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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51화 (51/120)

51화

군터는 숨을 죽인 채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달싹거리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후!”

마리아는 말하기를 멈추곤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만큼은 감정을 조작하여 현혹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제 복잡한 심경을 그가 이해할지 답답했다.

“저는 헨리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어요.”

“!?”

“서로를 존중하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어느 정도의 일탈은 눈감아 줄 수 있으면, 그것이 부부간의 신뢰고 사랑이라 여겼거든요.”

“마리아, 좀 이해하기 어렵군.”

군터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놓치고 싶진 않았다.

“미안해요. 너무 거창했죠?”

저조차 말하면서도 복잡한데, 군터가 알아듣기 바라는 건 욕심일 것이다. 그가 직관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말해 줬어야 했는데.

“헨리가 로랑과 사랑에 빠졌을 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황후의 의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군터가 대마녀와 키스하고 밤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쌓여 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와르르 무너져?”

“후! 그러니까 군터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대마녀의 머리채를 잡고 싶었고요. 만족해요?”

“아하! 이해가 확 된다.”

군터는 하얀 치아가 다 드러날 정도로 호탕하게 웃었다. 질투가 없는 건 상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증거니까. 한데 마리아는 자신과 사만타가 키스할 때 분명 화가 나 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마리아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아는 나를 좋아해.”

군터는 갑자기 웃음기를 지우곤 진지하게 말했다. 순간 마리아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제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당혹스러워했다.

“맞아요.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군터를 좋아해요.”

그녀의 대답에 군터는 마리아에게 키스했다. 하지만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가선 안 될 터. 마리아는 입술을 떼곤 그에게 부탁했다.

“내가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좋아.”

“정말이에요? 고마워요.”

“다만.”

“다만? 그게 뭔데요?”

“너의 모든 계획과 실행에 나를 배제해선 안 돼. 나는 늘 네 곁에 있을 거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군터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더불어 군터는 마리아가 세우는 계획의 세부적인 내용도 자신에게 알려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다. 애초에 마리아의 독단적인 행동 자체를 막겠다는 뜻일 터.

“복수하든 뭘 하든 간에 우리 국혼은 예정대로 한다.”

군터가 마리아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알아요. 외교 사절단을 다 초대하진 못해도 해야겠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너의 뜻을 존중할 테니. 그 대륙법인지 뭔지, 외교적 노력, 무시하지 않으마.”

군터는 여전히 마리아가 굳이 헨리와 이혼하려는 이유가 와닿지는 않으나, 그녀의 말대로 헬랜드가 한 나라로 인정을 받으려면 무작정 제멋대로 국정을 처리해선 안 된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고마워요, 군터.”

스톤의 말대로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을. 마리아는 대화로도 충분히 군터와 이견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제 고집만 피운 것 같아 부끄러웠다.

“마리아, 첫 번째 계획은 뭐지?”

군터는 마리아가 현재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무언지 궁금했다. 세라두 가문이야 랑데스에서 없애 버렸으니 어느 정도 복수는 끝난 셈이니까. 하지만 마리아의 생각은 좀 달랐다. 로랑은 세라두 가문이 헬랜드의 붉은 군대에게 멸문당하다시피 했으니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여길 테지만, 그건 그녀의 계산일 뿐. 제 복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대놓고 칼을 들이대는 건 참 너다웠어, 로랑.’

아니면 제 오라비의 능력을 과신했거나. 때론 칼이 아닌 돈이 더 무서울 때가 있음을 제대로 알려 줄 참이다.

“내가 맞혀 볼까?”

군터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신도 마리아의 계획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맞혀 봐요.”

“헨리 왕의 정부. 가슴이 아주 크고 콧소리를 내며 말을 귀엽게 하는 여자였는데. 꽤 예뻤지 아마? 애교도 많고 말이야.”

“!?”

일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군터는 한껏 알은척을 했다가, 서서히 굳어지는 마리아의 얼굴을 보곤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군터가 로랑을 아주 잘 아네요?”

오랜 시간을 돌아 자신을 찾으러 라스토니아로 왔다고 하지 않았나? 10년간 오로지 한 여자만 원했다고 했는데, 저 아닌 로랑의 특징을 아주 줄줄이 외워 대는 꼴을 보니 기가 막혔다. 더구나 평가도 후했다.

“나를 찾아왔었다.”

“찾아와요?”

“밤에 내 침실로 왔었지. 하지만 그게…….”

게다가 군터는 눈치도 없었다. 마리아는 그대로 일어나 옷을 입고 침실을 나가 버렸다. 더 이상 들을 말이 없었다. 자신은 사촌 오라비인 에이든과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게 하면서 정작 군터는 눈으로 즐길 건 다 하고 있다니.

* * *

마리아는 스톤의 방에서 다과를 즐겼다. 물론 그 자리에는 군터와 솔샤르를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라모나는 제법 궁 생활에 적응하여 다과 시간이 되면 알아서 차를 대접하고 대화에도 곧잘 참여하곤 했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요.”

마리아는 자신이 앞으로 어떤 계획을 실행할 건지, 스톤과는 미리 상의했다. 하지만 혼자 이루기엔 힘든 일이기에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저를 죽이라고 사주한 헨리 왕, 그러니까 제 전남편의 정부를 그냥 둘 수 없어요.”

“어떻게 그냥 둬? 요절을 내 버려야지.”

노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씩씩거렸다.

“마리아, 어떻게 할 건데?”

에로가 궁금한지 두 눈을 반짝거렸다.

“선물을 보내려고 해.”

“선물? 아하! 그거!”

모두 마리아가 보낼 선물이 무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리아의 심각한 표정은 여전했다.

“로랑 세라두에게 알려 줄 거예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지, 더불어 제 남자한테도 외면당하는 기분이 어떤지……. 절망만 존재하는 나락으로 가차 없이 던져 버릴 겁니다.”

마리아의 말에서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려면 라스토니아 황실에 우리 사람을 심어 둬야 해요.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고 정보를 보낼 수 있는 세작이 필요하죠.”

하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노라는 왕궁에 관해 아는 것이 없고, 일단 눈에 너무 잘 띈다. 그렇다고 에로가 하기에는, 아니 궁인 심사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컸다.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 줘요.”

“제가 할게요.”

마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모나가 손까지 들며 대답했다. 곧 모든 시선이 분홍빛 머리에 요정같이 생긴 라모나에게로 향했다.

“로랑 세라두라면…….”

라모나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어릴 적 로랑이 자신에게 했던 만행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대략 알고는 있었으나 그녀의 입으로 듣게 되니 제 일이 아닌데도 울분이 북받쳤다.

“라모나의 뜻은 알겠어. 하지만 궁에 있기엔 외모가 너무 튀어.”

스톤이 치유한 라모나는 누가 보아도 요정이었다. 뾰족한 귀에 분홍색 머리, 인형 같은 이목구비까지. 그런 시녀가 궁을 돌아다니면 로랑의 손에 먼저 죽게 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때 라모나의 시선이 스톤에게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도와주세요.”

라모나의 말에 다른 이들도 덩달아 스톤을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이 할애비와 약속하면 도와주마.”

“정말이요? 뭔데요?”

“라모나, 다치지 말고 무사히 이 할애비한테로 돌아와야 한다.”

스톤의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기어이 라모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스톤의 품에 안겼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 간의 정이 깊어진 듯했다. 스톤은 라모나가 여태껏 불행하게 살아왔기에 앞으로는 편안하게 살길 바랐다. 물론 라모나가 정령과 인간의 혼혈이라서 더 마음이 쓰이고 측은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더 필요해요.”

“이번에는 무슨 역할인데?”

에로가 신이 나서 물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를 유혹할 수 있는 빼어난 외모와 대륙의 정세를 꿰뚫는 혜안, 방대한 정보력과 인맥을 지닌 젊은 대부호.”

하지만 이마저도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도 했다. 마리아가 맨 처음 떠올린 사람은 단연코 에이든이었다. 하지만 그는 라스토니아에 얼굴이 꽤 알려진 터라 저들을 속이기엔 무리였다. 물론 솔샤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군터의 옆자리를 지킨 부관이기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잖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스톤에게 도움을 청할 참이었다.

“내가 하면 안 돼?”

에로가 라모나를 흉내 내며 손을 들어 올리곤 말했다. 하지만 마리아를 비롯하여 노라조차도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에로가 비록 성은 남자지만 누구보다 여자다웠다. 그런 습관이 강하게 배어 있는데……. 게다가 그녀에게 잠시나마 완벽한 남자가 되어 살라는 건, 무리한 요구였다.

“에로, 뜻은 고마운데 안 될 것 같아.”

“왜? 내가 못 해낼까 봐?”

“아니, 너의 정체성을 거스르는 일이니까. 누구보다 여자이길 원하는 너인데, 내가 어떻게 남자가 되라고 해?”

“마리아, 나도 내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단순히 시험이 아니야. 나는 그들에게 복수하려는 거야.”

그러니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에로에게 일깨워 줘야 했다. 하지만 에로의 뜻도 강경했다. 친구인 마리아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건 당연하고, 자신도 절대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을 하고 싶노라 말했다. 마리아는 고민이 깊어졌다. 누차 에로에게 반대의 뜻을 말했지만, 그녀의 뜻이 매우 완강했다.

“마리아, 남자인 에로도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보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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