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키르탄의 왕자? 아, 일전에 낸시가 말했던 졸부.’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건만, 이토록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일 줄이야. 에론 티크라는 이름이 뭐랄까, 매우 관능적이었다. 어깨까지 출렁이는 흑단 같은 머리와 갸름한 얼굴, 고운 이목구비,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 그에 반해 남성성을 보여 주는 목울대까지. 영락없이 제 취향의 남자였다. 딱! 에로가 손가락을 부딪치자, 사공이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후작 부인이 타시기로 했어요.”
“제가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전하와 단둘이 시간을 갖게 해 달라고요.”
“네?”
모니카는 얼굴을 붉혔다. 이 나이가 되도록 제 곁을 거쳐 간 수많은 남자가 있었지만, 첫눈에 소녀처럼 가슴을 뛰게 한 남자는 처음이었다. 왜 그럴까? 모니카는 그를 꼼꼼하게 살폈다. 물론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다. 키르탄의 왕자에겐 중성적인 매력이 도드라졌다. 그것이 묘하게 신경을 자극한달까.
“소문대로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네? 과찬이세요. 예전에는 한 미모 했지만, 이젠 퇴색해 버린 그림 같은걸요.”
“아뇨, 원숙한 여자만이 풍기는 매력이 있죠. 상대를 채근하지 않고 관조하듯 숨은 매력을 찾아내는 탁월함은 어린 여자들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부족의 왕자쯤이라더니, 교양이 넘치잖아.’
사실 듣도 보도 못한 키르탄의 왕자라고 해서, 어느 부족의 아들이 돈 좀 벌어서 왕자 행세를 하나 보다 했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돈은 많으나 타고난 고귀함은 부족했다. 한데 저 왕자는 달랐다. 말투도 대륙의 귀족들과 다를 바 없으며 발음도 부드럽고 지적이었다.
무엇보다 전에 곁에 두었던 정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몰락한 귀족이나 예술인 내지는 군인으로 빼어난 외모가 전부로,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제게 접근하여 부와 명예를 요구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취하는 관계랄까. 한데 키르탄의 왕자는 기본적인 부가 받쳐 주다 보니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아부는 하지 않았다.
“왕자님, 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시려는 이유가 있나요?”
“에론이라 불러 주십시오. 모니카.”
“네……? 네. 에론.”
모니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저는 모니카를 이용할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라스토니아의 황족에게 여러 가지의 황실 법도에 관해 배우고 싶을 따름입니다.”
에로는 키르탄에 관해 조곤조곤한 어조로 설명한 뒤, 돈은 많으나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자신의 왕국을 발전시키고 싶어, 황족들과 친분을 쌓는 중이라 말했다.
“모니카만큼 뼛속까지 황족인 분이 드무니까요. 아, 제 말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저처럼 결핍된 인간은 모니카처럼 태생이 고귀한 사람을 보면 열등감에 휩싸이곤 해서요.”
“아뇨. 가식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것보다 좋아요. 그런데 낸시한테 듣기론 라스토니아에 투자를 하고 싶어 하신다고.”
“예, 저는 배움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배움이요?”
“모니카, 제 친구이자 선생님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제가 진정한 왕족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대신 학비는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 * *
라모나가 석 달 만에 헬랜드로 돌아왔다. 그녀는 군터와 마리아에게 라스토니아의 정세를 상세히 보고했다.
“에로가 선황후와 친해졌다고?”
군터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네, 키르탄의 꽃 왕자로 불리세요.”
그녀의 말에 군터와 솔샤르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반면 마리아와 노라는 소리 내 웃었다.
“선황후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매우 친분을 공고히 다지고 계세요. 오히려 선황후가 안달이 났지 뭐예요.”
“그렇겠지. 제 연인으로 만들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을 거예요.”
마리아는 모니카에 관해 너무 잘 알기에 안 봐도 라스토니아의 일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모니카에게 몸뚱어리와 거짓 사랑을 팔던 기존의 정부들과는 다르니, 지금쯤 그를 잃게 될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터.
“헨리 왕과도 친분을 터서 이젠 가족처럼 지내고 계세요.”
“가족이라니, 지나던 개가 웃겠군.”
군터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뭐든지 편리하게 관계를 맺고 끊는 능력자들이었다. 남들은 가지지 못한 재주니까. 하지만 그 능력이 돈을 좇고 있음을 왜 모를까.
“너는 낸시한테 무어라 말하고 온 거냐?”
노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모나에게 물었다.
“휴가를 받았어요. 그리고 스톤 님이 걱정도 되고 해서…….”
“스톤이 왜?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는데.”
군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 궁에서 자기를 수발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던데?”
“그 녀석은 어리나 늙으나 징징대는 건 여전하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마리아한테 들러붙지 않아서.”
“군터!”
마리아가 질책하자, 군터는 금세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곤 고개를 흔들었다.
“헙, 실언.”
“저기, 라모나도 왔으니,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식사해요. 제가 음식을 만들게요.”
“마리아가?”
군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세상에 어느 왕비가 직접 요리를 한다고.
“다들, 가족이 해 준 음식은 못 먹어 봤잖아요?”
마리아는 따뜻한 시선으로 군터와 솔샤르, 라모나와 노라를 차례대로 훑었다. 모두 숙연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아는 어릴 적, 자신의 어머니가 종종 직접 요리를 해 주시곤 했는데, 지금까지도 가족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가족이 없는, 아니 새로운 가족이 된 모두에게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 주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즐거운 저녁 만찬이 될 것 같아요.”
라모나가 신나서 손뼉을 치자, 모두 흐뭇하게 웃었다.
“참, 제이미도 초대해요. 마법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따뜻한 음식을 먹게 해 주고 싶어요.”
얼마 전 군터는 마리아의 조언에 따라 제이미를 대륙에 있는 마법 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했다. 마물 사냥꾼이었던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많아서 열심히 공부하면 헬랜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능한 마법사가 될 것이다.
“어이쿠, 우리 왕비님 마음씨도 참 고우시지.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노라. 매일 내 시중 드느라 힘든데, 주방의 시종들과 함께 하면 돼요.”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갔다. 물론 노라와 라모나도 득달같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마침내 군터는 솔샤르와 단둘이 남게 되자, 심각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지? 마리아가 변한 것 같으냐?”
“대왕, 환상에서 빠져나오십시오.”
군터의 속내를 간파한 솔샤르가 일침을 가했다.
“잘 안된다.”
마리아에 대한 환상, 군터는 여전히 열다섯 살의 천사 마리아를 갈구하고 있었다. 사람은 고난을 겪으며 변할 수 있고 한층 성숙해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유독 마리아한테만 모순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여전히 충격이다. 나는 짐승처럼 살아도 상관없지만, 마리아가 나처럼 되는 건 싫거든.”
군터는 마리아가 로랑을 무자비하게 벌했던 광경이 눈앞에 선했다. 이겨서 다행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만든 견고한 환상이 깨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성숙해지는 겁니다. 스스로를 지키시려고.”
“그런 것 같다. 조금 전만 봐도 예전의 마리아와 다르지 않았으니까.”
두루두루 챙기며 세심하게 마음 써 주는 모습. 이기적이지만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마리아였다. 솔직히 그녀의 손에 피나 오물을 묻히게 하고 싶지 않다. 그녀를 괴롭힌 인간들도 제 선에서 단죄하면 좋으련만. 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이기심의 발로라는 것을 너무 잘 아는 터였다.
“대왕, 헬랜드에는 강한 왕비님이 필요합니다.”
“강하다는 정의가 모호하지 않으냐.”
저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 모양이다. 마리아를 온실의 꽃처럼 모셔 두기만 하려고 하니까.
* * *
마리아는 최선을 다해 요리했다. 사실 직접 요리를 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맛은 아니까, 어떤 식재료에 적당한 양념은 무언지 이론적으론 잘 알고 있기에 어렵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해 보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툼한 고기가 겉은 새카맣게 타고 속은 전혀 익지 않아서 주방장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기다란 식탁에 차려 놓으니 그럴싸해 보였다.
“정말, 마리아가 다 한 건가?”
제일 먼저 자리한 군터가 감탄스럽게 묻자, 마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모두 오셨나요?”
마리아는 초대한 사람들이 다 왔는지 확인했다. 스톤과 라모나 그리고 제이미까지 모두 착석한 걸 보니, 식사를 시작해도 될 듯했다.
“세상에나! 이걸 다 왕비님이 하셨다고요?”
노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메인 요리는 내가 하고, 나머지는 주방 사람들이 도와줬어요.”
“자아, 들지.”
군터가 먼저 포크와 나이프를 들자 일제히 식사를 시작했다. 군터는 제 앞에 있는, 대구와 유자, 순무에 백포도주를 넣어 졸인 음식을 먼저 먹었다. 마리아는 군터의 반짝이는 포크에 하얀 대구 살이 찍혀 입에 들어가는 과정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
군터는 대구 살을 오물오물 씹더니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왜요? 맛이 없어요?”
“아……니다. 아주 맛있어. 다들 먹어 봐. 식감이 최고다.”
군터의 평가에 모두 설레는 표정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마리아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제이미, 많이 먹으렴. 곧 마법 학교에 가야 하니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단다.”
“네, 마리아 님.”
환하게 웃으며 대구 살을 한 입 크게 입에 넣은 제이미의 두 눈이 곧 커다래졌다.
“그렇게 맛있니?”
마리아가 너무 맛있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제이미를 보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먹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스톤, 드셔 보세요.”
“난 정령이라서 인간의 음식은 맞지 않아.”
“전에는 잘 드셨잖아요?”
“아, 그게…… 바뀌었어. 나는 그만 일어나야겠다.”
어? 이상하다. 왜 다들 말이 없지. 군터도 솔샤르도 심지어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노라마저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