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45화 (45/120)

45화

군터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에이든처럼 명석하고 많이 배운 사람, 특히 귀족 출신의 남자들은 여자를 대할 때 어떻게 하는지 말이다. 또한 자신의 고뇌에 대해 에이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마리아가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는다.”

군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본디 저라는 인간은 에둘러 말하며 의뭉을 떨 줄 몰랐다. 에이든은 군터의 말에 바로 직감했다. 마리아가 군터에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음을.

“모든 귀족 여자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매사 절제하며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서 그럴 겁니다.”

“그래?”

에이든이 예상보다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특히 황후로 내정되어 있었으니 도덕적인 신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고 체면과 명예를 목숨처럼 여겼습니다.”

“도덕적 신념이라, 그래서 꼬치꼬치 따지길 좋아했나.”

군터는 신랄하게 자신을 비판하던 마리아가 떠올랐다.

[신성한 의식? 제가 보기에는 편리한 변명처럼 보였어요. 공식적으로 다른 여자와 즐길 기회를 위한 합리화인 거죠. 너만을 원한다고 하면서 이건 일이니까 다른 여자와 자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남자를 어떻게 믿죠?]

일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말이지 말로는 마리아를 이길 재간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말문이 터져서 기쁘긴 한데 살짝 피곤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대왕, 굳이 마리아에게 진심을 보여 주려 하지 마십시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군터는 에이든의 말에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제게 거리를 두고 천천히 알아 가자고 했다. 그간의 공백을 메우려면 서로를 향한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뜻일 터.

“대왕께서 마리아에게 하시는 모든 행동이 다 진심 아닙니까?”

“맞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마리아 스튜어트’ 오롯이 그녀만을 원했으니까.

“거리의 창부는 순정을 원합니다.”

“!?”

군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든이 말을 빙빙 돌리며 에두르자,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마리아를 논하는 자리에서 거리의 창부를 왜 들먹이는지 의아했다.

“창부는 육체적인 쾌락은 충분하기에, 아니 지긋지긋하겠죠. 하지만 그런 창부에게 순정을 바칠 남자는 드물 겁니다.”

“후! 쉽게 말해.”

군터의 안색이 변하자, 에이든이 몸을 움찔거렸다. 제 딴에는 비유법을 이용하여 군터가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한다는 게 되레 그의 화를 부른 듯했다. 그렇다면 아주 간단하게 알려 줘야지.

“마리아를 욕망의 포로로 만드십시오.”

“무슨 포로?”

군터의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한 말이었다.

“몸정을 무시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대왕은 남자가 봐도 멋진 육체를 가지셨으니, 마리아를 몸정으로 사로잡는 데 무리가 없으실 겁니다.”

“몸정.”

“반듯하게만 살아온 마리아에게 과감하게 금기를 깨도록 하는 겁니다.”

에이든의 명쾌한 말에 군터가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야 알아듣기 쉽게 말하네. 아무래도 사람을 잘 뽑은 듯싶었다. 자신이 배움이 짧긴 해도 외모와 육체는 어디 가서 빠지질 않으니까.

“그런데 주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군터의 물음에 에이든은 머뭇거리며 일어나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내 군터가 하얀 치아를 완전히 드러낸 채 웃었다.

“그런데 너는 이런 것을 어떻게 잘 알지?”

“그게 <인간 심리학> 486페이지 셋째 줄에 보면 남녀의 육체적 특징으로 인한 정서적인 차이점에 관해서 저자, 프로이튼 박사님은 적절한 예를 들어 놓으셨죠. 인간은 본디……. 아닙니다.”

에이든은 상기된 얼굴로 다급하게 말을 멈췄다. 군터의 일그러진 표정 때문이다. 또 선을 넘어 버렸다. 눈치 없이.

“나가서 일 보도록 하지.”

“예, 바로 업무 시작하겠습니다.”

* * *

군터와 정무대신 그리고 마리아와 노라가 국정회의실에 모였다. 장내에 커다란 거울이 설치되고 제이미는 부산스레 움직였다. 물론 마리아는 군터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으며, 노라는 두 사람의 뒷자리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에이든은 회의 내용을 기록하고자 펜과 종이를 준비했다.

마침내 정무대신들이 다 모이자, 군터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미 준비는 다 되었느냐?”

“네.”

“아니, 저런 꼬맹이가 대체 무얼 보여 준다고.”

“여자도 모자라 이제는 열 살배기가 국정에 참여한다니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아무리 헬랜드가 체계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그러게 말입니다. 개나 소나, 아니지 애 어른 여자 할 것 없이 날뛰잖습니까.”

정무대신들이 여지없이 투덜대자, 군터의 벼락같은 소리가 소음을 잠재웠다.

“시끄럽다!”

곧 장내가 고요했다.

“가져와.”

군터가 명령하자, 시종들이 밖에서 화려한 상자 하나를 그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때 노라가 마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상자에 그놈의 머리가 들어 있잖어.”

“그놈의 머리요?”

알랑 세라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절벽에서 도끼가 날아와 알랑의 목을 치는 바람에 자신이 절벽 밑으로 떨어졌던 광경이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군터는 그 상자에 자신의 긴 다리를 올려놓았다.

“저 거울이 보여 줄 거다. 헬랜드에 침입하여 내 여자를 죽이려 했던 놈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말이다.”

군터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용병들이 헬랜드 왕궁에서 활개를 쳤으니 보복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거울이 그 광경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다.

“솔샤르 부관님께서 마물의 눈알을 가져가셨으니, 여기에서도 생생하게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제이미가 긴장한 얼굴로 모두에게 말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제이미를 보며 혀를 차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제이미에게 환하게 웃어 주는 것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노라는 마리아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저 꼬맹이 녀석이 아주 신통방통해.”

“맞아요.”

마리아도 제이미의 달라진 모습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시작해라.”

“네.”

군터의 명령에 제이미는 마물의 눈을 거울 쪽에 비쳤다. 이내 거울은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헬랜드의 붉은 군대가 세라두 백작가를 공격하는 광경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백작가의 병사들과 혈투를 시작하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거울에 대한 신기함은 잊었는지,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한데 세라두 백작가의 병사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군터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하며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솔샤르가 선두에 서서 병사들에게 무어라 명령하긴 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제이미가 말했다.

“하인들은 죽이지 마라. 생포하여 헬랜드로 데려간다.”

그제야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다시 붉은 군대와 세라두 병사들과의 혈투가 재개되었다. 모두 숨을 죽인 채 붉은 군대가 승리하기를 빌었고 마침내 솔샤르가 세라두 백작의 수급을 손에 넣었다.

“우와아아!”

“솔샤르 부관 만세!”

사람들이 박수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전세는 곧바로 붉은 군대 쪽으로 기울어, 일방적인 공격이 이루어졌다. 얼마 뒤, 세라두 백작가는 화염에 휩싸였고 붉은 군대는 퇴각했다.

“그만.”

군터의 명령에 제이미는 마물의 눈알을 닫았다. 장내에 모인 사람들의 흥분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 마리아는 가슴에 뭉친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세라두 사람들이 똑같이 제 가문 사람들을 도륙했었다. 그래도 다른 점이 있다면 세라두 병사들은 스튜어트 공작가의 모든 이를 죽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을 지르기 전, 공작가의 값비싼 재산은 모두 갈취했다는 말도 들려왔다.

마리아의 손이 부르르 떨리자, 군터가 단숨에 움켜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

로랑도 저처럼 가슴을 치며 통곡해 봐야지. 가족을 잃는 고통이 얼마나 처참한지 말이다.

“고마워요, 군터.”

마리아는 그의 손등에 입 맞추며 고마움을 표했다.

* * *

마리아는 포도주와 과일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한데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뜻밖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군터가 상의를 탈의한 채 줄을 잡고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우람한 어깨와 잘 발달한 근육들, 매끈한 허리까지. 특히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등의 용이 생동감 있게 꿈틀거렸다.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가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옮겼다. 줄을 움켜잡은 두 팔뚝에 터질 듯 도드라진 심줄과 근육이 보기 좋았다.

완벽한 남자의 육체란 아마도 군터의 몸을 두고 하는 말일 터. 가죽 바지를 입었음에도 탄탄한 군터의 허벅지. 마리아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고정됐다. 저 육중한 몸에 짓눌렸던 기억이 떠오르며 척추를 타고 저릿한 전율이 일었다. 그때 군터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훌쩍 내려와 돌아섰다.

“왔나?”

“네, 포도주랑 과일 좀 가져왔어요.”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할 때마다 탄탄한 가슴근육이 움직였다. 이내 그녀가 포도주를 건네자, 군터는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빨간 액체가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가자 꿀렁대며 움직이는 목울대. 입가 쪽으로 흘러나온 포도주가 턱과 목을 지나 굴곡진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광경을 마리아는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이지, 군터의 육체는 아름다웠다. 궁 앞에 서 있는 조각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씻고 와야겠어.”

군터가 포도주 잔을 건네며 말했다.

“같이 갈까요?”

“아니, 시종들이 있으니 괜찮다.”

이상하다, 온천에 갈 때는 항시 자신을 데리고 갔는데. 목욕은 하지 않아도 곁에 두기라도 했건만 어째서 오늘은 함께 가자고 권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군터는 쌩하니 침실을 나갔다. 마리아는 그가 나간 문을 내내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나 왜 아쉬운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