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44화 (44/120)

44화

“마리아, 나를 의심하는 건가?”

군터는 억울하다는 말투로 마리아를 보며 말했다. 그녀를 향한 집념의 증거가 바로 저 자신인데 인제 와서 겨울 제례의 일을 문제 삼다니. 정말이지, 그건 누구라도 꼬투리를 잡을 일이 아니었다.

“그건 일이었다. 겨울 제례를 지내고 대마녀의 점괘를 듣고 밤을 함께 보내는 건, 신성한 의식이란 말이다.”

“신성한 의식? 제가 보기에는 편리한 변명처럼 보였어요.”

“편리한 변명?”

“공식적으로 다른 여자와 즐길 기회를 위한 합리화인 거죠.”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여봐란듯이 사만타와 키스하던 군터의 모습이. 그녀와 다정하게 침실로 향하던 그의 뒷모습까지도 여전히 눈앞에 생생했다.

“너만을 원한다고 하면서 이건 일이니까 다른 여자와 자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남자를 어떻게 믿죠?”

헨리도 로랑과 처음 바람을 피울 때 최소한 제게 미안해하기라도 했다. 한데 군터는 당당했다. 앞으로도 겨울 제례가 돌아오면 자신의 여자를 버려두고 그녀와 공식적으로 바람을 피우겠지.

“그래서 결론은…….”

마리아는 군터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었고 10년이나 원했다는 것까지 모두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를 남자로 좋아하고 신뢰하는 건 엄연히 제 몫이었다.

“남자를 믿지 못하겠어요. 그러니 우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좋겠어요.”

그것이 더는 남자에게 상처받지 않는 길이었다. 더불어 마리아는 군터에게 헬랜드가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곁에서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노라 말했다.

“이봐, 그 대마녀와는……!”

군터는 버럭 화를 냈다. 자신은 이번에는 사만타와 밤을 보내지 않았다. 한데 마리아에게 구차하게 변명해야 하는 상황이 화가 나고 짜증스러웠다.

“대왕으로서 치러야 할 관례였다.”

“그런가요?”

마리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 자신이 그의 여자가 되어도 그 거지 같은 관례는 지속하겠다는 소린가. 그럼 이렇게 설명해 보면 어떨까?

“군터, 만일 당신의 아내가 관례로 인해 마법사와 밤을 보내면 어때요? 그때도 허허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을까요?”

“!?”

마리아의 반박에 군터는 입술만 달싹일 뿐, 더는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말대로 상상이 됐다. 마리아가 잘생긴 다른 남자와 키스하고 뜨겁게 몸을 섞는 광경. 열락에 젖어 교성을 지르는 마리아의 모습과 그녀를 마음껏 탐하는 남자. 이내 군터는 거칠게 도리질했다. 상상만으로도 명치 쪽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관례를 없애려고 했다.”

이제까지 마녀들의 수작에 놀아나기만 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으니 더는 제례를 지낼 필요가 없었다. 마리아는 군터의 말을 진지하게 듣더니 그에게로 다가갔다.

“우리에겐 10년이라는 공백이 있잖아요. 지금부터 서로를 알아 가도록 해요.”

“그래.”

이제야 마리아의 마음이 풀어진 듯했다. 군터가 다급하게 마리아를 안으려 손을 뻗자, 그녀는 뒤로 몸을 뺐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요. 저는 군터에 대한 믿음이 생길 때까지 제 남자로 여기지 않을 거예요. 물론 섹스도 불가해요.”

그러자 화가 난 군터가 집기를 던지며 씩씩거렸다. 어떻게 마리아가 제 진심을 몰라줄 수 있지, 세상에 10년이나 한 여자만 바라보는 미친 새끼가 어디에 있다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 것을. 필시 자신을 저울질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이런 게 싫단 말이에요!”

마리아는 군터를 향해 소리 질렀다.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저렇게 난폭하게 물건을 던지는 남자. 상대방의 뜻은 전혀 존중하지 않는 독단적인 남자. 마리아는 그에게 멀찌감치 떨어져 창 쪽으로 향했다. 군터의 거친 행동에 그녀도 화가 났는지 가슴을 들썩이며 화를 삭였다. 그 모습에 군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마리아 앞에서 무슨 짓을. 이 개 같은 버릇.’

꼭 이렇게 못 배운 티를 내지. 군터는 자책하며 마리아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다신 그런 일 없어.”

군터는 마리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읊조렸다. 이내 그녀는 눈물을 쏟았다. 이혼해 달라는 헨리의 요구와 교차했던 달콤한 고백. 두 번 다시 그런 잔인한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군터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이 좋아한다. 하지만 그를 남자로 받아들이고 사랑까지 가기 위해선 제겐 용기가 필요했다.

“네 말 다 알아들었으니…….”

군터가 말을 머뭇거렸다.

“많이 기다리게 하진 마라.”

* * *

마리아는 노라와 석탑 위로 올라왔다. 에로한테도 함께 가자고 말했더니, 솔샤르가 랑데스로 출정하는데 자신도 동행해야 해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이제 행복한 일만 남은 거지?”

노라가 콧노래를 흥얼대며 은근하게 물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완벽한 안식을 찾기 위해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헬랜드를 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해요.”

“이미 강하잖어? 돈도 많고 싸움도 잘하고, 그럼 됐지. 얼마나 더 강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론 부족해요. 외교적으로 힘을 낼 수 있어야 해요.”

“응?”

대륙에는 많은 나라가 있으며 크고 작은 연합이 있다. 돈만 많다고 해서 나라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조금 작은 나라여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외교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언제까지 고리대를 생업으로 하는 나라로 남으려고. 정당하게 외국과 교역하며 생산적인 나라로 거듭나야지.

“마리아가 왕비가 돼서 그렇게 만들면 되잖어?”

“네?”

노라는 단순명료하게 말했다.

“왕비가 되기에는……. 솔직히 남자를 못 믿겠어요.”

마리아는 노라에게 솔직히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굳이 제 속내를 숨길 이유도 없고, 이미 노라는 제 마음을 간파했을 터였다. 전남편에게 버림받고 사랑을 믿지 않는 자신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다시 사랑할 수 있는지 겁이 났다.

그렇다고 사랑도 없이 군터를 이용하는 건 옳지 않았다. 그와의 인연을 몰랐을 때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군터 플레이슬리는 누구한테도 그런 호구 취급을 당해선 안 되는 남자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노라는 마리아가 무얼 염려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폐황후, 마리아’라는 호칭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설명이 되니까.

“네? 무슨 말씀이세요?”

“대왕이 그 마녀랑 잔 게 마음에 걸리는 거잖어. 앞으로도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봐?”

노라가 뜬금없는 말로 마리아를 놀라게 했다.

“…….”

“가자고, 내가 보여 줄 게 있으니.”

노라는 마리아의 손을 잡고 석탑을 내려갔다. 말로 백 번 하느니 한 번 보여 주는 게 현명했다. 왕궁에서도 아주 외진 곳으로 무려 한 시간이나 걸어가자 화려했던 왕궁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곳이 나타났다. 같은 장소에 이토록 음산한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처형장이야.’

어느 궁에나 음과 양은 존재하는 법, 화려한 본채 뒤에는 감옥과 처형장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때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마리아는 긴 장대 위에 걸려 있는 한 여자의 수급을 보고 말았다.

“세상에!”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마리아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대마녀!’

그뿐만이 아니었다. 넝마를 씌운 마녀들의 시신이 한 줄로 나열이 되어 있었다.

“대왕께서 모두 죽이라고 명하셨지. 마리아를 죽이려 했던 놈들과 마녀들이 연관되어 있었거든.”

그래서 앞으로는 겨울 제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던 모양이다.

“대왕을 의심하지 말어.”

* * *

사막에서 돌아오니 그간 처리하지 못한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거의 돈에 관련된 장부이기에 허투루 할 수도 없는 상황. 무엇보다 저 혼자 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때마침 솔샤르가 잠시 잊고 있던 존재를 일깨워 주었다.

[마리아 님의 사촌이라는 남자가 있잖습니까?]

인재이긴 한데, 마리아를 좋아한다는 바람에 잠시 묵혀 놓았던 에이든이 떠올랐다.

[버릇을 잘 고쳐서 쓰십시오.]

[잘 고쳐지면 좋지만, 머리만 있고 눈치가 없으면 곤란하다.]

순간, 군터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며칠 뒤 군터는 에이든에게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하기 위해서 집무실로 불렀다. 에이든은 사람을 불러 놓고 무섭게 노려보기만 하는 군터의 눈빛에 숨통이 조여 왔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기를 질리게 하는 존재.

“마리아를 좋아하나? 아니, 재혼하고 싶나?”

“예?”

에이든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군터를 쳐다보다 천천히 굳은 표정을 풀기 시작했다.

“사촌 여동생 이상은 아닙니다.”

자신과 엘리자벳이 무사히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일전에 군터가 마리아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곤 일찌감치 포기했다.

“확실한가?”

“대왕,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뭐지?”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제 딸보다 소중하지 않습니다. 저는 엘리자벳과 헬랜드에 정착하여 잘 살고 싶은 바람, 그거 하나뿐입니다.”

에이든의 목소리는 매우 진지했다. 마리아를 잠시나마 마음에 둔 건 사실이나 그녀는 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좋아, 오늘부터 내 보좌관으로 일하도록 하지.”

에이든은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명색한 반면, 과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능력을 알아봐 주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해 주면 쉽게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보좌관으로 택했다. 무엇보다 현재 헬랜드의 이주민 중에서 가장 학식이 높고 행정 실무 능력이 풍부한 사람이니까. 마리아와 별개로 놓치기엔 아까운 인재였다.

“예……? 고맙습니다. 대왕.”

“왕궁에서 기거하도록 해.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와야 하니까. 그리고 할 일이 아주 많을 거다.”

“성심성의껏, 아니 최선을 다해 대왕을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지.”

군터가 검지로 제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였다. 드러내며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이런 결정을 한 것에 관하여 누군가가 꼭 알아줬으면 했다.

“대왕이 제게 베푼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도 꼭 말하겠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다르군.”

군터가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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