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터벅터벅- 발소리가 힘겨웠다. 방 안에서 쏟아지던 빛이 점점 사그라들며 남자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우선 하얀 머리에 늘어진 턱수염, 구부정한 허리, 주름진 얼굴과 힘겹게 짚고 있는 지팡이까지. 아기 스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익히 알고 있는 스톤을 찾느라 분주했다. 이내 군터와 솔샤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연신 마른침만 삼키며 방에서 나온 낯선 노인을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냐?”
군터는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 어른한테 ‘너’라니! 네 어미, 아비가 그리 가르친 게냐?”
“나는 어미도 아비도 없다. 그러니 누군지 말해라.”
군터의 얼굴이 불길함에 잔뜩 일그러졌다. 그때 마리아가 노인을 향해 다가가 물었다.
“스톤?”
“마리아, 이제 말문이 트인 게로구나?”
그의 대답에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저 100살도 더 되어 보이는 노인이 아기 스톤일 줄이야. 정말이지, 변화의 간격이 너무 커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내 스톤이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정령은 힘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수 있지. 다음 겨울잠을 잘 때까진 이 모습으로 살아야 해.”
그제야 정령은 인간과 확연히 다른 존재임을 실감했다. 아이, 청년, 노인을 반복해 가며 자신의 힘을 조절하는 듯했다. 또한 자신이 지키는 땅의 번영에 따라 정령이 가진 힘도 달라진다고 했다.
“스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마리아는 스톤과 살포시 포옹하며 그를 반겨 주었다. 하지만 군터와 솔샤르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눈치였다. 헛웃음만 치며 노인이 된 스톤을 낯설어했다.
“그나저나 내 수발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말이야.”
스톤이 사람들을 쭉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군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리아는 안 된다.”
스톤은 아이였을 때도 마리아를 무척 좋아했었지. 마치 제 엄마인 양 따랐다. 그런 헛된 꿈은 처음부터 싹을 잘라 놔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군터 때문인지, 스톤의 손가락이 마리아를 가리키다가 다른 사람을 향해 움직였다. 모두 숨을 죽인 채 그가 누굴 택할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 채 주시했다. 한데 부산스레 움직이던 스톤의 손가락이 에로한테서 멈추었다.
“에로는 좀…….”
군터와 마찬가지로 솔샤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한데 스톤의 손이 바로 옆에 있는 라모나한테서 멈췄다.
“너, 이리 오너라.”
스톤이 이제 막 왕궁에 온 라모나를 택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매우 놀라는 데 반해, 정작 라모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스톤을 향해 걸어갔다. 곧 라모나의 처참한 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말이 튀어나왔다.
“얼굴을 크게 다쳤나 봐.”
“머리 색이 참 특이하다.”
“저 손 좀 봐. 다 터지고 피딱지가 생겼네.”
“쯧쯧, 차라리 잘됐지 뭐. 스톤 님의 시중을 드는 편이 훨씬 편하지.”
“당연하지.”
스톤은 라모나를 오랫동안 살피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미 알고 있구나? 네가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네, 저는 혼혈이에요.”
라모나는 정령과 인간의 혼혈이지만, 마법을 쓰진 못했다. 되레 인간보다 나약했으며 외모로는 별종 취급을 당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학대를 많이 당했고?”
“…….”
마침 에로가 마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모나는 어릴 때, 로랑의 시녀였는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학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라모나의 한쪽 얼굴을 망가뜨린 것도 로랑이었으며 결국 흉측하다고 돼지우리로 쫓아냈다고 했다.
‘인간도 아니야.’
마리아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로랑이 왜 괴롭혔는지 라모나의 정상적인 반쪽 얼굴을 보면 단번에 짐작이 갔다. 라모나의 독특한 미모가 거슬렸던 거겠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해야 하는 로랑의 성격상 제 시녀가 저보다 아름다운 건 참을 수 없을 터. 아니, 제 주위에 있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으니 험하게 망가뜨려 놨을 것이다.
“이젠 여기서 편히 살자꾸나.”
스톤의 말에 라모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파르르 떨리더니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내 스톤이 그녀를 향해 손을 올리자 잔잔한 바람이 라모나의 붕대를 스르륵 풀어 버렸다. 곧 그녀의 상처가 모든 이 앞에 드러났다.
“세상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라모나는 한쪽 머리카락이 전혀 없는 데다가, 화상으로 그녀의 나머지 얼굴이 보기 흉하게 뭉그러졌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헬랜드를 야만적이고 비천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손가락질하지만, 고귀한 혈족이라 자부하는 사람 중에는 죄악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 이들이 존재했다. 로랑 세라두처럼.
“울지 마라. 내가 치유해 줄 테니.”
스톤은 라모나의 머리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때 군터가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야, 스톤! 혀로 핥아 주어라. 너의 침을 흠뻑 발라야 치유가 되지 않나?”
마리아의 상처에는 그렇게 핥아 대더니.
“저런, 고약한 놈 같으니. 어른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른……?”
군터가 발끈하자, 마리아가 그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군터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톤이 라모나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시비를 걸 이유가 무에 있다고. 스톤이 어린애였을 때도 그랬지만 노인이 되어 버린 지금까지도 군터의 유치함은 변함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스톤, 라모나를 치유해 주세요.”
마리아는 스톤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그는 곧 라모나를 향해 다시 손을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손에서 빛이 쏟아지더니 라모나의 몸을 감쌌다. 그렇게 라모나는 10여 분 정도 무지갯빛에 휩싸였다. 점점 빛이 사그라들며 새로운 라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다시 큰 충격에 빠졌다. 스톤의 힘으로 완벽하게 치유된 라모나는 요정처럼 아름다운 여자였다. 찰랑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과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 투명한 피부. 혼혈이라고 하더니 귀 끝이 살짝 뾰쪽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감동에 겨워 박수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대왕, 스톤의 마력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솔샤르가 군터에게 다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좋은 징조다. 헬랜드가 쇠퇴하면 스톤도 나약해질 테니, 앞으로 그런 일은 없어야지.”
* * *
군터는 헬랜드의 모든 귀족과 정무대신, 그리고 일개 궁인들까지 전부 모이게 했다. 그들에게 발표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상석에 준비된 붉은 용의 왕좌가 두 개인 것을 보고 대략 눈치를 챈 터였다. 그리고 왕좌의 바로 밑에는 스톤이 이미 자리해 있었다. 곧 군터와 마리아가 손을 잡고 나타나자 모두 환호성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모두 들어라, 헬랜드의 대왕인 나는 마리아 스튜어트를 이 나라의 왕비로 맞이할 것이다.”
그의 발표에 모두 기뻐했다. 이제야 왕국의 기틀이 다져지는 느낌이었다.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성대한 국혼을 준비하라.”
“예.”
마리아는 우레와 같은 함성을 듣노라니 가슴에 흥분이 차올랐다.
‘이제 시작이야.’
반드시 헬랜드를 라스토니아에 대적할 만한 강대국으로 키워 내야지. 또한 그들이 제게 저지른 죄악을 고스란히 돌려줄 테다. 마리아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완벽한 복수를 하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집무실에서는 심각한 대화가 이어졌다.
“마리아, 아니 왕비님은 먼저 헨리 왕과 이혼을 해야 합니다.”
에이든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대륙의 많은 황실이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군터와 마리아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군터의 입장은 단호했다. 언제부터 헬랜드가 외국의 눈치를 봤다고.
“대왕, 외교적인 힘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대륙의 법과 관례를 존중해야 합니다.”
“골치 아프군. 내가 서신을 보내면 이혼 따위 안 해 줄 이유가 없단 말이다.”
“순순히 응하진 않을 겁니다.”
군터와 에이든의 설전이 벌어졌다. 에이든은 헬랜드가 한 나라로서 정치적, 외교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인정받으려면 다른 나라와 교역하며 친교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힘주어 설명했다. 하지만 군터는 우리끼리도 잘 먹고 잘 사니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며 에이든의 말을 무시했다.
“라스토니아의 초대에 응할 거예요.”
두 사람의 설전을 마리아가 일축했다. 그녀의 손에는 라스토니아에서 보낸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굳이 가려는 이유가 뭐지?”
“가서 제가 직접 헨리에게 이혼을 요구해야죠.”
마리아의 대답에 군터는 고민이 많아졌다. 일전에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여 줄 때는 마리아가 초대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저라도 그 끔찍한 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한데 가겠다니.
“마리아가 무얼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허락할 수 없어.”
“왜요? 제 일이잖아요?”
“위험해. 너를 죽이려고 내 왕궁까지 침입한 놈들이다.”
“헨리는 모르고 있을 거예요.”
“아무튼 안 돼. 복수든 뭐든 내가 다 할 테니, 마리아는 가만히 있어라.”
마리아는 군터의 고루한 대답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제껏 군터를 잘못 보았나. 그도 헨리처럼 여자를 무시하며 남자가 모든 일을 주도해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얌전히 궁에 남아서 내궁 체계나 바로잡도록 해.”
“그렇다면 헨리 왕과 이혼은 반드시 협의하셔야 합니다.”
보다 못한 에이든이 나섰다. 마리아가 헨리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고 군터의 비가 된다면 다른 황족들은 두 사람을 불미스러운 관계로 몰아갈 것이 틀림없을 터. 그리되면 헬랜드의 위상에 도움이 되질 못한다
“헨리가 내게 진 빚으로 퉁 쳐 주지.”
“예?”
에이든이 경악하자,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군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저를 진짜 볼모로 생각하는군요. 아니, 돈을 주고 여자를 사 온 건가요? 그런 왕비라면 거절할게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