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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55화 (55/120)

55화

마리아는 군터가 깊이 잠든 사이, 발코니로 향했다. 지금쯤 라스토니아 황실은 발칵 뒤집혔을 터. 헨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 불 보듯 훤하지만, 그 당혹감에 이지러지는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원통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부드러운 비단 이불이 마리아를 감싸며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왜 나를 두고 여기에 나와 있지?”

군터는 자신이 잠든 사이, 자리를 비운 마리아가 야속했다. 언제부턴가 잠결에도 제 옆자리에 그녀가 있고 없음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바람 좀 쐬려고 잠깐 나왔어요.”

마리아는 그대로 돌아서서 군터에게 사랑스럽게 입 맞췄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말을 꺼냈다.

“군터, 어쩌면 저 아이를 갖지 못할지도 몰라요.”

죽어도 제 입에 담고 싶진 않으나, 라스토니아에선 사람들이 자신을 ‘석녀’라 불렀다.

“어쩌면?”

“궁의는 분명 제가 석녀가 아니라고 했지만…….”

“상관없어.”

“상관없지 않아요. 저는 황후로 있던 10년간 황손을 잉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폐위까지 당했거든요. 물론 그 이유는 아주 일부분에 속하긴 하지만요.”

마리아는 불안했다. 남자들이란 제 후손을 보려는 욕심이 몸에 본능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국의 왕이라면 훗날 왕위를 물려줄 자식이 필요할 터. 군터가 헨리처럼 안 되리라는 법이 없으니까.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한다는 감정은 유효기간이 있기에, 군터가 언제까지 제게 미쳐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증을 내기 마련이니까.

“나는 마리아가 낳은 아이가 아니면 필요 없다.”

“그건 제가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가요?”

마리아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결국 군터도 다른 남자들과 별다를 게 없다는 건가. 순간 헨리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후가 젊지 않아도, 석녀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내겐 로랑이 낳은 아이가 아니면 필요 없단 말이야.]

마리아의 폐부에 군터를 향한 실망감이 연기처럼 차올랐다.

‘남자들은 다 똑같구나.’

마리아는 군터를 외면한 채 먼 곳을 바라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군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돌려놓았다.

“본질은 아이가 아니야.”

“저라는 말인가요?”

만약 제 말이 옳다면 군터도 헨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다.”

“?”

“너에 대한 나의 집념 말이다.”

“믿어야 할까요?”

“아직도 모르나? 나는 거짓말 안 한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자체가 제겐 치욕이었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입술이 뜨겁게 맞물렸다.

* * *

자신은 아니라고 우겨 대기만 하는 로랑을 보다 못한 낸시가 나섰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 이번에야말로 로랑을 황궁에서 쫓아내고 말아야지.

“폐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는 못하는 법이에요.”

낸시의 뜬금없는 말에 헨리의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이걸 보세요.”

그녀는 라모나가 구해 온 서신을 헨리에게 건넸고, 로랑은 그 광경을 보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로랑은 허둥지둥 일어나 헨리의 손에 들린 서신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전에 로랑이 이 서신을 보며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의구심이 생겼는데, 그녀가 보여 주지 않아서 유야무야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 서신이 문제의 답이라면 당연히 확인해야 할 터.

“도둑년! 내 방에 들어와 훔쳐 간 거야?”

“로랑, 얼마든지 욕하세요. 제겐 폐하와 황실의 안위가 더 소중해요.”

“둘 다, 입 좀 다물어!”

헨리는 제 앞에서 정신 사납게 싸우는 두 여자를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이내 서신을 쥔 헨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곧 로랑을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로랑, 네가 어떻게?”

“헨리, 설명할게요. 이유가 있어요.”

“짐이 그토록 알아듣게 말했건만, 그사이를 못 참고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이다니.”

헨리는 낸시를 심하게 견제하는 로랑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마리아의 숨겨진 재산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만 제 수중에 들어오면 낸시를 궁에서 쫓아낼 테니 조금만 인내해 달라고 설득했건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무엇보다 마리아를 함부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로랑이 아니었다. 아직 그녀는 제 아내이기에 죽여도 제 허락이 있어야 할 터. 순간 헨리는 로랑을 향한 실망감에 눈앞이 아득했다.

“거시기, 그쪽들이 알아서 대충 얘기가 된 것 같으니, 나는 우리 대왕의 뜻을 전하겠수다.”

이제껏 침묵하던 타만이 황좌에서 일어나 헨리를 향해 걸어왔다.

“!?”

“우리 대왕께선 마리아 님이 세라두 놈들에게 죽을 뻔한 사실에 매우 진노하셨소. 그러니 라스토니아의 황제가 책임을 지셔야겠수다.”

“어떤 책임을 지라는 것이냐?”

사실 대략 예상은 하지만, 제 귀로 들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택하슈.”

“선택?”

“첫째, 원금 1000만 골드에 7할을 얹어 즉시 상환한다. 둘째, 죄인 로랑 세라두를 헬랜드로 압송한다. 셋째, 황제의 오른쪽 눈알을 도려내서 가져온다.”

“뭐?”

헨리는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데 타만이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고르슈. 만약에 이도 저도 싫다면 그때는 우리 대왕께서 친히 붉은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오실 거외다. 그리되면……. 에이, 상상 안 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그때 뒤쪽에서 모니카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을 벌인 사람이 해결해야지. 뭘 고민해. 로랑 세라두를 헬랜드로 보내.”

“선황후 전하! 어떻게 저한테 이래요?”

로랑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너야말로 우릴 감쪽같이 속였잖니? 세상에, 그 순진한 얼굴로 어떻게 폐황후를 죽일 생각을 해. 그것도 정부 따위가 함부로 말이야. 너의 경솔한 짓거리 때문에 우리 황제께서 곤경에 처하셨잖아.”

마리아를 볼모로 보낸 상황에 가만히만 있어도 빚의 상환을 재차 연기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분란 거리를 만든 이유가 뭐냐고. 황후 자리에 눈이 멀어서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우매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니 로랑이 책임지는 건 당연했다.

헨리는 고개를 숙이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곱씹었다. 자신은 로랑을 사랑했을 뿐인데, 어째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기만 하는지.

‘환멸이 나네.’

빚을 갚을 돈은 없다. 그렇다고 제 눈알을 파 줄 만큼 로랑이 소중하진 않다. 세상천지 어떤 황제가 정부가 저지른 일을 처리하려 희생을 자처할까. 남들이 보기에도 비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이다. 차라리 다 거부하고 군터의 군대와 전쟁이라도 치를 병력이 된다면 좋으련만, 현재 라스토니아는 말이 좋아 제국이지, 작은 공국보다 못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형편없는 상태였다.

“짐은 로랑 세라두를 헬랜드로 보……낼 것이다.”

“헨리!”

* * *

마리아와 군터는 라모나가 보낸 서신을 보며 라스토니아에서 일어난 상황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라두 가문의 여자는 헬랜드에 오는 즉시 사막에 던진다.”

군터의 결정은 확고했다. 하지만 마리아의 생각은 좀 달랐다.

“저한테 맡겨 주세요.”

“너를 죽이라고 사주한 여자야. 숨 쉬는 것도 용서가 안 돼.”

군터는 여전히 절벽 밑으로 떨어지던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의 통증으로 남아 고통스러웠다. 지금처럼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에도 가끔 당시의 일을 악몽으로 꾸곤 한다. 그 발칙한 여자가 제 삶의 이정표를 무참히 짓밟아 놓으려 했건만, 어떻게 살려 둘까.

“알려 주고 싶어요.”

“뭘? 무얼 잘못했는지 말이냐?”

군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죄악이 잘못인 줄 모르는 인간에게 그런 노력조차 소용없는 것을.

“아뇨.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똑같이 돌려주고 싶어요. 그다음에 책임을 물어도 늦지 않아요. 그러니 제게 맡겨 주세요.”

마리아는 간절한 얼굴로 군터에게 읍소했다. 하긴 자신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마리아만큼 지옥 같았을까. 정신이 나갔었고 기억이 지워졌으며 여전히 머리 색은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을. 이제야 겨우 조금씩 회복하고 있으니, 마리아의 치유에 도움이 된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해. 마리아는 이제 헬랜드의 왕비니까.”

군터는 마리아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마리아는 군터가 에이든과 정무를 보는 사이, 에로와 노라를 불렀다.

“에로, 곧 라스토니아로 가야 해.”

“어머머! 이젠 제 차례예요?”

에로는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잘할 수 있겠어?”

“당연하죠.”

“라모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에로는 평생을 여자로 살았기에, 얼마 전부터 새로운 신분으로 살기 위해 연습을 시작했다. 특히 남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냥 남자가 아닌, 교양과 지성을 겸비한 귀족 남자가 되는 법을 배웠다. 마치 연극을 하는 배우처럼 가상의 존재를 연기해야 했다. 한데 문제는 그들을 완벽하게 속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서, 그놈의 어머머는 하지 말어.”

노라가 걱정되는지 잔소리를 늘어놨다.

“염려 말아요. 실은 저 예전부터 유명한 극단의 배우가 되고 싶었거든요. 이제 그 꿈을 이룰 때가 되었어요.”

“배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자칫하면 네년 목이 날아간단 말이여.”

발 연기를 해도 상관없는 연극이라면 참 좋으련만. 노라는 에로가 걱정되는지 얼굴이 어두웠다. 그때 마리아는 탁자 위에 여러 장의 초상화를 펼쳐 놓았다. 시간 날 때마다 열심히 그린 것이었다.

“하나같이 꽃미남이잖어.”

노라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죠? 이게 선황후의 남자 취향이에요.”

“왕비님, 여기 있는 놈들보다 우리 에로가 훨씬 잘생겼네요.”

“맞아요.”

마리아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에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에로는 마리아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나는 반드시 선황후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어요, 왕비님.”

에로는 비장한 얼굴로 마리아에게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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