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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54화 (54/120)

54화

라모나가 품 안에 무언가를 감춘 채 낸시 앞에 섰다. 그녀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불안한 내색을 보이더니 이내 낸시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뭔데?”

“로랑 세라두 영애의 침실에서 몰래 가져왔어요.”

“뭐라고?”

낸시는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저 자신도 어릴 때부터 시녀로 살아 봤지만, 윗전이 시키지 않은 일을 독단적으로 행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라모나는 달랐다. 지나치게 능동적이랄까.

“훔쳐 왔다는 거야?”

“네. 아크만 부인께 도움이 될 거예요.”

낸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라모나가 건넨 종이를 펼쳤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랑데스 말로 빼곡하게 적혀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로랑 세라두가 제 오라비인 알랑을 사주하여 폐황후를 죽이려 헬랜드로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뭐? 폐황후를 죽여?”

낸시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발각되어 세라두 백작가가 오히려 붉은 군대의 보복을 당했답니다.”

“세상에!”

낸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제 곁에 세작을 심어 마리아에게 숨겨진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더니, 기어이 죽이려 했다니. 하긴 마리아를 죽이면 헨리와 자동으로 이혼이 되고 재산도 날아가 버린다.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그랬단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로랑은 생긴 것과 다르게 아주 무서운 여자였다. 감히 헬랜드로 사람을 보내 마리아를 죽이려 했다니. 아니지, 세라두 가문도 검술로 유명하긴 하니까. 랑데스가 외국과 전쟁이 나면 그 나라의 황제도 세라두 가문에 도움을 청할 정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랬으니 스튜어트 공작가의 성기사들도 맥을 못 춘 것이다.

“근데, 넌 이런 서신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

“언니가 알려 줬어요.”

“아, 점성술사라고 했지.”

“아크만 부인, 이래도 아직 저를 믿지 못하시겠어요? 제 언니의 원한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까지 하겠어요.”

라모나가 울먹이며 말하자, 낸시가 다가왔다.

“아니, 믿어. 그리고 고맙다.”

낸시는 라모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렇지, 어릴 적에 그런 핍박을 받았는데 어떻게 잊을까. 저 같아도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을 터였다. 라모나를 완전히 믿진 못해도, 적어도 같은 편인 건 확실했다. 서로의 목적이 같고 이해타산이 어느 정도 맞춰지면, 그것이 같은 편이지. 오히려 마음을 주며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는 것보다 더 깔끔한 관계였다.

그때였다. 쿠쿵! 콰쾅!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지진이 난 양 사방이 흔들렸다.

“꺅!”

낸시를 비롯한 모든 시녀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엎드렸다. 얼마 뒤, 시종 하나가 달려와 낸시에게 소식을 알렸다.

“아크만 부인, 피하십시오! 붉은 군대가 쳐들어와 본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붉……은 군대?”

낸시는 커다래진 눈으로 라모나를 바라봤다. 역시 그녀의 말대로 로랑이 큰 사달을 내고 말았다. 게다가 며칠 후면 선황후의 연회가 성대하게 열릴 텐데. 일부러 시기를 맞춰서 온 듯했다.

“아크만 부인, 어서 본궁으로 가셔서 폐하의 힘이 되어 드리세요.”

라모나는 이때다 싶어서 낸시를 부추겼다.

“뭐? 그……렇지.”

낸시는 로랑의 편지를 품 안에 고이 밀어 넣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 * *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던 헨리는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굉음과 진동에 얼마나 놀랐는지. 한데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헬랜드의 붉은 병사들이 본궁을 마구 부수며 행패를 부리는 게 아닌가. 게다가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황좌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덩치는 곰처럼 거대하고 얼굴은 흉흉했으며 온몸에는 온통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신이 빼곡했다. 게다가 금으로 만든 두꺼운 쇠사슬을 목과 어깨에 칭칭 감고 있었다. 그는 흉포한 철퇴를 들더니 허공에 빙빙 돌렸다.

“너……는 누구냐?”

헨리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타만이라고 하오. 위대한 헬랜드의 대왕께서 보냈소.”

타만이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빛이 번쩍였다. 치아에 금을 덧씌운 듯했다. 또한 그는 커다랗고 화려한 상자에 발을 올려놓은 채로, 라스토니아의 황제인 헨리에게 어떠한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되레 낄낄거리며 황좌에서 연신 엉덩이를 털썩거렸다. 때마침 달려온 황실 근위대가 무기를 겨누자, 붉은 군대도 각자 흉포한 무기를 꺼내곤 그들과 맞섰다.

“무엄하다! 당장, 황좌에서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헨리가 고함을 지르는데도 타만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무시했다. 그는 여봐란듯이 발로 밟고 있던 상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

“받으슈, 선물이외다.”

“뭐? 짐승보다 못한 놈들 같으니.”

진즉에 헬랜드인들이 야만적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도 군터는 왕의 면모를 눈곱만큼이라도 보여 줬건만, 그들의 신하들은 안하무인이 따로 없었다. 아니지, 왕의 면모는 개뿔, 군터가 제 목을 거머쥐며 온갖 수모를 다 주었는데. 한데 타만이라는 사내는 전혀 사람 말을 못 알아먹는 짐승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모니카의 생일 연회에 와 달라고 초대장을 보내지 말 것을.

물론 그마저도 혹시 딴지를 걸까 봐 예의상 보냈던 것인데. 진짜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때마침 선황후 모니카와 로랑, 낸시도 시녀들을 이끌고 대접견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엉망이 된 본궁을 보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중에서도 로랑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선물을 줬으면 열어 봐야지. 왜 안 열어 봐!”

타만은 성질을 내며 철퇴로 옆에 세워 놓은 조각상을 단숨에 부쉈다. 곧 시종과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가져와라.”

헨리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시종들이 타만이 앉아 있는 상단으로 올라가선 상자를 들고 와 헨리 앞에 놓았다.

“열어라.”

헨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하자, 시종들이 뚜껑을 열었다. 순간, 상자 안에서 지독한 약 냄새가 진동했다. 아니, 약 냄새와 썩은 냄새가 섞였다고 할까. 그리고 헨리는 상자 안의 내용물을 보곤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꺅!”

모니카는 상자 안을 보곤 비명을 지르다 졸도했고, 로랑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냐하면 제 오라비와 아버지의 수급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혼이 날아간 사람처럼 멍하니 헨리와 수급을 번갈아 보다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뜻이냐?”

보다 못한 헨리가 타만에게 물었다. 모니카의 생일 선물로 로랑의 오라비와 아비의 수급을 건네주는 이유가 있을 터.

“저 중에서 젊은 대가리가 헬랜드 왕궁에 침입하여 마리아 님을 납치했수다.”

“납치? 무슨 이유로?”

“무슨 이유? 대가리 되게 안 좋네. 당연히 죽이려고 그런 거지.”

“죽여? 마리아를 말인가?”

헨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타만에게 여러 번 되물었다. 감히 제 허락도 없이 저들이 마리아를 죽일 이유가 무에 있다고. 헨리가 로랑을 바라보자, 그녀는 눈물범벅인 채로 도리질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 무언가 오해가 있을 테지.”

“지랄 맞은 소리 하고 있네. 오해는 무슨 오해?”

타만이 버럭 고함을 지르곤, 당시 일어난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알랑 세라두가 마녀들을 매수하여 헬랜드 왕궁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마리아를 납치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남은 재산을 포기하는 각서까지 쓰게 한 후, 절벽 밑으로 밀어 버린 사실까지 전부 이야기했다.

“아니에요! 이건 모함이에요!”

로랑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때만큼은 말도 더듬지 않았다.

“폐황후가 꾸며 낸 일이에요. 내가 미우니까 복수하려고 그런 거라고요!”

“하긴 마리아가 로랑을 미워하긴 했지.”

헨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게다가 마리아는 머리가 좋아서 교묘하게 계략을 짰을 수도 있을 터였다. 헬랜드로 가자마자 군터의 환심을 사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헨리는 제 손바닥을 펼치곤 마리아가 쓴 저주를 되뇌었다.

‘마리아가 나한테 복수하려는 거야.’

아무리 따져 봐도 짐승 같은 놈들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별 이유 없이 살육을 일삼는 야만인들. 자신이 믿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들보다는 응당 로랑이었다.

* * *

마리아는 군터의 허리 위에서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는 마리아의 가슴을 부여잡은 채 짐승처럼 신음을 냈다. 그녀는 제 열망의 표출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군터를 보자, 더 몸이 달아올랐다. 체위를 바꿔 그를 정복하니, 제 좁은 몸 안이 군터로 꽉 채워진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허리를 펴는 것조차 버거웠으나 곧 축축하게 젖은 몸이 맞닿으며 저절로 제 몸이 움직였다.

“아……읏!”

마리아가 고개를 뒤로 떨구며 교성을 질렀다. 섹스가 이렇게 짜릿할 수 있다니. 군터는 매일 밤 자신을 열락으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그의 탄탄한 가슴을 움켜쥐며 좀 더 빠르게 몰아쳤다.

“당신 몸이 너무 좋아.”

예전 같으면 감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부끄러운 말이라 여겼지만, 이젠 마음껏 제 욕망을 표출했다. 군터는 바로 상체를 들어 마리아의 예쁜 과실을 입에 넣곤 단맛을 음미했다. 눈앞에서 출렁대는 광경을 보고 참을 수가 있어야지.

“네 젖가슴은 너무 단데?”

군터는 치열을 드러내며 장난스레 말했다. 한데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웃는 얼굴이 얼마나 관능적인지, 마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쾌감이 몰려들며 절정이 임박했다. 마리아는 제 욕구에 충실했다. 머릿속에는 군터와 온갖 퇴폐적이고 음란한 짓을 하는 상상으로 가득 채운 채 마지막을 향해 달렸다.

“좀 더 세게 해 줘요.”

이내 군터가 아래에서 위로 욕망을 쏟아 냈고 마리아는 그대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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