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64화 (64/120)

64화

모두가 만족한 저녁 식사였다. 말이 없던 이유는 음식의 맛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랬단다. 게다가 다들 자신이 만들어 준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 주었다.

‘뜨개질은 못해도 요리 솜씨는 있나 봐.’

마리아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생전 식칼 한 번 안 잡아 봤는데, 이 정도면 매우 성공적이었다. 마침 노라가 다가왔다.

“노라, 다음에도 음식을 해 줄게요.”

“예……? 예. 그런 영광스러운 일이, 하지만 왕비님은 하실 일이 많으시잖습니까?”

노라가 애써 마리아의 호의를 거절했다. 지금도 마리아가 만든 음식을 먹고 물만 여러 잔을 들이켜고 왔다. 대구는 비린내가 적어서 웬만하면 맛없기가 어려운 생선인데, 싸구려 앤초비를 먹는 양, 어찌나 짜던지. 게다가 백포도주로 소스를 만들 때는 녹말 가루를 약간 넣어야 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여하튼 결론은 나 버렸다.

‘왕비님은 똥손이여.’

손재주는 없는 거로 잠정적 결론이 났다. 노라는 더는 저녁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가 싫어서 화제를 돌렸다. 계속 말하다 보면 제 진심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왕비님, 그 죄인 말입니다.”

“아, 일은 잘하고 있나요?”

“가 보시겠어요?”

노라의 제의에 마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로랑의 비참한 말로를 똑똑히 지켜봐야 할까. 아니면 연무장 대결에서 원한은 끝이 났다고 여겨야 할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가요?”

마리아는 가 보지 않기로 했다. 로랑의 비극을 즐길 정도로 비위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노라를 통해서 듣는 것으로 충분할 테니까.

“왕비님이 광산에서 겪은 것만큼 비참합니다. 어쩌면 더……. 죄인에겐 빵을 나눠 주는 에로 같은 친구가 없으니까요.”

“…….”

그거면 됐다. 로랑 세라두에 대한 자신의 복수는 끝났으니, 다음은 라스토니아에 있는 파렴치한들이 남았다.

마리아는 본궁으로 향했다. 오늘 밤은 군터에게 칭찬을 듬뿍 받아 내야지. 맛있는 저녁 식사로 인해 평생에 기억될 또 하나의 추억이 생겼노라, 감동 어린 대화를 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나. 저만치에 서 있는 군터와 솔샤르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충격적인 소리에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대리석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왕비님, 다른 길로 돌아가시죠.”

노라가 마치 남자들의 대화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럴까요? 꼭 엿듣는 것 같아서 좀 그렇네요.”

마리아는 노라의 조언대로 다른 길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제 뒤통수를 후려치는 군터의 목소리에 저절로 발이 멈췄다.

“돼지 밥 같은 것을 사람에게 주다니. 평생 못 잊는다.”

“예, 저도 그렇습니다. 아주 징글징글합니다.”

‘돼지 밥? 설마, 오늘 내 요리를 말하는 건가.’

어떤 공포보다 섬뜩해서 머릿속까지 소름이 돋았다. 군터와 솔샤르에게 이런 악평을 들을 정도로 자신이 잘못한 건가. 제 귀로 듣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대왕, 그 음식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먹다가 토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지 뭐냐?”

“그러셨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더 이상 들을 얘기가 없었다. 하지만 노라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일이 꼬여 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노라, 저분들이 하는 말, 오늘 내가 만든 요리를 두고 하는 거 맞죠?”

마리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노라는 다른 생각을 하는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노라.”

“예?”

“저 두 남자가 퍼부은 악담 말이에요. 나한테 한 거 맞죠?”

“에이, 그건 아니죠.”

노라가 손을 휘이 저으며 부정했다. 사실 마리아의 요리가 형편없긴 했으나 저런 악담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마리아는 군터와 솔샤르에게 너무 큰 실망을 했다. 특히 군터에게 이런 이중적인 면모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좀 거칠긴 해도 뒷말을 서슴지 않는 남자였다니. 단순한 뒷말 수준이 아니라, 이건 씻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돼지 밥? 내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최악이란 거야? 아무리 맛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아내의 요리에 그런 표현을 쓰지?’

마리아가 서운한 건 제 음식에 대한 맛의 유무가 아니라, 군터의 상스러운 표현이었다. 제 딴에는 저들을 가족이라 여겨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스톤이 먹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건가?’

그는 남의 마음을 읽어 내는 능력이 있으니, 제일 먼저 음식을 맛본 군터의 속을 알아낸 거겠지.

“노라, 솔직히 말해 줘요.”

마리아는 노라의 두 팔을 부여잡곤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뭐……를 솔직히 말한답니까?”

“오늘 내 요리 말이에요. 어땠어요?”

* * *

에론은 모니카와 헨리 그리고 낸시와 화기애애한 일상을 보냈다. 오늘도 낸시가 주최한 만찬을 즐겼다.

“에론 왕자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즐거운지 모를 거요.”

헨리의 덕담에 모니카는 에로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서 저 남자가 제 유혹에 넘어와야 할 텐데, 생각보다 철벽이었다. 하긴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 있어서 손가락만 까딱거려도 바지를 벗는 싸구려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구나 황실 법도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펑펑 써 대니, 정말이지 최고의 남자였다.

“전하, 아니 선생님께 황실 법도에 관해 잘 배우고 있으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맙습니다.”

“에론, 언제까지 선생님이라 부를 건데요?”

모니카가 비음 섞인 말로 교태를 부리자, 보고 있던 헨리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자신이 보기에는 키르탄 왕자는 이곳에 연애질하러 온 게 아닌 것을. 저 자신도 키르탄이라는 나라가 생소하여 사람을 시켜 알아봤었다. 그 결과 북서쪽 헬랜드와 인접한 아주 작은 왕국임을 확인한 터였다. 저라도 돈만 있으면 다른 황실에 가서 보고 배우고 싶을 것이다. 고귀한 존재가 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니까. 돈이 많다손 쳐도 타고난 혈통은 달라지지 않는 법, 그래도 품위 있게 살 수는 있겠지. 키르탄 왕자처럼 열심히 배워서 제대로 흉내를 낼 수만 있다면. 한데 모니카는 오로지 왕자와 연애할 생각밖에 없었다.

“제 배움이 다 끝날 때까지요.”

에로는 점잖게 대답했다. 그는 찻잔을 입에 대며 마리아를 수렁에 빠뜨린 인간들을 두루두루 살폈다. 황족이라고 하나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인간들. 그래도 꼴에 황제라고 제 뒷조사까지 하고, 그 노력은 가상하지만 그런 계산도 안 하고 황궁에 온 게 아닌 것을. 라모나를 통해서 헨리의 정보통이라 불리는 귀족들에게 미리 손을 써 두었다. 그때 손님이 찾아왔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잠시 경직되었다.

“숙부님.”

나이가 지긋한 황족이 만찬장에 온 것이다. 헨리와 많이 닮은 데다가 숙부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작은아버지가 아닌가 싶었다.

“폐하, 저 같은 퇴물을 다 불러 주시고…….”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그동안 황실에 일이 많아서 숙부님과 소원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에론 왕자, 인사하시죠. 제 작은아버지이신 찰스 코부르크 대공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키르탄에서 온 에론 티크라고 합니다.”

“키르탄?”

예상대로 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경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낸시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계속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 와중에도 모니카의 관심은 에론한테만 쏠려 있었다. 늙은 시동생이 오든 말든 관심 밖이었다. 한동안 대화의 주제는 찰스의 안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주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북부의 붉은 용, 군터 플레이슬리 그자한테 수모를 당하셨다죠?”

찰스는 헨리가 껄끄러워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예, 그……렇죠.”

“제가 희소식을 가져왔습니다.”

“희소식이라니요.”

“군터 그 작자와 그의 심복 솔샤르 말입니다. 그 인간들이 한때 비천한 노예가 아니었습니까?”

“그랬죠.”

“저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그 인간들의 주인이었던 검은 늑대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답니다. 그것도 벌써 3년이나 되었다지 뭡니까?”

“검은 늑대라고 하면 서쪽 에바논의 술탄이 아닙니까?”

헨리의 물음에 찰스의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 * *

[간이 좀 안 맞긴 했는데,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마리아는 노라의 말을 곱씹으며 침실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군터는 온천에 다녀왔는지 붉은 비단 가운을 걸친 채였다.

‘내 음식에 그런 악평을 하더니, 그래도 침대에선 내 몸을 원하겠지.’

마리아는 군터가 가증스러웠다. 아무리 오해라 여기려고 해도, 노라도 음식이 그리 맛있지는 않았다고 말했으니, 그의 돼지 밥 같다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수고했다, 훌륭한 식사 자리를 마련하느라.”

군터는 마리아에게 다가와 여느 때처럼 뜨겁게 키스했다.

“칭찬해 줘서 고마워요, 군터.”

마리아는 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다음에도 종종 이런 식사 자리 준비할게요.”

“아니, 하지 마라.”

“왜요? 맛이 없었나요?”

“맛이 없긴? 소중한 너의 손이 험해질까 봐 그런 거지.”

군터는 마리아의 열 개의 손가락에 일일이 입을 맞췄다. 순간 마리아는 그와 솔샤르가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돼지 밥 같은 것을 사람에게 주다니. 평생 못 잊는다.]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군터의 몸에서 튕기듯이 떨어졌다.

“왜 그러지?”

군터는 하얗게 질린 마리아의 얼굴에 놀란 터였다.

“피……곤해서요.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요. 침의로 갈아입고 올게요.”

마리아는 군터를 외면한 채 침실을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