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49화 (49/120)

49화

“마리아, 다시 말해 봐.”

군터가 난감한 얼굴로 되물었다. 분명 그녀의 입에서 ‘거절’이란 말이 나온 듯했다.

“왕비, 거절할게요. 당신의 여자, 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하는 소린가?”

“네, 저는 볼모니까요.”

쾅! 마리아의 말에 군터가 책상을 거세게 쳤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놀라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제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을 거라면 당신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내가 너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마리아는 모른다. 절벽에서 그녀를 놓쳤을 때의 공포를. 막막한 사막에서 마리아를 찾으려 몸부림쳤던 그 고통을……. 그때 다짐했다. 다시는 마리아를 위험에 빠지도록 그냥 두지 않겠노라고.

“사랑할 수 없어요.”

“!?”

“저를 소유물 취급 하는 남자는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마리아는 제 할 말을 다 쏟아 낸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마리아, 거기 서!”

군터가 무섭게 소리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마리아는 집무실을 나와 정신없이 뛰었다. 군터는 헨리와 다를 거라 여겼다. 제멋대로고 거친 남자여도 제 여자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존중해 줄 수 있는 남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헨리와 그가 다른 점이 무언지 모르겠다.

‘빚으로 퉁 친다고?’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세상의 어떤 왕실에서 왕비를 돈을 주고 사 올까. 설사 그런 치부가 있다 쳐도 감춰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내가 느낄 수치심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거야?’

마리아는 군터가 원망스러웠다. 결국 저라는 인간은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쉬지 않고 달려서 석탑으로 올라갔다. 끝도 없이 펼쳐진 계단을 오를 때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고통스러워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내 남자에게 존중받는 것, 바라는 건 오직 그거 하나뿐인데.’

그것이 과욕인가. 마리아는 스스로에게 연신 되물었다. 한편 군터는 궁이 떠나가라 마리아를 불렀다. 지나던 궁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쿵쿵거리며 왕궁을 돌아다녔다.

“마리아는?”

마침 노라와 에로를 만나자 득달같이 물었다.

“못 봤습니다.”

“갈 만한 데 없나?”

“글쎄요.”

노라는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 마리아와 군터가 다툰 상황에 굳이 끼어들 필요도 없고, 이렇게 갈등이 심할 때는 차라리 각자 시간을 두는 편이 현명하다 여겼다.

‘사랑할 수가 없어?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나.’

군터는 화기에 받쳐 가슴을 들썩였다. 마리아가 제게 던진 말로 인해 사지가 떨렸다. 그동안 자신이 너무 오냐오냐해 주었지. 제게 절대로 해선 안 될 말을 그렇게 서슴없이 해 버리다니. 어떻게 해야 그 고약한 버릇을 고쳐 놓을까. 군터는 약 오르고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여자가 아니며 사랑을 부정하는 일만큼은 해선 안 되는 금기임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 * *

로랑은 친정에서 날아온 비보에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와 오빠가 죽다니.’

알랑이 마리아를 없애려 헬랜드에 잠입했다가 들키는 바람에 붉은 군대가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는 소식에 경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라두 백작저는 불에 타 잿더미가 됐으며, 가문 사람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그녀는 몸에 지진이라도 난 양 떨었다.

“아아악!”

로랑의 비명에 마침 그녀에게 오던 헨리가 놀라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헨리가 로랑이 들고 있는 서신을 가져가려 하자, 그녀가 재빨리 빼앗았다. 헨리가 사건의 전말을 알아선 안 될 터.

“아니에요, 아무것도!”

“로랑, 짐은 네가 걱정스러워서 그런다.”

“알아요. 붉은 군대가 쳐들어왔대요. 다 박살 냈대요.”

“붉은 군대? 헬랜드 대왕이 무슨 이유로?”

세라두 가문이 붉은 군대에 의해 박살이 나다니. 왜? 무슨 이유로? 세라두 가문이 군터와 척을 질 만한 일이 있었나. 자신이 알기론 두 세력을 연관 지을 만한 일은 없었다.

“군터가 로랑의 집안을 난도질할 이유가 없잖아?”

오히려 헨리가 로랑에게 물었다.

“네? 그게…….”

로랑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제 오라비에게 마리아를 죽이라 사주했으며 그것이 실패하여 보복당한 거라고 어찌 말할까. 그랬다간 헨리가 크게 화를 내고 말 텐데.

“있……었나 봐요. 숨겨 놓은 빚 같은 거…….”

로랑은 대충 얼버무렸다. 이 상황에 진실이 밝혀지면 곤란했다. 헨리는 마리아를 통해 크게 한몫 잡으려는 계획으로 잔뜩 부풀어 있는데. 그때 낸시가 두 사람을 찾아왔다.

“로랑의 비명에 놀라서 왔어요.”

낸시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로랑과 헨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러자 헨리가 낸시를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헨리는 낸시와 로랑의 사이가 안 좋아서 걱정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로랑의 집에 일이 있나 보다.”

“일이요?”

헨리가 간략하게 설명하자, 낸시는 의구심에 찬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군터 플레이슬리, 그 사람을 좀 아는데요. 단순히 빚을 안 갚았다고 무작정 불을 지르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닥쳐!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로랑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낸시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야만적인 짐승들을 왜 편들어?”

“하긴, 군터 그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긴 하지.”

헨리가 로랑의 편을 들자, 낸시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또 모르죠. 누군가가 폐황후를 죽이려고 했을지도. 그런 게 아니면 군터도 그렇게까진 잔혹하게 굴지 않아요.”

“그럼, 우리 가문이 폐황후를 죽이려 했다는 거야?”

로랑이 당황했는지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한데 헨리의 반응이 더 놀라웠다.

“누가 마리아를 죽여? 그럼 안 되지!”

“아……니에요. 하지 말아요. 오해.”

로랑은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낸시, 함부로 우리 가문을 흠모하지 마!”

“흠모가 아니라 모함이라고 해야지. 그래, 낸시 그건 너의 비약이다.”

헨리가 낸시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그리 영악하지 않은 로랑이 폐황후를 죽일 배포가 어디에 있다고. 이렇게 단어의 뜻도 제대로 모르는 여자인데. 게다가 대륙의 귀족이나 황족 중에는 저 말고도 군터에게 빚진 사람이 아주 많다고 들었다. 그러니 빚을 갚지 못해 보복당한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죄송해요. 제가 지나쳤어요.”

낸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대답했다.

* * *

군터는 몇 시간째 마리아를 찾으러 다녔다.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 살폈다. 심지어 마리아가 납치되었던 궁의 외곽까지 갔었다. 그런데도 마리아의 코빼기조차 볼 수가 없었다.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스톤의 방으로 향했다.

“웬일이야? 먼저 나를 다 찾아오고.”

사실 스톤이 노인이 된 후부턴 군터는 그를 잘 찾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였을 때와의 괴리감 때문일 테지. 군터는 말없이 방 안을 살폈다. 스톤이 라모나에게 공부를 가르치는지 책상에 아주 많은 책이 쌓여 있었다.

“마리아, 안 왔나?”

“나도 마리아 보고 싶다.”

스톤의 너스레에 군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갔다. 괜스레 노인네와 입씨름하기도 싫고 그럴 기분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군터가 방을 나가자, 스톤의 방 곳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아는 커튼 뒤에서 나왔고, 에로는 옷장 속에서 튀어나왔으며, 노라는 어기적거리며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굳이 이래야 해?”

에로는 치맛자락을 다듬으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중에 군터에게 혼날 일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마리아 입장에선 화날 만하잖어?”

노라는 무조건 마리아의 편이었다.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은 당사자가 갚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니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해 줄 수 있는 일의 정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원래, 무식해서 그래.”

스톤이 쐐기를 박듯 노라의 편을 들어 주었다.

“다들 잊었어요? 마리아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난 후에 대왕이 어땠는지?”

에로는 며칠간 정신을 잃었던 군터의 상황을 마리아에게 말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급한 마음에 스톤의 방문을 열려는 금기를 범하기도 했다고 전해 주었다.

“마리아를 너무 걱정해서 그런 거야. 대왕의 마음도 몰라주고.”

“몰라주는 게 아니야.”

마리아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평생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면 굳이 희망은 품어서 무엇 할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면 될 것을. 어차피 제 보호자가 다 해 줄 텐데.

“마리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도 돼요, 스톤?”

“왜 나한테 물어봐? 군터를 설득하는 일도 마리아가 할 몫인데. 해낼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떼만 쓰지 말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시켜야지.”

“!”

스톤의 말에 마리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지, 자신은 무작정 군터에게 제 의견을 왜 안 들어주느냐고 화내며 떼만 썼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를 먼저 이해시켜야 하는데.

“마리아의 머릿속에 있는 계획, 이루고 싶다면 군터라는 산부터 넘어 봐.”

자신이 간과하고 있었다. 군터는 무엇이든 제 말을 들어줄 거라고. 그건 결국 저 자신도 그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며 오만했던 거다.

마리아는 스톤의 방에서 나와 회랑 쪽으로 걸어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정리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나름대로 반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군터와 차근차근 이야기해야지. 마리아는 더는 피하지 않고 군터를 만나러 갈 참이다. 결심이 선 이상, 주저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지려는 찰나, 우악스러운 손이 뒤에서 마리아의 얼굴을 감쌌다.

“읍……!”

마리아가 아무리 저항하며 버둥대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거대한 힘에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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