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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58화 (58/120)

58화

군터가 조용히 집무실을 나가는 모습을 곁눈질한 마리아는 신경이 쓰였다. 회의 내용이 알아듣기 힘들어도 제 곁에 함께해 줬으면 했는데, 무언가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녀는 다급하게 회의를 끝내며 학자들에게 말했다.

“모두 대왕님을 존중하세요. 아니, 존경하세요.”

그녀의 냉랭한 어조에 에이든을 비롯한 학자들은 사색이 되었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군터가 다른 나라의 황제들보다 몇 배로 많은 돈을 주지 않았다면 굳이 헬랜드까지 오지 않았을 터였다.

“여러분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왕님께 무례를 범하거나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시다면 이쯤에서 고국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왕비님, 저희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학자들이 오해가 있노라 변명했지만, 마리아는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자칫 여러분들이 죽을 수도 있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마리아의 대답에 집무실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실은 마리아가 좋은 말로 부탁하는 거라 여겼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군터 플레이슬리가 어떤 사람이란 것을.

“예?”

군터가 두 번은 봐주지 않을 테니까. 마리아는 지성인답게 군터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잊지 말라 신신당부하곤, 그길로 군터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서쪽 회랑에서 스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발견했다. 마음 같아선 선뜻 나서고 싶었으나 진지한 군터의 표정을 본 마리아는 대리석 기둥에 몸을 숨긴 채,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데 본의 아니게 군터의 속내를 듣고 말았다.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군터의 말을 연신 곱씹었다. 군터는 제게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모르는 바 아니지만, 솔직히 저 자신조차 겁이 나는 부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정신없이 빠져든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마리아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군터는 온천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은 벌거벗은 채 온천 앞에서 갈등하는 존재였다. 분명 저 온천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풀리고 추위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물에 들어가면 나오기 싫어질까 봐. 온천에 푹 빠져 매일 목욕하기를 원할 것 같아서 머뭇거리는 거였다. 결국 그를 깊이 사랑하기도 전에 혹여 상처받진 않을지 방어 태세를 높이는 꼴밖에 안 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인정했다. 군터와 자신이 운명으로 엮인 사이라는 것.

‘나도 당신을 많이 좋아해요. 사랑할까 봐 두려울 만큼.’

마리아는 속으로만 고백했다. 그때 스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사랑 앞에서만 용기를 못 내지? 마리아는 나약한 여자가 아니잖아?’

어느새 저만치에 앉아 있는 스톤이 마리아의 존재를 인식했는지 그녀의 마음에 대답을 해 주었다. 사랑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니. 마침 스톤은 자리를 떠났고 회랑에는 군터만이 남았다. 마리아는 커다란 기둥에서 나와 그에게로 다가갔다.

“군터.”

“마리아?”

그는사뭇 놀란 얼굴이었다.

“회의 중에 그냥 나가 버리면 어떡해요?”

“어? 아……. 그게, 스톤하고 할 얘기도 있고 해서. 별건 아니고 왕궁 일에 관한 거였다.”

“아, 그랬군요.”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군터의 긴장한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마리아한테 어떻게 대놓고 말할까. 회의 내용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노라고. 아니, 재미없다고.

“나는 군터 없으면 신경이 쓰이는데…….”

마리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

“회의 때도 군터가 멀리서라도 저를 지켜봐 주고 있으면 안심이 돼요. 없으면 어디를 갔을까 신경이 쓰이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런가?”

군터는 크게 웃음이 날 뻔해서 다급히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제 곁에 군터가 있어서 뭐든 할 수 있는 건데, 모르세요?”

“미안하다. 다음 회의 때부턴 항상 같이 있으마.”

그제야 마리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없이 군터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군터는 뜬금없는 마리아의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여자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큰일이에요.”

“뭐가?”

“저 군터가 점점 더 좋아져요. 회의 때도 머리 한편으론 당신을 생각할 정도로.”

“!”

군터는 너무 좋아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만 하는 짝사랑이라 여겼는데, 그녀도 저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니. 왠지 감동적이랄까. 어느새 마리아의 두 팔이 군터의 목을 감싸고 두 입술이 맞물렸다.

‘모르겠어. 이 남자가 좋은 걸 어떡해.’

* * *

로랑은 헬랜드로 가는 마차 안에서 분노했다.

‘헨리 코부르크, 나쁜 새끼!’

제 여자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병신일 줄이야. 제게 매일 사랑을 속삭이며 했던 말은 다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헨리는 나약한 겁쟁이며 이기적인 머저리에 지나지 않았다.

[헨리, 정말 저를 헬랜드도 보낼 거예요?]

[로랑이 라스토니아 말을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나를 보낼 거냐고요?]

[그럼 다른 대안이 있어? 너 때문에 내 눈알을 파 줄 순 없잖아. 1000만 골드에 7할을 더해 줄 수도 없고, 아니면 그 야만인에게 황궁이 짓밟혀야 하나?]

심장이라도 꺼내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한다며? 아니지, 그런 개소리를 믿은 자신이 어리석었다. 게다가 헨리의 곁에 붙어 통쾌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낸시도 잊히지 않았다.

[로랑, 윌리엄은 제 친아들처럼 잘 키울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키우든지 말든지 알 게 뭐야. 어차피 좋아서 애를 낳은 것도 아닌 것을. 사실 제 배 아파서 낳은 아이지만 그다지 정도 없었다. 이렇게 죽으러 가는 마당에 자식이 무슨 소용이라고. 하지만 낸시한테는 죽어서라도 복수하고 싶었다.

로랑은 주먹으로 벽을 치며 울부짖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최대 실수는 라모나 테일을 없애지 않은 것인 듯싶었다. 그런데 의구심이 생겼다.

‘라모나가 어떻게 궁에 들어온 거지?’

붉은 군대가 백작저를 공격해서 하인들이 뿔뿔이 도망쳤다는 소린 들었다. 물론 라모나도 백작저에서 달아났겠지. 하지만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온 라모나의 얼굴은 멀쩡했다. 어릴 적 자신이 뜨거운 물을 부어서 얼굴 반쪽이 화상이 심했건만, 애초에 그런 일은 없었던 양 말끔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 같긴 한데……. 대체 누구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 됐다.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판 거야? 그래서 얼굴이 멀쩡해진 건가.’

설마 폐황후 마리아가 보낸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로랑은 거칠게 도리질했다. 거기까지 아무래도 억측인 듯싶었다.

* * *

드디어 로랑 세라두가 헬랜드 왕궁에 압송됐다. 군터와 마리아는 로랑을 보기 위해 대접견장으로 향했고, 그들이 도착하자 주요 정무대신들은 이미 양옆으로 도열해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한가운데 대리석 바닥에는 문제의 로랑 세라두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군터와 마리아가 상석에 나란히 앉자, 로랑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그때 타만이 라스토니아 다녀온 일에 관해 군터에게 상세하게 보고했다.

“마리아, 저 여자가 헬랜드의 왕비라니.”

어쩌면 제 억측이 조금은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했다. 헬랜드로 쫓겨나서 개고생할 줄 알았더니, 군터 플레이슬리의 아내가 되었다고? 로랑은 황당함에 헛웃음만 나왔다. 어째서 저 여자는 나락으로 떠밀어도 버젓이 살아 있는 거냐고. 그뿐인가? 어디서든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억울함이 치밀었다.

“마리아, 남자 꾀는 재주가 아주 좋아?”

로랑은 마리아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장내가 술렁였다. 하지만 군터와 마리아는 로랑을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마리아의 뒤에 자리해 있던 노라가 천천히 상석에서 내려와 로랑에게로 다가갔다.

로랑이 어리둥절하던 순간, 노라의 두꺼운 손이 날아와 그녀의 뺨을 세차게 갈겼다.

“윽!”

로랑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대왕님과 왕비님 앞이다. 죄인은 예의를 갖춰라.”

엄하게 로랑을 혼낸 노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곤 다시 마리아의 뒤에 자리했다. 한데 로랑은 바닥에 쓰러진 채 어깨를 심하게 들썩였다. 처음에는 노라에게 뺨을 맞아 아파서 우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전히 이 상황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어 댔다. 마치 정신이 반쯤 나간 여자처럼.

“어차피 나 무서운 거 하나도 없어.”

로랑은 마리아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랑에게로 향했다.

“로랑 세라두, 네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지 몰랐다.”

“흥! 이제 말문이 터진 거야? 저 남자가 잘해 주나 봐?”

로랑이 군터를 흘깃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런데 왜 머리 색은 왜 그 모양이지? 그사이에 팍 늙어 버렸네? 할머니가 다 됐잖아?”

로랑의 도발에 노라가 허둥지둥 뛰어 내려오자, 마리아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로랑, 나도 네 심정 알아. 죽기로 마음먹으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지.”

“나 안 죽어. 무슨 착각을 하는 거지?”

“뭐?”

“너희가 나를 여기로 불러들인 건 아주 큰 실수야.”

“실수든 뭐든 당장 네 목을 베면 그만이야. 실수여도 상관없고 아니면 뭐……. 그것으로 끝이지.”

마리아도 로랑의 말장난에 쉽게 휩쓸리지 않았다. 세상에 저보다 로랑 세라두의 이중적인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한데 로랑의 얼굴은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

“마리아, 그거 알아?”

“말장난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저기 있는 남자가 황궁으로 당신을 구한답시고 쳐들어왔을 때 말이야.”

“?”

“나랑 잤어. 저 남자.”

로랑은 비열한 눈으로 군터를 가리키며 마리아에게 나긋하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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