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59화 (59/120)

59화

로랑의 도발에도 마리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되레 마리아는 경멸 가득한 얼굴로 로랑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저 남자랑 나, 잤다니까? 등에 붉은 용 문신이 있지 아마?”

용 문신이라니? 그건 군터의 맨몸을 봤다는 것인데. 정무대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표정 변화가 없는 마리아를 보고 당황한 쪽은 로랑이었다. 그녀는 마리아를 향해 재차 강조했다. 군터도 헨리와 다를 바 없는 욕망에 충실한 사내일 뿐이라고.

“대왕, 저런 발칙한 것을 두고 볼 필요가 있습니까?”

“왕비님을 능멸하는 죄인의 목을 베십시오.”

“당장 사지를 잘라, 사막에 던져야 합니다.”

정무대신들은 일제히 분개했다. 그러나 군터도 말없이 마리아의 반응을 살필 뿐이었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마리아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이내 술렁이던 실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마리아가 로랑을 향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래서? 내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뭐?”

“나는 네가 창녀처럼 세상 모든 남자와 뒹굴어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 그 많은 남자 중에 내 남자가 있다고 해서 놀라야 하나?”

“허세 부리는 건 여전해. 능력이 없어서 제 남자를 빼앗기는 여자들이 꼭 저렇게 변명하더라.”

로랑도 마리아의 기세에 눌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거나 안타까움의 탄성을 질렀다.

“로랑 세라두, 너와 질펀하게 뒹구는 남자들을 정복했다고 착각하는 거야?”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야.”

“아니, 그건 네 오해야. 소변을 처리할 화장실이 필요하듯이 남자들은 너에게 욕구를 해소하고 싶은 거야.”

마리아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갑고 매서웠다.

“대범한 척하는 건 여전하네, 마리아 스튜어트.”

로랑은 마리아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제 앞에서 정부가 아이를 낳아도 황후의 위엄을 지킨답시고 무게를 잡던 여자였으니, 그 버릇이 어디 갈까. 그런데 조금은 마리아가 변한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이긴 했다. 자신과 헨리가 외도했을 적에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리아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때가 인간적이었는데. 하지만 저 또한 마리아의 허세에 막무가내로 휩쓸릴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하고 몸을 섞는 창녀라 욕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마리아는 내 상대가 못 돼. 그리고 나는 할 수 있어.’

로랑은 화사하게 웃으며 저 멀리 왕좌에 앉아 있는 군터를 바라봤다. 세상 모든 남자는 반드시 자신을 원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이치와 같았다. 어떤 남자가 이브의 사과처럼 탐스러운 자신을 거부할까. 또한 남자들은 마리아처럼 고지식하고 저만 잘난 줄 알고 나대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리아의 한마디에 로랑의 다짐은 무색해져 버렸다.

“로랑 세라두 백작 영애는 한낱 농노 출신인 낸시 아크만한테도 견줄 수 없는 아주 형편없는 여자에 불과하지.”

“닥쳐!”

로랑은 분한지 몸을 격렬하게 버둥대며 고함쳤다.

“결국 너도 믿었던 시녀한테 남편은 물론이고 황후 자리까지 빼앗긴 건 마찬가지잖아!”

마리아는 천천히 다리를 굽혀 로랑 앞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한동안 로랑을 보며 상념에 젖었다. 아주 찰나였으나, 여동생처럼 늘 제 곁에 있던 낸시가 떠올랐다. 하지만 마리아는 금세 머리를 흔들며 말랑말랑했던 감정에서 빠져나왔다.

“네 말이 맞아. 로랑.”

“!?”

“하지만 나는 살아 있어. 하지만 넌 곧 죽을 거야. 사람은 어디에 무엇으로 있든 죽으면 끝이거든. 그리고 말이야.”

“…….”

“인생은 아주 길어. 다 살아 봐야,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 알 수가 있어.”

그건 곧 낸시도 위험하다는 뜻일 터. 마리아는 마지막 저주를 내리듯 말하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로랑과 할 얘기는 없으니, 서서히 끝내야 할 때였다. 더는 로랑의 시답지 않은 말장난을 받아 주기도 피곤했다. 어차피 이 순간이 로랑을 보는 마지막일 테니까.

마리아는 그대로 돌아서 상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리아의 생각처럼 로랑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마리아 스튜어트! 마지막으로 나와 대결해!”

“뭘 해?”

마리아도 놀랐지만, 장내가 다시 술렁였다. 지금 로랑이 제게 무어라 했던가. 죄인 주제에 대결하자고? 마리아는 실소를 터뜨리며 로랑을 향해 돌아섰다.

“대결을…… 하자고?”

“마리아, 솔직해져 봐.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아? 세라두의 기사들이 스튜어트가의 사람들을 도륙했던 것처럼 말이야.”

그녀의 도발에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난 말이야. 어릴 때부터 검술을 익혀서 어떤 남자 기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거든? 그런데 마리아도 잘은 못하지만, 검 좀 휘두른다며? 어때, 대결해 보겠어? 또 알아, 운이 좋아서 나를 죽일 수도 있을지?”

솔직히 마리아는 로랑이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로랑 세라두는 백치미를 앞세운 나름의 전략가였다. 한데 극단적이고 고민이 얕아서 문제였다. 어째서 상대가 자신보다 항상 약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세라두 가문과 스튜어트 가문의 대결, 누가 가문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지 해 보자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상황을 정리한 건 군터였다. 그는 어느새 왕좌에서 내려와 마리아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무서운 얼굴로 로랑을 내려다보았다. 죄인의 방자함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냥 죽이면 끝날 것을 쓸데없는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었다.

“저 죄인을 절벽으로 끌고 가 던져라. 제 오라비가 마리아한테 했던 것처럼.”

“예, 대왕.”

그의 명령에 부하들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가자, 마리아. 더는 상대하지 마라.”

군터는 마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그녀를 다독였다. 하지만 마리아의 얼굴은 이미 고뇌에 차 있었다. 군터가 그녀를 자리로 데려가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곧 병사들이 로랑을 끌어내려 하자, 그녀는 소란스레 고함을 치며 난동을 부렸다.

“마리아! 겁이라도 나는 거야? 네 가문 사람들처럼 나한테 맥없이 뒈질까 봐?”

“저런, 썩을 년!”

로랑이 끌려가는 순간에도 마리아를 향해 악담을 퍼붓자, 보다 못한 노라가 쫓아와 욕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마리아는 무슨 고민을 하는지 얼굴이 매우 복잡해 보였다. 그러다 로랑의 고함이 멀어질 때쯤 마리아가 말문을 열었다.

“멈춰라.”

그녀의 명령에 병사들은 로랑을 다시 마리아 앞에 끌어다 놓았다.

“대결하자고 했나?”

“그래, 검술 대결을 해. 나를 죽일 기회를 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이기면?”

마리아의 물음에 로랑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씨익 올라갔다.

“저 남자, 내가 가질게.”

로랑은 군터를 보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자 군터는 황당한 표정으로 벼락같이 소리쳤다.

“솔샤르! 검을 가져와! 당장, 저 계집의 멱을 따야겠다.”

로랑의 도발에 솔샤르도 어이가 없는지 머뭇거리자, 노라가 뒤뚱거리며 뛰어가,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내더니 군터에게 가져다주었다.

“군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화내는 군터를 마리아가 다정하게 불렀다.

“제가 처리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마리아는 군터에게 무릎을 살짝 굽히며 정중하게 요청했다. 자신이 로랑의 생사여탈권을 갖게 해 달라고.

“그럴 가치가 없다, 마리아.”

“맞아요. 가치는 없으나 제 유흥거리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유흥거리?”

이내 마리아는 군터에게 살포시 입 맞추곤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지지 않아요.”

“마……리아.”

놀란 군터의 얼굴을 마리아는 손등으로 매만지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 남자는 절대 안 빼앗겨요.”

그녀의 대답에 군터는 등줄기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사실 로랑의 거짓말에 마리아가 조금이나마 자신을 의심할 줄 알았다. 한데 그런 낌새는 전혀 없는 데다가 되레 제 남자라고 칭해 주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로랑, 너의 대결 제안을 수락하마.”

마리아는 세상 인자한 얼굴로 로랑의 요청에 응했다.

* * *

군터는 마리아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회랑을 거닐었다.

“그 여자의 말은 거짓이다.”

“어떤 말이요?”

마리아는 오히려 군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와 잤다는 거 말이다.”

“안 믿어요. 두 사람 중에 믿어야 한다면 당연히 군터를 믿어요.”

“!?”

군터는 마리아의 의연함에 놀라 발걸음조차 멈췄다. 세상의 어떤 여자도 제 남자한테 일어나는 여자 문제만큼은 민감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뿐인가, 제 남자를 의심하고 추궁하는 것이 일반적 반응일 터. 한데 마리아는 그중의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사태를 냉철하게 판단한 걸까. 아니면 자신의 남자를 온전히 믿는다는 걸까. 역시 왕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군터는 살짝 걱정되었다. 마리아가 검술을 익혔다는 건 익히 알고 있으나, 정말 로랑을 이길 수 있을지…….

물론 제겐 두 사람의 승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만분의 일이라도 로랑이 이기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 생각이니까. 한데 마리아가 군터의 노파심을 읽어 내기라도 했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로랑에게 반드시 이길 거예요.”

“그래, 마리아는 용기 있고 정의로운 여자니까.”

“아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길 거예요.”

군터가 의아한 얼굴로 마리아를 보았다. 평소의 그녀다운 발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언지 헷갈렸다. 혹여 마리아가 편법이라도 사용하겠다는 것인가. 순간 군터는 마리아의 하늘빛 눈동자가 살기로 빛나는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가장 잔혹하고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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