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퍽- 로랑의 칼이 흙바닥에 꽂혔다. 순간 마리아는 바닥에서 튕기듯 일어나 발로 로랑의 가슴을 가격했다.
“윽.”
로랑이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지자,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마리아는 한달음에 달려가 역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로랑도 마리아의 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마침 마리아는 로랑에게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서 날 이겨. 그래야 이곳의 풍요를 네가 다 누릴 수가 있어. 저 남자까지 말이야.”
마리아가 군터를 가리키며 여유롭게 웃었다.
“!”
로랑은 자신을 조롱하는 마리아를 보곤 이성을 잃었다. 그러나 초반에 퍼부은 맹공에 힘이 빠져 그녀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했다.
“아악!”
괴성을 내지른 로랑은 땅을 기다시피 하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마리아가 어느새 로랑의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눴다.
“공격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거, 안 배웠나? 검술의 기본이잖아.”
마리아는 로랑을 비웃었다. 탐욕과 자만에 취한 로랑의 검은 조금도 냉정하지 못했다. 이내 마리아는 자신의 검을 멀리 던져 버린 뒤, 발로 로랑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로랑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오호!”
군터가 마리아의 과격함에 탄성을 지르자, 흥분한 관중들이 마리아를 응원했다.
“로랑,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나는 검술도 가능하지만, 몸싸움도 잘해.”
물론 노라한테 배운 거였다. 마리아는 로랑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산산조각 내듯이 그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반면 힘이 빠진 로랑은 마리아를 이리저리 피하느라 바빴다. 마리아는 다시 검을 들곤 로랑에게로 다가갔다. 마리아는 로랑의 갈색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챈 뒤, 그녀의 목에 검을 조금씩 밀어 넣었다.
“사, 살려 줘.”
로랑은 제 살갗을 차갑게 파고드는 느낌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곤 온 뺨이 다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욕심에 치받쳐 냉정하게 싸우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얼마 못 가 마리아의 칼날에 로랑의 붉은 피가 스미기 시작했다.
“염려하지 마.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마리아는 로랑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치 사랑 고백을 하는 연인처럼, 더없이 애절한 표정으로.
“천국을 맛봤으니, 지옥이 어떤지도 알아야지.”
“윽.”
“네 가문의 용병들이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지 알아? 죄 없는 하인에서부터 성에 사는 고양이 한 마리까지 모조리 죽였다더군.”
“그……래서 복수했……잖아!”
로랑도 억울했다. 헬랜드의 전사들이 세라두 백작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가주인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수급을 제게 선물로 보냈었다.
“계산은 똑바로 해야지. 하나 주고받고 다시 줬으니, 나는 그대로 하나를 돌려주는 거다. 그런데 말이야. 너란 여자, 정말 욕지기가 나. 어떻게 네 아버지와 오라비를 죽인 남자를 탐할 수 있는 거지? 하긴 너는 그런 인간이었지. 아주 이기적이고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연무장은 관중들의 소리로 요란했다. 그들은 마리아가 파렴치한 죄인의 목을 조금이라도 빨리 긋기를 원했다. 그래야 대련의 절정에 이르게 될 테니까. 하지만 마리아한테는 로랑의 목을 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되레 그녀는 노라를 향해 소리쳤다.
“노라, 인두를 가져오세요!”
“예.”
노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노라는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들곤 연무장 가운데로 향했다.
“노라, 죄인을 잡아요.”
마리아의 명에 노라는 그대로 로랑을 깔고 앉아 버렸다. 곧 연무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네 이년, 너 잘 만났다.”
노라는 로랑의 머리를 움켜잡곤 그녀가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로랑의 시선은 마리아의 손에 들린, 불에 달군 인두에 고정됐다.
“아니야. 하……지 마! 싫어!”
이미 눈치를 챘는지 격렬하게 소리쳤다. 마리아는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죄인을 상징하는 인두로 로랑의 하얀 뺨을 지졌다.
“아아악!”
군터는 그 광경을 보곤 일전에 마리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길 거예요. 가장 잔혹하고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예요.]
예전의 그녀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랑에게 잠시나마 천국을 보여 준 뒤 탐욕에 떨게 했다. 누구보다 로랑의 성정을 잘 알기에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다. 영혼을 뒤덮는 욕심에 이성을 놓아 버릴 것을 예상했을 터. 천국까지 끌고 올라갔다가 가차 없이 지옥으로 던져 버리는 잔혹함, 마리아가 말하는 단죄는 이런 거였던 모양이다.
“으아아악!”
노라가 몸을 풀어 주자, 로랑은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태연하게 연무장을 돌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검술 대련은 나의 승리다.”
우와와와!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죄인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선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야유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마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몸소 경험하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다는 것을.
“저 죄인을 왕성의 돼지 농장으로 보내거라.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똥을 치우며 살게 하거라.”
“예, 왕비님.”
병사들이 마리아의 명령에 연무장으로 들어와 로랑을 끌고 나가려 하자 로랑은 마리아를 향해 고함을 쳤다.
“마리아 스튜어트, 너를 평생 저주하며 살 거야. 이 악마 같은 년아!”
최후의 발악을 하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마리아는 그런 로랑을 차갑게 바라보다 손을 들어 병사들을 멈추게 했다.
“말을 못 하게, 혀를 잘라라.”
“예.”
순간 부모님의 죽음을 확인하곤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혔던 자신을 조롱하던 모니카와 곁에서 사악하게 웃던 로랑이 떠올랐다.
[이젠 말도 못 하는 병신이 된 거야?]
죄악의 정도를 모르는 인간들. 남에게 저지르는 죄는 결국 비수가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마냥 착하거나 악독하기만 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마리아 스튜어트가 아니야.’
마리아는 로랑이 끌려간 문을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 *
군터는 마리아가 승리하여 기뻤으나 한편으론 심경이 매우 복잡했다. 마땅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고, 그래야 마리아가 앞으로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연무장에서 로랑에게 보였던 마리아의 살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군터는 모든 일을 마치고 마리아와 오붓하게 식사했다. 한데 분위기가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뭐랄까, 마리아의 불편한 감정이 그녀의 몸에서 은연중에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복수한 기분이 어떻지?”
군터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기쁘고 후련해요.”
“기쁘고 후련하다?”
“네. 왜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마리아가 굳은 얼굴로 군터에게 물었다.
“아니. 전혀.”
그저 마리아답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 왠지 자신만의 천사 마리아가 흑화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못했다.
“표정은 탐탁지 않은 것 같은데요? 군터가 원하던 제 모습이 아니라서 실망하셨나요?”
마리아는 군터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군터는 자신을 진짜 성녀쯤으로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의 뇌리에는 열다섯 마리아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다.”
군터는 부정했다. 마리아가 제 심경을 정확히 알아챘으나, 제 생각을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마리아도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남겨진 몫이 있으니 당연히 해야 할 터였다.
“정말이에요?”
아니어도, 당분간은 지켜볼밖에. 자신의 마리아가 완전히 변하진 않을 테니까. 마리아는 식사하는 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저를 보던 군터의 의중을 모르지 않았다. 그건 필시 로랑에게 복수하고도 기쁘지 않은 제 감정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멈출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 다만…… 앞으론 내 의견도 따라 주길 바란다.”
“!?”
그의 의견을 따라 주길 바란다고. 아무리 그가 제 속을 잘 안다곤 해도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는 것을. 켜켜이 쌓인 이 원한을 그가 알까? 하루아침에 머리 색이 변할 만큼 참담한 일을 겪었다.
“단순한 노파심이다. 다른 뜻은 없어.”
“네, 그럴게요.”
대답은 그리했으나, 군터에게 아직 다 말하지 않은 제 계획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알면 반대하겠지.
“마리아, 이리로.”
군터는 제 무릎을 툭툭 치며 마리아를 불렀다. 이내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무릎에 앉았다.
“군터, 걱정하지 말아요. 저 안 변해요.”
왠지 그녀에게 속을 훤히 들켜 버린 것만 같았다. 군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가 이렇게 다짐하는데 믿지 못할 이유도 없는 거니까. 군터는 마리아에게 살포시 키스한 뒤, 그녀를 애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마리아.”
“네?”
“사랑한다.”
“!?”
순간 마리아는 숨을 멈췄다. 군터의 그 어떤 염려보다 ‘사랑한다’ 그 한마디가 마음에 더 와닿았다. 아주 강력한 경고를 하는 것처럼 가슴을 후벼 팠다. 어째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말에 죄책감이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 * *
모니카의 생일 연회는 아주 성대하게 열렸다.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귀빈들도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그들은 호화롭게 꾸며진 연회장을 보곤 라스토니아의 건재함을 칭송했다. 낸시는 헨리의 곁에서 황후의 역할을 제법 잘해 냈다.
“엄마는?”
헨리가 나직한 어조로 낸시에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귀부인들과 뱃놀이를 하고 계세요.”
“이게 다 낸시 덕분이다.”
“별말씀을요.”
낸시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 모니카는 핑크빛 장미와 백조의 깃털로 장식된 배에 올라탔다. 예상대로라면 벨루이스의 후작 부인이 함께 배에 탈 터. 한데 약속한 후작 부인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한 귀공자가 배에 훌쩍 올라탔다.
“선황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누구……?”
모니카는 제 배에 올라탄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사람한테서 빛이 나는 걸까. 꽃과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은 아마도 저 귀공자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었다.
“저는 키르탄의 왕자, 에론 티크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