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마리아는 무작정 침실을 나와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스톤의 방 앞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스톤은 라모나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데 스톤은 자신이 찾아올 줄 알았는지 그다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왕비님!”
되레 라모나가 더 놀랄 뿐. 마리아는 한달음에 달려가 라모나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라모나, 로랑은 대가를 치르고 있어요.”
“네, 왕성의 돼지 농장으로 끌려갔다는 말 들었어요.”
“그러니 더는 슬퍼하거나 과거의 기억으로 고통받지 말아요.”
“네, 왕비님. 아 참,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는 피곤해서 이만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라모나는 스톤의 뺨에 입 맞춰 주며 밤 인사를 대신했다. 이내 라모나가 나가자, 스톤이 마리아를 보며 말했다.
“마리아, 너무 애쓰지 마.”
“네?”
“마리아는 헬랜드의 왕비이지, 성녀가 아니란 소리야.”
스톤의 말에 뼈가 있었다. 자신이 라모나를 걱정하고 위로한 것이 그의 눈에는 꾸며진 행동처럼 보였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마리아도 남들 못지않게 마음이 너덜너덜하잖아. 그런데도 나는 왕비니까, 아니 본디 그런 존재로 태어났으니 누구든 자신이 어루만지고 살펴야 한다고 여기잖아?”
“!?”
마리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겐 그런 마음가짐이 너무도 당연하건만, 다른 이의 눈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애쓰는 건 기특해도 남의 평가를 너무 의식하면서까진 하지 말란 소리야.”
결국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평가가 나오게 되면 마음을 다치는 건 바로 저 자신이었다. 백번 옳은 말, 게다가 스톤의 조언을 듣고 나니 마리아의 뇌리에 스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다들, 가족이 해 준 음식은 못 먹어 봤잖아요?]
“엄마 노릇 하지 않아도 돼. 그들을 마리아가 다 품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 그건 오만이니까.”
“네? 오만이요?”
“헨리 왕의 정부에게 복수한 이유도 오롯이 라모나 때문이 아니잖아?”
“네……? 맞아요.”
제 복수심이 더 크고 시급했다. 그래서 라모나를 라스토니아 황궁으로 보내 세작 노릇을 시킨 것일 터.
“마리아는 저들의 상처를 다 품을 능력이 안 돼.”
그 말은 좀 충격이었다. 하지만 옳은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자신도 상처 많은 과거를 가진 사람일 뿐. 더한 존재는 아니라는 소리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마저도 저 자신은 태생부터 남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이 내면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지난 겨울잠을 자면서 다른 능력을 얻게 됐거든.”
“어떤 능력인데요?”
“군터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고 싶지 않아?”
“볼 수 있어요?”
“그래,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어.”
“뭔데요?”
“함부로 동정하지 말아야 해.”
“그저 이해만 하라는 건가요?”
“그래.”
* * *
찰스는 군터와 솔샤르의 노예 시절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들의 태생이 얼마나 비천하며 버러지 같은 존재인지에 대한 비하 발언이 대부분이었다.
“그놈들은 본디 짐승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돼지우리에 던져 주는 먹이를 같이 먹으며 자랐다고 하더군요.”
“어머! 불쌍해라.”
모니카답지 않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동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에로의 표정은 창백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매일 우마처럼 맞으며 땅을 기어 다니고, 가끔 흙바닥에 생고기를 던져 주면 두 놈이 냉큼 달려가 주워 먹었다지 뭡니까.”
“하하하- 그래서 그토록 무식한 거군요. 한데 그런 짐승 놈한테 일확천금이 떨어졌으니……. 쯧쯧.”
헨리는 찰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헨리는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군터가 어쩌다가 노예에서 북부의 대왕이 되었는지 말이다.
“교황 리베리오가 성지순례를 하다가 에바논에 도착을 했지요. 그때 술탄에게 학대받는 군터와 솔샤르를 보곤 경악했다더군요. 결국 리베리오 교황과 술탄 사이에 언쟁이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싸움이 크게 난 거군요?”
“그렇지요. 성전 기사단과 술탄의 병사가 붙었는데…….”
응당 성전 기사단의 승리였으며, 그 분을 참지 못한 술탄이 리베리오를 죽이려 했다. 그때 술탄의 척추에 칼을 꽂은 사람이 군터였다. 리베리오는 군터와 솔샤르를 데리고 라스토니아로 돌아와 스튜어트가에 맡길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짐승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여정 중에도 여러 번 난동을 부렸다.
보다 못한 성전 기사단장이 스튜어트가에 도착할 때까지 군터와 솔샤르를 결박하고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리베리오는 두 사람을 성전으로 데려가 한동안 보살피다가 북쪽 헬랜드를 개척하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그 신탁을 이행한 사람은 군터와 솔샤르였다.
“군터 그 짐승 때문에 술탄이 7년간 혼수상태였던 겁니까?”
“그렇다지요, 아마. 깨어난 건 3년 전이고. 그런데 말입니다, 앞으로 상황이 아주 재밌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
“술탄이 복수하려고 하겠군요.”
“예, 매일 칼을 갈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답니다, 리베리오 교황을 죽이고 두 짐승 놈에게 복수하겠다고 말입니다.”
헨리는 찰스의 말에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때마침 찰스의 눈이 음흉하게 변하며 헨리를 쳐다보았다.
“제가 폐하였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짐은 싫습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작자들과 얽히는 거, 딱 질색입니다.”
헨리가 거세게 도리질하며 몸서리를 쳤다. 또한 충격에 휩싸인 에로는 찰나였으나 찰스에게서 황좌에 대한 열망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힘든 역경을 딛고 왕국을 세우시다니. 정말이지 대단하신 분들이야.’
에로는 군터와 솔샤르가 비천하기보다는 되레 존경스러웠다. 저 같았다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 에로는 더 이상 진짜 쓰레기 같은 작자들과 비위가 상해서 같이 식사하기 힘들었다. 그가 일어서자, 모니카가 화들짝 놀라며 같이 일어섰다.
“왜요? 에론?”
“너무 무서운 이야기를 들어서 속이 안 좋습니다.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왕자가 듣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겠군요. 하지만 정치를 하다 보면 이렇게 험한 일도 겪는 거랍니다. 하하하!”
헨리가 거들먹거리며 웃자, 모니카는 제 아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굳이 식사 자리에서 그런 험한 말을 해서는?”
그녀는 헨리와 찰스를 번갈아 보며 타박했다.
* * *
마리아는 스톤이 보여 준 군터의 과거를 보곤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스톤의 말대로 함부로 동정하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해 참았지만, 밀려오는 자책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은 군터라는 남자의 단면만 보고 있었다. 과거에 만난 추억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건만, 자신은 군터를 잘 안다고 착각했다.
“저 에바논의 술탄은 정말이지 인두겁을 쓴 괴물이네요. 어떻게 같은 사람을 저렇게 취급할 수가 있죠?”
마리아는 과거를 비추는 거울을 보며 분노했다. 에바논의 술탄 ‘할라드’ 그는 군터와 솔샤르가 노예였을 적 주인이었으며, 자신이 보아 온 인간 중에 가장 악마 같은 존재였다. 소년이었던 군터의 등에 죄인의 낙인을 찍다 못해, 매일 채찍질을 가하다니. 결국 마리아는 끝까지 보지도 못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제 오해가 얼마나 철없는 투정에서 기인했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자신이 저들에게 베푸는 사랑에 그들은 당연히 고마워하며 감동해야 한다는 교만을 부렸던 저 자신이 창피했다. 또한 자신이 겪은 고난은 결코 가장 비극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제가 철이 없었어요. 그저 제 음식이 맛없어서 그런 줄 알고.”
마리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스톤이 헛기침하며 대답했다.
“맛은 없지만, 가슴 벅차게 행복한 맛이었다.”
“정말이요? 하지만 스톤은 드시지 않았잖아요?”
“군터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나는 앞의 말이 중요해서 말이지……. 어디 갔지?”
마리아는 이미 방을 나간 후였다.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다. 제 딴에는 정말 잘해 보려고 했는데, 혼자 오해나 하고. 무엇보다 자신은 군터에 관해서 그다지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스톤이 보여 주지 않았다면 그가 얼마나 비참한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군터는 자신이 그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자체를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를 아는 것도 중요한 거니까. 게다가 군터와 저는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기에, 언제든 불협화음이 생길 수도 있을 터. 마리아는 갑자기 군터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다급히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길이 엇갈렸는지, 군터는 마리아를 찾아서 스톤의 방으로 찾아왔다.
“마리아는?”
“보면 알잖아. 여기 없어.”
구시렁대는 스톤의 목소리에 군터는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늙어지더니, 매사 불만투성이지?”
“원래 노인들은 그런 거다. 걱정도 많고 잔소리는 심하고 말이야. 그런데 말이지, 마리아는 군터의 소유물이 아니야.”
“!?”
군터는 제 속내를 꿰뚫어 보는 스톤의 말에 놀랐다. 예전에는 자신을 무서워해서 말을 가려 했는데.
“원하는 사람으로 길들이려 하지 말라고. 이름이 마리아지, 진짜 성녀는 아니니까.”
“내가 마리아를 억압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곁에 두고 원하는 모습으로 살길 원하잖아?”
“그건……!”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하지 못했다. 마리아가 더는 복수의 화신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녀가 원하는 앙갚음은 자신이 전부 대신 할 테니, 저만을 치유해 주길 바랐다.
“마리아가 곁에 있을 때 잘해 줘.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무슨 소리야. 마리아는 평생 내 곁에 있을 건데.”
“사람의 목숨은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스톤은 점점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놨다. 화가 난 군터는 기어이 스톤의 멱살을 거머쥐며 들어 올렸다.
“캑!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른한테 이리 함부로 해도 되는 게야?”
“말해? 무얼 감추고 있는지?”
군터는 무섭게 스톤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마리아는 단명할 거야.”
스톤의 쪼글쪼글한 입술을 비집고 기함할 말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