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일주일이 지난 후, 연무장에 헬랜드의 정무대신과 그의 가족들, 전사들이 관중석에 모여 자신들의 왕비인 마리아와 죄인 로랑의 검술 대련을 기다렸다. 상석에는 군터가 자리했으며, 그 옆에는 솔샤르가 있었다.
“솔샤르, 에로는 언제쯤 돌아오느냐?”
“예? 이제야 라스토니아에 도착했을 겁니다.”
군터는 근래에 솔샤르의 심기가 좋지 않다고 느꼈다. 늘 곁에 있던 연인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자신은 마리아가 잠시라도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그나저나 저는 왕비님의 속내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솔샤르는 노라에게 말을 전해 듣고 적잖이 놀란 터였다. 그녀가 마리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심성이 곱고 올바른 신념을 가진 여자라는 것은 알지만, 죄인을 일주일간 호의호식하게 해 주다니. 그러다가 검술 대련에서 패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마리아 나름의 깊은 뜻이 있겠지.”
“대왕, 아시지 않습니까? 검술 대련은 유난히 변수가 많다는 것을요. 게다가 세라두의 후손입니다. 검 하나는 기막히게 다룰 게 뻔합니다.”
한데 오랜 여정으로 지친 로랑의 체력을 굳이 회복시켜 준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넌 마리아가 지기라도 할 것 같다는 소리냐?”
“그럴 리가요? 그만큼 여러 가지 상황에 신중히 대비해야 한다는 거죠. 죄인을 그렇게 대접해 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
순간 군터도 말문을 닫았다. 사실 솔샤르의 염려가 당연하기 때문이다. 저조차도 마리아를 믿는다곤 했으나, 그녀가 품고 있는 진짜 의도를 말해 주지 않으니 솔샤르에게 무어라 답할 말이 없긴 했다. 하지만 군터는 그조차도 기다릴 수 있다. 자신만큼은 남들이 품는 의구심에 동조하지 않을 참이다.
그때였다. 관중석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연무장 양쪽에서 전투복을 입은 두 명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리아!’
군터, 솔샤르, 노라의 시선이 마리아에게로 쏠렸다. 항시 드레스를 입은 모습만 보다가 기사처럼 갑주를 걸친 마리아는 아주 색다르게 느껴졌다. 한데 상대인 로랑을 보곤 일제히 불안감에 휩싸였다. 요염하게 웃으며 교태만 부릴 줄 아는 여자인 줄 알았건만…….
“대왕, 검을 잡은 자세를 보십시오.”
솔샤르가 군터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전형적인 세라두 방식이구나.”
때마침 로랑은 여봐란듯이 검을 현란하게 돌렸다. 그것만 보아도 며칠 전, 마리아에게 검술 대결을 제안한 것이 단순히 목숨을 구걸하려 허풍을 떤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되레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강한 승부욕을 펄펄 뿜어냈다. 반면 마리아는 로랑을 응시한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 왕비님이 이길 겝니다.”
노라가 뜬금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내 군터가 허탈하게 웃었다. 너무 당연한데 노라의 표정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비장했기 때문이다. 한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저야 마리아니까 당연히 이겨야 한다 여기지만, 노라는 무슨 근거로 자신하는지.
“상대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어떻게 자신하느냐?”
군터의 말에 노라는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제가 왕비님과 싸워 봤잖습니까? 굉장히 침착하십니다. 그러니 저 염병할 년, 아니 죄인의 술수에 휘말리지 않고 잘하실 겝니다.”
“그런가.”
분석적이라기보다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기인한 말이었다. 한데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리아가 로랑에게 패배할 거란 가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대련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군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살폈다. 그런데 좀 의외인 것은 정무대신들의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마리아를 배척하고 여자라고 무시하던 작자들이 혹여 그녀가 질까 봐 잔뜩 긴장한 모습이 재밌었다. 개중에는 고함을 치며 노골적으로 마리아를 응원하는 이도 있었다. 제 신하들이 무식해도 순수한 마음을 가졌음을 왜 모를까.
“검술 대련을 시작하라!”
군터의 명에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연무장에 마주 선 두 여자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함이 맴돌았다. 마리아는 비장한 눈빛으로 로랑을 노려보다 거칠게 투구 앞가리개를 내렸다.
‘지지 않아.’
제 인생을 수렁으로 밀어 넣은 여자. 거머리처럼 붙어선 어렵게 되찾은 행복마저 빼앗으려는 악녀였다.
‘로랑, 똑똑히 지켜봐. 내가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지 몸서리치게 느끼게 해 줄 참이다. 그래서 일부러 살려 두었다. 그냥 죽이기에는 제 성이 다 차질 않아서. 그때였다. 로랑이 먼저 달려와 마리아를 공격했다. 챙! 두 개의 검이 맞부딪치며 쨍한 금속 마찰음과 진동이 사방으로 퍼졌다. 순간 군터도 몸을 움찔했다.
우와와와! 관중석에서 온갖 소음이 터져 나왔다.
“왕비님, 반드시 죄인을 응징하십시오.”
“세라두의 창녀를 죽여야 합니다.”
“감히 헬랜드의 왕비를 노리다니.”
두 개의 검이 섬광을 내며 궤적을 그렸다. 하지만 로랑의 일방적인 공격을 마리아가 받아 내는 형세로, 한쪽으로 치우친 싸움이었다. 게다가 로랑의 검술은 세라두 특유의 기술로 매우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에 비해 마리아는 시야를 넓게 보며 로랑의 다음 공격을 읽어 냈다.
“아니, 왕비님은 어째서 공격을 안 하시는 거여.”
노라가 몸이 달아 발을 동동 굴렀다. 저러다 급소라도 찔리면 어쩌려고. 심지어 로랑은 짜증 나게 실력이 출중했다.
“저년이 왕비님을 이기고 대왕을 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여.”
노라는 로랑의 일주일을 지켜보곤 화병이 들었다. 마리아의 명령이라서 참긴 했으나 마치 제 왕궁인 양, 활개를 치는 모습이 어찌나 가관이던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밤마다 시중드는 남자들과 돌아가며 잠자리까지 했다. 죄인이 아니라, 최고의 귀빈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욕심도 나겄지.’
그래서 그랬나, 로랑은 쉴 새 없이 마리아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방어만 할 뿐, 제대로 된 공격 한 번을 하지 못했다. 노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중, 마리아의 당부가 떠올랐다.
[노라, 죄인한테 사용하는 인두를 미리 불에 달궈 놔요.]
[예? 그건 어렵지 않지만…….]
[염려 말아요. 나한테 생각이 다 있으니. 로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요.]
‘그거구나! 어이쿠, 이 돌대가리야. 그걸 지금 눈치챈 거냐?’
마리아가 왜 그런 명을 내렸는지 로랑의 검술을 보곤 알아챘다.
* * *
로랑은 빠르게 뛰어가 마리아를 정신없이 공격했다.
‘반드시 빼앗을 거야. 나는 빛나야만 하는 존재라고.’
마리아는 여전히 물러 터진 여자였다. 예전부터 그랬다. 혼자 인정이 넘쳐흘러서 최고의 황후라고 추앙받기를 원했다. 그러니 자신을 죄인으로 끌고 왔음에도 일주일간 호의호식하게 해 준 거지. 지독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 마리아였다.
‘네 이름이 마리아라고, 진짜 성녀인 줄 알아? 그놈의 고고한 척은.’
결국 마리아는 남들의 평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허세 덩어리였다. 그러다가 저 죽을 줄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 너무 좋아. 라스토니아 황궁보다 모든 것이 월등하잖아. 게다가 저 남자도 탐나.’
로랑은 싸움 중에도 흘깃흘깃 군터를 훔쳐보았다. 저토록 얼굴과 몸이 완벽하며 싸움도 잘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뿐인가? 넘치는 부는 어떻고. 구질구질한 헨리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이 한 최대의 실수가 헨리를 욕심낸 것이다. 로랑은 욕심에 치받쳐 눈앞이 아득했다. 지난 일주일간 이곳에서 지내며 심장이 화염에 휩싸이는 것만 같았다. 어느 때는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원했다.
‘군터 플레이슬리의 여자가 되고 싶어. 내 집안을 박살 낸 작자면 어때.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챙챙-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여러 기술을 이용해 공격하는 로랑과 달리, 마리아는 용의주도하게 방어하며 그녀를 피해 다녔다.
‘도망치지 말란 말이야. 난 얼른 네 멱을 따고 싶다고.’
헉헉- 로랑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공격을 이어 갔다. 한데 마리아의 힘이 이토록 좋았나. 아니, 방어는 검술에서 공격보다 중요하다 배웠다. 그것만 잘해도 절반은 이긴 싸움이니까.
대련을 지켜보는 군터는 마리아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불어 묘한 감정이 그의 심장을 강타했다. 죽겠다며 절벽에 몸을 던졌던 여자가 저렇게 악을 쓰며 싸우고 있다니.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우십니까? 꼴사납게…….”
솔샤르는 군터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심한 말도 거침없이 해 댔다. 제 아내가 대견스러워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남편이라니. 다른 남자면 몰라도 군터가 이런 민망한 행동을 하는 건 정말이지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이내 솔샤르가 몸서리를 쳤다.
“꼴사나운 건 너다. 그놈의 목도리 좀 빼라. 덥지도 않냐?”
군터가 정색하며 솔샤르에게 핀잔을 줬다. 겨울이 지난 지가 언젠데 왜 목도리를 풀 생각조차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대왕은 이런 것도 없지 않으십니까?”
“뭐라고? 그까짓 목도리보다 더 좋은 게 있다.”
물론 코가 다 빠져서 실이 다 풀리기 직전이라 몸에 두르기엔 좀 그렇지만. 그러다 솔샤르의 시선이 힘겹게 대련하는 두 여자에게로 움직였다.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그래야 재밌지.”
서로 농담까지 나누며 비교적 여유로운 두 남자와 다르게, 관중석에선 회의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왕비님이 밀리시는데, 아무래도 질 것 같아.”
“그러니까, 변변한 공격조차 못 하시잖아.”
“이러다가 졸지에 왕비가 바뀌는 거 아니야?”
“그러게, 저 여자 검술 좀 보라고, 너무 빠르잖아.”
“에이, 이젠 힘이 많이 빠졌고만, 곧 우리 왕비님이 공격하시겠지.”
때마침 로랑의 폭풍 같은 공격에 마리아가 나가떨어졌다. 곧 관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못 믿겠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마리아, 일어나라.’
군터는 마리아를 무섭게 노려보며 속으로 소리쳤다. 로랑의 검이 마리아를 무자비하게 찌르려 내리꽂았다. 하지만 마리아는 기민하게 잘 피했다. 그러자 화가 난 로랑이 크게 소리쳤다.
“마리아, 너는 이미 나한테 졌어. 이제 그만 뒈지란 말이야!”
로랑은 마지막 힘을 검에 실어 마리아를 향해 내리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