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낸시는 연회장을 최대한 화려하게 꾸몄다. 또한 주방에 고급 식자재를 사서 보냈으며, 연회장에 값비싼 꽃장식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니카와 헨리가 입을 예복으로 최고급 양단과 실크로 만든 레이스, 상급의 깃털과 모피도 추가했다. 얼마 뒤 연회장을 본 헨리는 크게 놀랐다. 이번에는 조촐하게 넘어가려 했는데……. 이 호사스러운 장식은 다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때 헨리의 눈에 분주하게 움직이며 궁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낸시가 보였다.
“낸시, 이게 다 뭐지?”
“폐하, 이제 좀 괜찮으세요? 얼굴이 많이 핼쑥해지셨어요.”
낸시는 한달음에 다가가 헨리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저까지 손 놓고 있을 수 없잖아요. 누구든 황궁 일에 앞장서야지요. 당장 내일이면 귀빈들이 들이닥칠 텐데.”
“하지만 돈이 어디서 나서……?”
자신이 주고 싶어도 국고가 간당간당한 상황이라 연회에 쓸 돈이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쓰던 장식품을 이용하고 식자재도 반의반으로 줄이라 했었다. 한데 낸시가 준비한 연회장을 보니 라스토니아 제국이 가장 번성했을 때와 같았다. 마치 마리아의 손길이 닿은 양 작은 것 하나까지 아주 세심하고 완벽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연회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낸시는 불안해하는 헨리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로랑의 일로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에 의심이 가득했다.
“폐하, 로랑 양의 일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해요. 하지만 제겐 폐하와 황실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마터면 헬랜드의 대왕에게 폐하까지 큰 봉변을 당하실 뻔했잖아요. 이 정도에서 마무리된 게 천만다행이에요.”
그녀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헨리를 위로했다. 그가 로랑을 끔찍하게 아끼는 건 알지만 그녀로 인해 큰 사달이 날 뻔했다. 그러니 헨리도 이젠 정신을 차려야지.
“앞으로 황실 내궁의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그러니 폐하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낸시…….”
하긴 낸시가 순수하긴 했다. 그녀가 황후가 되려는 이유도 라스토니아 황실과 저 때문이란 것을 너무 잘 아는 터였다. 허무맹랑하다 타박도 했지만. 더구나 마리아의 곁에서 보고 배운 게 많아서 어떤 일이든 믿고 맡길 만했다. 때마침 모니카가 한껏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
“낸시, 막 내 드레스가 도착했는데 말이지, 그거…….”
“제가 보냈어요. 폐하와 선황후 전하의 예복은 최고 좋은 거로 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헨리와 모니카는 마주 보며 크게 놀랐다.
“아니,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맞은 거야? 이건 정말이지.”
모니카는 화려한 연회장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낸시는 이에 한술 더 떠 말했다.
“선황후 전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뱃놀이도 이미 준비해 놨답니다.”
“그……게 정말이야?”
“후! 낸시, 이젠 솔직하게 말해 다오.”
헨리는 좋지만은 않은지, 얼굴이 구겨졌다. 사실 마리아 몰래 모니카의 씀씀이를 맞춰 주려다가 군터의 돈까지 썼다. 세상에 이유 없는 돈은 없는 법이다.
“제 지인 중에 엄청난 부자가 있는데, 마침 라스토니아에 오셨다지 뭐예요? 폐하와 선황후 전하를 뵙고 싶어 하셔서 내일 연회에 초대했어요.”
“지인이라니?”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리아나 로랑이라면 모를까, 시녀 출신인 낸시에게 대부호 지인이 있다고?
* * *
마리아는 며칠째 학자들과 회의를 하느라 바빴다. 국혼 날, 외국의 대상단주와 저명한 학자들을 초대해 달라고 하더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헬랜드 왕국법을 만들기 위해서 학자들을 포섭 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법학자들이 다들 젊은 남자인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마리아가 의도한 건가.
“헬랜드에서 3년만 일해 주세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마리아는 연신 학자들을 설득했다.
“왕비님, 3년 만에 왕국법을 만들고 행정법에 재판소까지 세우기는 무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상주할 법학자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럼 왕국법을 먼저 만들고 행정 체계를 분리하는 일부터 해 주세요.”
마리아가 간절히 부탁하는데도, 학자들은 모두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때 군터가 불쑥 대화에 참여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잘 만들어 봐. 빈틈없이 아주 튼튼하게 말이다.”
그의 발언에 학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왕비와는 대화가 잘 통하지만, 대왕이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무식 그 자체였다. 법이나 행정 체계를 세우는 건 단순히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닌데, 잘 만들어 보라니.
“대왕, 본디 법이라는 건 오랜 역사를 기반으로 인간의 도덕적 신념과 관습을 학문화시켜 체계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법 조항을 추가하고 개정하면서 만들어 낸 아주 복잡하고 심오한 것입니다. 돈으로 화려하게 짓는 왕궁이 아니랍니다.”
한 학자의 말에 군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생 전장을 다니며 싸움만 한 터라, 학문에 관해선 알지 못했다. 괜스레 무식한 소리를 한 듯싶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버럭 화를 내면 권위만 내세운다 욕을 하겠지. 그때 마리아가 실소를 터뜨리며 학자에게 말했다.
“제 생각엔 대왕의 말씀이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 나라의 국법을 만드는 데는 돈이 필요해요. 그러니 대왕께서 그대들에게 막대한 수고비를 지급하시는 거죠.”
“그렇긴 합니다만…….”
“무엇보다 법이란 건 빈틈없이 그리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야 훗날 왕국민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 거랍니다.”
그제야 학자들은 헛기침하며 무안해했다.
“그대들은 한평생 책으로 세상을 배웠겠지만, 대왕께선 몸소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으신 분입니다. 누구보다 법의 필요성을 아시기 때문에 그런 주문을 하신 거예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내내 듣고 있던 군터가 그제야 마리아를 거들며 학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마침 회의장에 에이든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왕비님,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서류 더미를 가져와 마리아 앞에 놓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학자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리아 주위를 빼곡하게 감쌌다.
“가장 빠른 방법은 헬랜드와 비슷한 나라의 법을 가져와 이곳 사정에 맞게 개정하는 겁니다.”
에이든의 발언에 학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러면 되겠네요.”
멀찍이 떨어진 군터의 눈에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마리아의 모습이 썩 보기 좋은 건 아니었다. 점점 기분이 불쾌해지려는 찰나에, 한 남자가 마리아 옆에 찰싹 붙어서 마주 보며 깔깔대기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남자는 펜을 쥐고 있는 마리아의 손을 자연스레 만지며 펜을 가져가기도 했다. 제 여자와 외간 남자들이 웃고 떠는데도 자신은 방관자가 되어 한마디도 못 하는 상황.
‘그래, 마리아는 저들과 일을 하는 거니까.’
애써 대범하게 유치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려면 굳이 이곳에서 마리아가 일하는 모습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자리를 비워 주는 편이 나았다. 군터는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 * *
군터는 생각 없이 걷다가 회랑 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우연히 스톤을 만났다.
“스톤, 몸은 괜찮냐? 갑자기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서 놀랐다.”
“꼬부랑? 말도 참 고약하게 하네.”
스톤은 피식 웃으며 군터를 타박했다. 하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아기였다가 갑자기 노인이 돼 버렸으니.
“왜 그렇게 얼굴에 심술이 가득하누?”
스톤은 표정이 좋지 않은 군터를 보며 물었다. 예상대로라면 버럭 화를 내며 뭐라 하겠지. 한데 의외로 조용했다. 이내 스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터의 속내가 궁금하긴 해도 굳이 그의 마음을 읽고 싶진 않았다. 한데 군터가 덤덤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나는 속이 좁은 인간 같다.”
“그걸 인제 알았누?”
스톤이 큭큭 웃으며 대답했다. 군터가 전혀 모르고 있을 줄 알았건만 자각하고 있었다니.
“마리아가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돼서 말도 하고, 심지어 헬랜드의 초대 왕비가 되어 여러 일을 하는 게 좋긴 한데…….”
“남과 공유하는 게 싫은 거지?”
“뭐……? 어, 그렇지.”
군터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만 마리아를 오롯이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 그녀가 자신 이외에 다른 것에 과도하게 신경 쓰는 것이 싫었다. 분명 일하고 있는데도 걷잡을 수 없는 질투에 휩싸여 흥분해 버리고 만다. 그래도 대왕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표현할 수도 없다.
“많이,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깊이 사랑해서 그래.”
스톤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내가 사랑을?”
“알면서 왜 그래? 마리아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했으면서.”
“사람이 어떻게 처음 보고 사랑하지?”
군터는 애써 부정했다. 그건 아니라고, 마리아가 좋긴 했어도 보자마자 사랑을 느끼다니. 그건 너무 가벼워 보이고 뭐랄까, 맹추 같다고 해야 할까.
“알고 싶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내 스톤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맴돌았다. 하지만 군터는 절실하게 대답을 원했다.
“너와 마리아는 운명으로 묶여 있으니까.”
“!?”
스톤이 비실비실 웃으며 ‘운명적 사랑’이니 어쩌니…… 하면 화를 내려고 했는데,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해서 군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 군터의 가슴에 뜨거운 열망이 몰아쳤다. 그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실은 말이다.”
“…….”
“마리아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 내가 마리아를 사랑하는 만큼.”
“그건 미친 건데?”
스톤이 낄낄거리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