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에로는 헬랜드를 떠나기 전, 솔샤르와 만났다. 미리 제 계획에 관해 언질을 해 둔 터라 그도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한 듯했다.
“에로, 이번 일은 단순한 연극이 아니야.”
“알아요.”
“완벽하지 않으면 네 목숨이 위태로울 거다.”
솔샤르의 염려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로는 저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비단 친구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겐 모험과 같은 일이었다.
“부관님, 저는 헬랜드에 오기 전에 숲에서 살았어요.”
“숲? 집이 그곳에 있었나?”
“네, 그래서 숲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여지없이 사람들은 숲에 찾아왔고, 제 정체는 발각되고 말았죠. 그때 제가 느낀 암담함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부모님께 떠밀리다시피 하여 광산까지 흘러 들어간 게 전부였다. 결과적으론 마리아를 만나는 행운이 있었지만.
“안주하고 싶지 않아요.”
“?”
“노라는 노예로 팔려 간 자식들을 되찾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고, 라모나는 어릴 때 자신을 핍박한 사람한테 복수하고 있어요. 그리고 왕비님도 여러 가지의 일을 하고 계시죠. 그러니까 저도 방법을 찾아야 해요.”
솔샤르는 에로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가 무얼 말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자신이 바라는 일이 무엇이고 잘하는 건 어떤 일이지, 최종적인 꿈은 무엇인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가고 싶은 것이다. 아주 오래전의 저 자신처럼. 노예로 살 때는 주인의 명령만 따르면 되었으나 막상 자유인이 되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방황했었다. 그때 제게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준 이가 군터였고 방향을 알려 준 사람은 교황 리베리오였다.
“제 몸이 남자라서 할 수 없고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저도 마리아 왕비님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모든 것을 제 발아래 놓고 군림하던 여자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는 흙바닥이 전부인 양 살 수 있으나, 하늘을 나는 매는 바닥에 떨어지면 죽기 마련이다. 말문은 막히고 가족은 사라졌으며 그녀에게 남은 건 오로지 몸뚱어리 하나였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나 여기까지 왔다.
물론 군터라는 등불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긴 하나, 저였다면 과연 극복해 낼 수 있었을까? 종종 질문을 던지곤 했었다.
“제게 불가능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래야 솔샤르 님 곁에 오래오래 있을 수 있잖아요?”
강해져야만 지킬 수 있는 사랑이란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솔샤르는 촉촉하게 젖은 에로의 눈을 보곤 살며시 다가가 안아 주었다.
“그래, 남과 다른 사랑을 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충분히 진실하고 심지어 운명적인 사랑도 할 수 있지.”
하지만 솔샤르는 에로가 걱정됐다. 아직 헤엄도 못 치는 아이를 강에 던져 놓곤 살아남길 기도만 하는 것 같았다. 솔샤르는 에로를 품에서 잠시 떼어 놓은 뒤, 부츠에 꽂아 두었던 단검을 뽑았다.
“호신용이다. 나처럼 항상 부츠에 꽂아라. 내가 위험할 때마다 번번이 목숨을 살려 준 단검이야.”
“그런 걸 저한테 막 주셔도 돼요?”
“매번 칼날을 벼려 놓긴 했지만, 그 단검을 쓰지 않은 지 꽤 오래됐거든. 나보다는 네게 필요할 거야.”
“고마워요. 부관님.”
에로는 솔샤르의 뺨에 살포시 입 맞췄다.
* * *
낸시는 로랑이 헬랜드로 끌려간 뒤, 되도록 헨리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모니카의 생일 연회 준비에 매진했다. 하지만 이번 연회는 아주 소박할 것 같아 걱정이었다.
‘돈이 많이 부족해.’
그렇다고 당장 헨리를 찾아가 돈 얘기를 꺼낼 상황도 아니었다. 이럴 때 제게 여윳돈이라도 있다면 헨리와 모니카의 환심을 살 수 있으련만. 시녀 출신인지라 돈 많은 인맥이 없다는 게 단점이었다. 더구나 모니카를 즐겁게 해 주던 정부들도 모두 떠난지라 그녀의 신경질이 날로 심해진 것도 문제였다.
“저기, 아크만 부인.”
때마침 라모나가 낸시에게 다가갔다.
“라모나, 무슨 일인데?”
낸시의 어조가 사뭇 다정했다. 정말이지, 라모나가 아니었다면 로랑을 황궁에서 쫓아내지 못했을 터. 그녀의 공이 컸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인데?”
“이번 선황후 전하의 생신 연회 초대장이 한 장 필요해요.”
“그래? 누구한테 주려고? 혹시 이번에도 네 언니의 점괘인 거야?”
라모나는 이때다 싶어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점괘는 아니고, 언니와 잘 아는 사람인데 북서쪽의 신생국 키르탄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키르탄? 처음 듣는 나라인데?”
“많이 모르실 거예요. 아주 변방에 있는 나라여서. 그 나라도 헬랜드처럼 마석이 쏟아져 나와 부자가 됐거든요. 한데 그곳 왕자님이 이번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 하셔서.”
북서쪽의 작은 부족에 불과했는데 마석이 매몰된 광산이 발견되는 바람에 왕국이 되었노라 말했다.
“키르탄의 왕자가?”
“네, 가난한 나라였을 때부터 저희 언니와 인연이 있었대요.”
‘졸부네. 갑자기 부자가 됐으니, 과시하고 싶기도 하겠지.’
낸시가 라모나를 향해 한껏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저만의 부자 인맥을 만들 수 있을 듯싶었다. 한데 라모나가 뜻밖의 말로 낸시를 놀라게 했다.
“그 왕자님, 돈이 엄청 많으시거든요. 라스토니아 사교계에 데뷔해서 인맥도 만들고 투자할 곳도 찾고 계신다고.”
“그래?”
이런 것을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하는 건가. 키르탄 왕자를 헨리와 모니카와 연결해 주면 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신중해야 했다. 자칫 소개만 해 주고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으니까.
“이건 왕자님이 아크만 부인께 드리라고 했어요.”
라모나는 커다란 붉은 벨벳 주머니를 낸시에게 건넸다. 왠지 주머니에서 돈 냄새가 풀풀 난다 했더니, 역시 풀어 보니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게다가 순도가 높은지 광채가 번쩍번쩍했다.
“이런 거금을 왜 나한테?”
“인맥을 트는 거죠. 황실에서 아크만 부인이 실세니까. 이젠 로랑 그 여자도 없잖아요.”
“실세?”
낸시는 쏟아지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시종장한테 쪽지를 써 줄 테니, 가서 초대장 받아 와.”
“고맙습니다. 아크만 부인.”
역시 인내하는 사람한테 기회가 온다는 말이 딱 맞았다. 당장 황후가 되고자 안달복달하던 로랑과 달리, 묵묵히 준비했더니 이런 천운이 따르기도 하니 말이다. 따져 보면 자신은 황후의 자리보다는 헨리의 관심과 애정이 더 소중했다. 그런 이유로 마리아도 배신한 거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헨리를 열심히 사랑하다 보면 지금처럼 행운은 저절로 뒤따를 터. 왠지 제 앞날에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라모나는 미소를 띤 채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머물던 꾸며진 웃음은 수증기처럼 금세 증발해 버렸다. 라모나는 로랑이 헬랜드로 끌려가기 전날 밤에 그녀가 갇힌 감옥에 찾아갔었다. 로랑 세라두가 기억하는 라모나 테일의 진짜 모습을 한 채로. 물론 스톤이 가르쳐 준 간단한 마법으로 문 앞을 지키는 시위들을 잠재운 뒤 어렵지 않게 감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네가 어떻게?]
예상대로 로랑은 마물이라도 본 양 놀란 얼굴이었다.
[너의 참혹한 끝을 보고 싶어서 왔어, 로랑 세라두.]
라모나의 말에 로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내 그녀는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혹시 너야? 내 침실에서 서신을 훔쳐 간 사람이?]
[응. 나쁜 사람은 천벌을 받아야 하니까.]
로랑은 입만 벙긋거리며 정작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을까. 저 분홍 머리를 나풀거리고 다녔다면 분명 제 눈에 띄었을 텐데. 혹시 변장이라도 했던 건가.
[로랑, 너 그 버릇 여전하더라? 중요한 물건이 생기면 조각상 머릿속에 숨겨 놓는 거 말이야. 그래서 찾았어.]
저 같았으면 당장 태워 버렸을 텐데. 하지만 로랑은 예전부터 자신의 만행을 전시하고 간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안심해도 될 때쯤 그것들을 꺼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칭찬하는 못된 습관의 소유자였다.
[너는 헬랜드에 가면 아주 비참하게 죽게 될 거야.]
라모나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제 얼굴에 화상을 입히고 온갖 괴롭힘을 자행했던 악마 같은 여자.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숨을 쉬는 순간에도 절대 잊지 않았다. 언젠가는 가장 혹독하게 복수하겠노라 다짐하며 버텼다. 한데 이런 날이 오다니. 앞으로 참혹한 운명에 처할 로랑에게 경고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이 북받쳤다.
[너같이 불길한 계집애는 진즉에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로랑은 미친 사람처럼 라모나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하지만 라모나는 시종일관 미소를 띤 채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로랑이 헬랜드에 가게 되면 마리아라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마리아는 절대 로랑을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제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또한 마지막으로 로랑에게 바로잡아 줄 일이 있었다.
[로랑, 너는 나보다 아름답지 않아.]
[미친 건 여전하네. 이 세상에서 나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는 착각. 그래서 제 주위에 조금만 예쁘다 싶은 하녀가 있으면 해코지도 모자라 완전히 망가뜨려 놓는 악녀. 모든 남자가 자신에게 매혹당하리라는 오만에 빠진 정신병자.
[아니, 난 멀쩡해. 미친년은 내가 아니라 너야. 죽기 전에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
짝! 라모나는 마지막으로 로랑의 뻔뻔한 얼굴을 아주 세게 때렸다. 순간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