, 내가 가진 건 다 네 것이다. 네가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고 이룰 수 있어. 내가 그리해 줄 거니까.”

군터는 마리아를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예전에야 그녀의 기억이 온전치 못했으니 하나 마나 한 소리였으나,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리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군터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곤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말해요. 너밖에 없다, 다 해 줄 수 있다고 말이에요.”

“뭐?”

마리아의 어조가 사뭇 진지해졌다. 군터를 정면으로 응시한 마리아의 눈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이제까지의 그녀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이제까지 내가 한 말 다 이해한 거 아니었나?”

자신이 이룬 역사를 구구절절 설명했는데, 생전 처음 듣는 여자처럼 의심하다니. 세상 모든 남자가 변해도 저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전남편 헨리와 같은 취급 하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 일이었다.

“군터.”

“…….”

“당신한테 여자는 저밖에 없다고 했죠?”

“더 이야기해야 하나?”

“그런데 왜 그랬어요?”

“무얼 말하는 거지?”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순간 군터는 서늘한 예감에 몸서리쳤다.

“그 여자랑 키스했잖아요. 그뿐만이 아니죠. 잠도 잤잖아요.”

“그 여자?”

“대마녀, 사만타.”

마리아의 표정이 싸늘했다. 군터가 제게 사랑과 신뢰를 맹세하기 전에, 앞서 행한 과오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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