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53화 (53/120)

53화

라모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낸시를 향해 말했다. 마리아의 말대로 낸시는 사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촘촘하게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귀족의 시중을 든 탓에 생긴 버릇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자신의 상전을 찾아온 사람을 제 선에서 파악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제 언니는 오래전 로랑 세라두 백작 영애의 시녀로 일을 했었는데, 몹쓸 짓을 아주 많이 당했어요.”

라모나는 마치 제 일이 아닌 양, 구구절절 예전의 일을 이야기했다. 낸시도 처음에는 과도하게 경계를 하는 듯하더니 점점 라모나의 말에 경청했다.

“로랑한테 원한이 있었구나. 그럼 언니는 지금……?”

“몸과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점성술사가 되었습니다.”

“점성술사?”

뜻밖의 대답이었다. 동시에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의 말을 덥석 믿어선 안 되기에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언니의 점괘에 따르면 로랑 세라두는 곧 황궁에서 쫓겨날 거라고 했어요.”

“뭐라고?”

그제야 낸시는 의자에서 등을 떼며 반색했다. 늘 바라던 일인지라 거짓이라도 왠지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뭔데?”

“비천한 출신이나 영특한 두뇌와 지략을 가진 여자가 황후가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아크만 부인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황궁에 시녀로 들어왔을 때, 이곳으로 배정을 받아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낸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흥분을 지우며 침착하려 노력했다. 자신이 나이가 어리긴 해도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인간은 아니었다.

“일단 내 시녀로 일하도록 해. 네 언니의 점괘가 맞는지 지켜보면 알겠지.”

“예, 아크만 부인.”

로랑이 곧 황궁에서 쫓겨난다니, 그렇게만 된다면 라모나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긴 사나운 성질을 가진 터라 여기저기에 원한 살 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헨리만 모를 뿐이지.

라모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녀는 제 숙소로 돌아와 스톤이 준 종이에 현 상황을 기재한 후, 불에 태웠다.

‘로랑 세라두, 네가 내게 했던 만행은 모조리 갚아 줄 거야.’

라모나의 눈이 매서워졌다. 한편 스톤의 손에 불꽃이 파르르 타오르더니 점점 잦아지며 종이 한 장이 쥐어졌다. 라모나가 소식을 전한 것일 터. 라모나가 헬랜드를 떠나기 전, 스톤은 몇 가지의 마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정도는 딱히 마법 축에도 들지 못하지만, 라모나가 곧잘 해내는 것이 기특했다.

“라모나가 보낸 건가요?”

마리아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러자 스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낸시 아크만의 시녀가 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는군. 마리아가 지시한 대로 했더니 조금씩 경계를 풀었대.”

스톤의 대답에 마리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낸시, 네가 나를 잘 알듯이 나도 너를 아주 잘 안단다.’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긴 했으나, 두 번은 당하지 않을 참이다. 이번에는 제 손에 도끼가 들려 있기 때문이다.

‘낸시, 나는 너를 황후로 만들어 줄 거야.’

마리아가 거머쥔 주먹을 부르르 떨자, 손등 위로 심줄이 튀어나왔다.

* * *

마리아와 군터의 국혼식 날이었다. 왕궁 내에서 조촐하게 열리긴 했으나 마리아의 바람대로 외국의 대상단주들과 여러 학교의 학장들을 귀빈으로 초대했다. 아직 헨리와 이혼이 안 된 상태라 귀족이나 황족들은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등이 훤히 파인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는 붉은 드레스 자락을 붉은 깃털로 장식하고 목과 상체 부분에는 빛나는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걸쳤다. 누가 보아도 북부의 붉은 용, 군터 플레이슬리의 아내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귀빈 중에는 마리아가 라스토니아의 황후였음을 몰라보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예전의 마리아가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기운을 뿜어내는 황후였다면 지금은 강단 있는 여장부처럼 인상이 매우 강렬했다.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데는 등에 새긴 붉은 용 문신이 크게 한몫했다. 세상의 어떤 황후나 왕비도 이런 문신을 등에 새기지는 않을 테니까. 한데 참으로 신기한 건, 그것이 흉하거나 천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자임에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함이 풍긴달까.

“아름답다, 마리아.”

군터는 마리아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며 말했다.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넌 내 아내이자, 헬랜드의 왕비다.”

“군터는 제 남편이자, 위대한 헬랜드의 대왕이고요?”

“남편이라……. 내가 마리아의 남편이라니.”

군터는 아주 오랜 세월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니 만감이 교차했다. 두 사람은 동등하게 식장에 입장하여 모든 내빈에게 부부임을 공표했다. 마리아는 몇 개월 만에 바뀌어 버린 제 운명이 믿기지 않았다. 제 주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건만, 이제는 자신의 국혼을 감격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노라와 에로, 스톤 그리고 제이미, 솔샤르가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가식이나 시기와 질투는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서운한 것이 있다면 제 부모님과 오라비들이 참석하지 못한 거지만, 차차 이룰 것이기에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으니 서글퍼할 여유가 없었다. 드디어 혼인 서약을 할 차례였다. 군터와 마리아는 용 반지를 나눠 끼곤 서로에게 평생 지켜야 할 약속에 관해 서약했다.

“군터, 잊지 말아 줘요. 저는 왕비이기 전에 당신의 아내이고 여자라는 사실을.”

마리아에겐 많은 뜻이 담긴 말이었다. 자신은 황후로만 살았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여자로 존중받지 못했다. 그로 인해 아주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

“당연하다. 하지만 나에 대한 마리아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믿음 그리고 사랑이 필요하다.”

군터는 마리아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거창한 말로 조건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이, 자신이 그녀에게 원하는 건 오로지 ‘사랑’ 하나였다.

“군터, 당신이 사막으로 저를 찾으러 왔을 때 알았어요. 제가 평생 믿을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

“그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마리아는 감격에 젖어 목소리를 떨었다. 헨리가 자신을 나락으로 던졌을 때, 제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군터였다. 마리아는 가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묘한 불안감도 동반됐다. 그건 아마도 새로운 시작을 앞둔 설렘이겠지. 무엇보다 제 의지로 선택한 첫 번째 인생이기도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님과 가문이 정해 준 대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앞으로는 스스로 고민하여 내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터.

두 사람은 진한 맹약의 키스로 모든 이에게 부부가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내 식장 안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화려하고 거창한 국혼이라기보다는 다소 시끄럽고 산만하지만 진실한 축하와 기쁨이 넘쳤다.

* * *

밤에는 예식보다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모두 기뻐하며 술과 음식을 즐겼고, 악공들이 신나는 연주를 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짝을 지어 춤을 추었다.

“왕비님, 경하드립니다.”

노라와 에로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이전처럼 편하게 대해도 돼요.”

“그럴 순 없습니다. 왕비님은 헬랜드 왕실의 체계를 바로 세우셔야 합니다.”

노라가 아주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마리아도 그 생각에는 동의했다. 허물없이 구는 것이 친근함의 표현이긴 하나, 그녀의 말대로 자신은 헬랜드의 왕비로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노라, 에로.”

“예.”

“나의 시녀로서 충성을 맹세하느냐?”

“이 목숨 다 바쳐 왕비님께 충성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이전과 달리 엄숙한 태도로 두 사람을 대했고, 그들은 고개를 숙이곤 마리아의 반지에 입 맞췄다. 그것을 계기로 노라와 에로는 헬랜드의 초대 왕비인 마리아의 정식 시녀가 되었다.

한편 군터는 각국에서 초대된 대상단주들과 심각하게 대화 중이었다.

“라스토니아 황실의 재정이 엉망입니다.”

“그런가?”

“예, 귀족들을 억압하여 무리하게 세금을 뜯어내는 바람에 제국민들이 많이 이탈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곧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선황후라는 여자도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 펑펑 써 대는 바람에…….”

“헨리 왕은 현재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죠.”

“이게 다 전에 있던 황후를 폐위한 결과입니다. 그분이 계실 때는 황궁 사정이 나쁘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라스토니아의 폐황후이며 현재 군터의 비인 줄 모르는 늙은 상단주가 열변을 토했다. 이내 곁에 있던 다른 상단주가 귀띔을 해 주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왕, 진실로 경하드리옵니다.”

“고맙네.”

군터는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마리아의 분위기가 예전하고 많이 달라지긴 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못 알아볼 수도 있을 터. 그때 마리아가 군터를 향해 다가왔다.

“마리아, 인사하지. 대륙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분들이야.”

군터는 마리아에게 대상단주들을 인사시켰다. 그들은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한 채 마리아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라스토니아의 비극적인 사건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되레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 갔다. 얼마 뒤, 귀빈들이 자리를 뜨고 마리아는 군터와 잠시나마 둘만 남게 되었다.

“대왕,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도 군터에게 예의를 차렸다.

“뭐지?”

“저는 이번 라스토니아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사실 마리아가 다시 라스토니아로 돌아가 헨리와 마주치는 일은 그다지 유쾌한 상황은 아니니까. 단순한 질투 때문이 아니라, 혹여 그녀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상처가 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대신 제 청을 들어주세요.”

“청? 말해 봐, 마리아.”

“대왕의 신하 중에서 가장 험악하고 무식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놈들 한두 명이 아니라서.”

“더불어 고집이 세고 어떤 상황에도 배신하지 않는 강한 충성심이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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