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마리아는 에이든이 군터의 보좌관이 되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에이든의 능력을 썩히지 않고 펼칠 수 있으니 헬랜드 왕실 입장에서도 그리고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마리아, 이거.”
에이든이 마리아에게 눈에 익은 종이를 건넸다.
“라스토니아 황실에서 보낸 초대장이네요.”
단번에 못 알아보면 리가 없었다. 헬랜드에서 라스토니아 황실의 문장을 다시 볼 줄이야. 한때는 자신이 저 초대장을 하나하나 쓰곤 했는데. 아무튼 만감이 교차했다. 헨리가 군터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 오든 안 오든 보낸 것일 터. 마침 곁에 있던 노라가 버럭 화를 냈다.
“아주 뻔뻔한 인간들이네. 어떻게 헬랜드에 초대장을 보내?”
“헬랜드 왕실은 저와는 별개니까요.”
대답은 그리했으나,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대왕께서 너의 결정에 따르신다고 하셨어.”
“고민해 볼게, 에이든.”
말은 그렇게 했으나, 답은 이미 정했다.
“그래. 난 바빠서 가 봐야겠다.”
에이든은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내 마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초대장을 봉한 밀랍을 뜯었다. 무어라 쓰여 있을까. 예상컨대 두 달 뒤에 있을 선황후 모니카의 생일 연회에 관한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군터의 눈치가 보이니 의례상 초대장을 보낸 거겠지. 마리아는 최대한 침착하게 초대장을 읽었다.
‘엉망이네.’
초대장 하나만 보아도 그 황실의 분위기를 알 수 있건만, 무엇보다 황후의 인장이 아닌,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황후 자리가 공석인 듯했다.
“마리아, 가려고?”
“가야죠.”
마리아의 단호한 대답에 노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줄 선물도 있고.”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마리아는 아직 헬랜드의 왕비가 아니잖어?”
“어차피 헨리와 이혼이 안 된 상태라 왕비가 될 수 없어요.”
교수형에 처해서 자신이 죽어야 자동으로 이혼이 성립되지만, 살아 있기 때문에 절차가 복잡했다.
“그럼 이혼부터 해야겠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리아는 한동안 말없이 고민했다. 언제든 한 번은 만나야 할 사이, 하지만 복수를 감행하기에는 아직은 이른 감이 있었다. 제 머릿속에 복수의 계획이 아주 체계적으로 짜여 있으나 서두르지는 않을 참이다.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으니까.’
그때 마리아는 노라를 위아래로 세심하게 살폈다. 그러자 노라는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건데?”
“노라가 시녀장이 돼 줘야겠어요.”
“시녀장? 그건 귀부인들이나 하는 거잖어?”
“하실 수 있어요. 제가 완벽한 귀부인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나도 라스토니아로 데려가겠다는 게야? 그럼 에로는?”
“함께 가야죠. 에로가 맡을 역할은 따로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군터에게 청혼을 받아 내는 일이 시급했다. 그가 자신을 헬랜드의 왕비라 인정해야 무슨 일이든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문제가 살짝 생겼다. 예전에는 저만 보면 어떻게든 키스하거나 더한 것을 원했건만, 요즘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도 손만 잡고 자는 남자가 돼 버렸다.
그럴 때면 되레 저 자신이 서운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더 어이없는 건 시시때때로 군터의 맨몸이 눈앞에 아른거린다는 것이다. 색욕에 빠진 여자처럼 경박하게시리. 마리아는 노라에게 이런 사정에 관해 상담차 이야기했다.
“뭐여? 그럼 둘이 아직도 않은 거여?”
오히려 노라가 더 놀란 눈치였다. 혈기왕성한 남녀가 매일 같은 침실에서 자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내 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아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보기엔 대왕께서 마리아를 배려해 주시네.”
“배려요?”
“마리아가 먼저 그러자고 했다며? 서로 알아 가는 시간을 두자고. 그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노라고?”
“네……? 네, 그랬죠.”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우리에겐 10년이라는 공백이 있잖아요. 지금부터 서로를 알아 가도록 해요. 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요. 저는 군터에 대한 믿음이 생길 때까지 제 남자로 여기지 않을 거예요. 물론 섹스도 불가해요.]
대체 군터가 언제부터 제 말을 그렇게 잘 들었지? 사실 그때는 군터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어서 말을 심하게 했다.
“마리아는 조금 더 대담해질 필요가 있어.”
노라가 마리아의 등을 툭 치며 웃었다. 대담해지라고, 더는 군터에게 서운하지 않으니 대놓고 유혹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런 거 잘 못하는데.
“마리아, 방법을 알려 줘?”
“네……? 네, 있으면 알려 주세요.”
“맞불을 놓으면 되지.”
“맞불이요?”
“대왕이 마리아랑 지금 그거 하시는 거잖어?”
노라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만 늘어놨다. 그거라니,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또 있나?
“밀고 당기기 말이여.”
“밀고 당기기?”
순간 섬광이 뇌리를 강타했다. 일부러 자신한테 무심하게 굴어서 되레 관심을 끌어낸다?
“복잡할 거 하나도 없어. 그냥 자빠뜨려!”
“누구를 자빠뜨려요?”
마리아는 말간 얼굴로 노라를 바라봤다.
* * *
마리아는 정성 들여 목욕한 후, 온몸에 향유를 듬뿍 발라 주었다. 노라의 조언대로 어깨를 다 드러낸 슈미즈를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노라가 마리아에게 조언하기를, 밤에 몸으로 싸우자 치면 무조건 여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고 장담했다.
[달빛이 쏟아지는 창가에서 머리를 빗어.]
[왜요?]
[달빛에 젖은 여자를 마다할 남자는 없어.]
신빙성이 있는 말인진 모르겠으나, 그녀가 시킨 대로 마리아는 창가에 서서 길게 늘어뜨린 제 머리에 빗질을 했다. 한데 오늘따라 군터가 늦었다.
‘빗질을 언제까지 해야 하지.’
기다림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다 관두자 마음먹었을 때, 침실 문이 달칵하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아는 재빨리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우아하게 빗질했다.
문을 연 군터는 무심한 듯 빗질만 하는 마리아를 보곤,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그녀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보고 있자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는 존재는 여신이 틀림없을 터였다. 특히 달빛에 구슬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하늘빛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구한 표정. 살면서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양 순수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하얗고 둥근 어깨를 다 드러내니 더 가련해 보였다. 또한 유연한 몸의 곡선이 매우 관능적이었다.
“일은 다 마쳤어요?”
“대충.”
군터는 대답하는 중에도 마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마리아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며 싱긋 웃었다.
“!”
미치도록 예뻤다. 매일 보는 사람인데, 어째서 심장은 이리도 주책없이 뛰는지 모르겠다.
“라……스토니아 초대에 응할 건가?”
군터는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냈다.
“저는 헬랜드의 볼모지, 왕비가 아니잖아요. 제게 결정권이 있어요?”
그녀의 말에 군터는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부아가 났다. 마리아에게로 성큼 다가와 금방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봤다.
“맞아, 마리아는 나의 왕비가 아니지.”
“!”
이런 반응을 원한 건 아닌데, 역시 맞불 작전은 그리 쉽지 않았다. 게다가 군터는 예상외로 노련했다. 한데 그의 눈빛은 여전히 그윽해서 문제였다.
“아직도 모르나?”
“알아요. 왕비가 아니라 볼모라는 거.”
“아니, 마리아는 나의 여왕이야.”
군터의 청록빛 눈동자가 흥분으로 일렁이고, 마리아는 머릿속까지 소름이 끼칠 만큼 놀랐다. 이내 마리아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청혼……이에요?”
“운명이야. 이미 10년 전에 정해진 일이지.”
그의 음성이 나직하게 갈라졌다. 마리아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곤 먼저 키스했다. 아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둥켜안았다. 뜨거운 숨결이 뒤엉키며 두 사람은 이리저리 부대꼈다. 잠시 입술을 뗀 군터가 마리아에게 물었다.
“우리가 서로를 더 알아 가야 할 게 있나?”
“없어요.”
“그럼 이제부터 놔주지 않을 거다.”
“!”
순간, 군터의 얼굴에 승자의 만족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군터를 원하는 것이 중요할 뿐. 한데 그는 마리아를 침대가 아닌, 줄이 매달린 곳으로 데려갔다.
“너와 나만의 시간이야. 아주 퇴폐적이고 음탕해도 상관없어.”
군터는 마리아의 슈미즈를 찢다시피 하더니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마리아는 완전한 나신이 되어 그 앞에 서 있었다.
“어……쩔 건데요?”
‘설마, 나를 묶으려는 거야?’
언제나 불길한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는 법, 군터는 침대로 다가가 위에 올려진 가운의 비단 끈을 가져왔다. 그는 곧 비단 끈으로 마리아의 두 팔을 줄에 묶었다.
“걱정하지 마.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
그딴 것은 걱정하진 않는다. 군터는 비단 끈으로 손목을 묶는데도 혹여 아프진 않을까 세심하게 신경 썼다. 하지만 맨몸에 두 팔이 위로 묶인 상황이 창피했다. 군터는 천천히 다가가 마리아의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곤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부글부글 끓는 솥처럼 그녀의 입 안은 뜨거웠다. 곧 두 개의 혀가 하나의 욕망 덩어리가 되어 서로를 탐했다. 한창 절정으로 치솟는 순간, 군터는 마리아에게서 몸을 뗐다. 마리아는 아직 해소하지 못한 욕정에 몸을 떨며 애타게 그를 갈구했다. 멈추지 않기를 바랐는데.
“네가 나를 미치도록 원하게 할 거다.”
군터는 마리아한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제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