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마리아는 침실 앞에 도착하자, 손이 떨려서 문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문손잡이를 잡곤 멍하니 상념에 빠졌다. 그러다 마리아는 슬슬 뒷걸음질 치며 복도를 지나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스톤이 제게 보여 준 군터의 과거는 차갑게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제 몸과 영혼을 때렸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군터에겐 제 눈물 바람 따윈 필요치 않으니까. 그에겐 값싼 동정보다는 칭송해야 마땅했다. 그런 상황에도 죽지 않고 버티며 나라를 세운 군터가 위대해 보였다.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그는 ‘군터 플레이슬리’라는 영웅의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저라면 어땠을까? 마리아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님이 죽었다고 저마저 겁을 먹고 죽으려 했었지. 그것도 몇 번씩이나.
‘군터는 지옥에서 살았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자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제 허파에 맴도는 이 열기는 무엇일까. 심장은 요란스레 박동하고 뜨거운 소용돌이가 온몸을 휘저었다. 마리아는 발코니를 잡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군터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군터의 노예 시절부터 제 나이 열다섯 살의 추억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이 뇌리를 스쳐 지났다. 그제야 두 사람의 관계가 명확해지며 완성되는 것만 같았다.
마리아는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도 보이는 건 오로지 군터였다. 순간 처절하게 깨달았다.
‘나는 군터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이토록 마음이 아픈 거였다. 군터를 위대하다 여기지만 그가 겪었을 그 고통의 세월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다고 이 감정이 황후였을 때의 습관처럼 단순한 애민 정신은 아니었다. 그를 남자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 이제는 너무 소중했다.
마리아는 군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자, 마음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끝내 상처받을 거라고 여긴 탓에 마음 한구석을 꼭 닫아 놓았건만, 사람의 감정은 절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사랑해야지, 그리고 마음껏 아껴 줄 거야.’
더는 겁쟁이처럼 도망치지 않을 참이다. 어차피 군터를 사랑하지 않아도 마음은 괴로울 테니까. 그럴 바엔 죽는 날까지 그를 열심히 아끼고 사랑해 볼 생각이다. 마리아는 제 속에서 불길처럼 치솟던 감정을 가라앉히곤 다시 침실로 향했다. 드디어 침실 앞에 도착하자, 맞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군터.”
“마리아.”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응시했다. 역시 길이 엇갈렸던 모양이다. 그렇지, 이토록 오래 그의 곁을 비웠으니 군터가 찾아 나서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을. 마리아는 그를 보자,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 남자가 진짜 내 운명이었어.’
그녀는 그대로 군터를 향해 뛰어가 그의 품에 안겼다. 군터도 기다렸다는 듯이 마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소란스레 요동치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감격에 젖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반드시 지금 말해야 했다. 그녀는 군터의 품에서 나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리아, 왜?”
군터는 의아한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제 두 손을 맞잡은 채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군터.”
“?”
“제가 당신을 많이 사……랑해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마리아의 떠는 모습. 소녀처럼 발그레해진 얼굴이 너무 예뻤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뭐?”
“앞으로, 아니 영원히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마리아.”
“제가 많이 아껴 줄게요. 그래도 되죠?”
마리아의 애절한 고백에 군터의 청록빛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더불어 극도의 혼란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군터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마리아를 보다가 이내 목소리를 떨며 그녀의 고백에 응답했다.
“당연하지. 평생 내가 원하던 일이야.”
“사랑해요.”
“사랑한다, 나의 마리아.”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향해 다가서자, 군터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어째서 신은 가장 행복할 때 시련을 함께 주는 것일까. 이제 다 되었다, 여겼고 불행은 끝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겪어야 할 시련이 더 남았다니.
‘나는 절대 너 먼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리아의 잿빛 머리를 매만지는 군터의 손이 떨렸다. 그러나 그는 스톤이 제게 했던 말을 뇌리에서 떨쳐 내고자 연신 도리질했다.
* * *
에로는 라모나가 보낸 서신을 읽곤 바로 불태웠다.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자신이 라스토니아에 온 목적을 하나씩 실행할 때가 되었다. 때마침 낸시가 에로를 찾아왔다.
“왕자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예, 그러잖아도 저 또한 아크만 부인께 용건이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요?”
에로는 반색하는 낸시를 향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결정적인 순간에 마리아를 무참하게 배신한 낸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생긴 건 참 순박한데 말이지.’
낸시는 누가 봐도 그런 배신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뭐, 진짜 사기꾼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니까. 그래서 모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는 거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왕자님.”
“그러시죠.”
“저를 이 나라의 황후로 만들어 주세요. 솔직히 저는 출신도 좋지 않고, 받쳐 줄 배경도 없어요. 어쩌면 선황후께선 이 순간에도 외국의 황녀들을 새 황후감으로 물색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낸시는 매우 비장했다. 그러나 에로는 크게 놀라지도, 그렇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되레 철저하게 제 감정을 감췄다.
“매우 유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시기가 딱 떨어질까. 라모나가 보낸 서신에도 낸시를 반드시 황후로 만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건 자신이 헬랜드를 떠나기 전부터 마리아에게 들은 계획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정말이세요?”
“다만…….”
“?”
“제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만 제 손에 쥐여 주시면 아크만 부인을 이 나라의 황후 자리에 앉혀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뭔지 말씀해 주세요.”
에로가 흔쾌히 수락하자, 낸시는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역시 제게 대운이 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평생 헨리 곁에서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로랑도 수월하게 떼 버리고, 말이다. 이제까지 라모나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것이 하나도 없으니, 아마도 키르탄의 왕자는 신이 제게 내린 축복일 것이다.
‘내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마리아는 어차피 군터, 그 남자가 잘 보살펴 줄 거니까. 어떻게 보면 더 잘된 거지 뭐.’
에로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 아주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왠지 제 꿈이 금세 이뤄질 것만 같은 좋은 느낌이 든달까.
“말씀해 보세요. 왕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게 무엇이신지?”
“모니카.”
“네? 뭐……라고요?”
낸시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왕자가 방금 뭐라고 했지. 자신을 황후로 만들어 주는 대가로 모니카를 원한다고 했나. 왕자가 어머니뻘 되는 여자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낸시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저는 모니카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 그녀를 키르탄으로 데려가고 싶어요.”
“어째서요?”
“이유가 필요합니까?”
아니지, 굳이 이유를 알아서 뭐 해. 선황후가 제 앞에서 사라지면 저한테는 아주 좋은 일인데. 이건 분명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미치도록 궁금하긴 했다.
“모니카를 데려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다면, 아크만 부인의 소원을 이뤄 드리지요.”
“예, 그리할 거긴 한데요. 제가 조금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사랑합니다.”
“!?”
전혀 믿기지 않으나, 진짜 사랑이 아니면 또 어찌할 건데. 이유를 알았으니 그것으로 된 것을.
* * *
사랑을 확인한 군터는 어느 때보다 흥분했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 듯이 두 사람은 나신이 되어 하나로 얽혔다. 마리아가 내지르는 교성에 한껏 흥분한 그는 더욱 거칠게 몰아쳤다. 지금도 귓가에 선하다, 마리아의 감미로운 고백이.
[사랑해요. 제가 많이 아껴 줄게요. 그래도 되죠?]
그녀의 고백을 상기하자, 척추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온몸의 피가 제 분신으로 몰리며 마리아를 향한 욕망이 한층 부풀어 올랐다.
“아……. 윽!”
마리아는 오늘따라 군터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의 욕망이 제 생살을 뚫고 나올 것처럼 거대한 압박감에 눌려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래도 좋아.’
그와의 섹스는 언제나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고 마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몸과 마음을 나누는 성스러운 행위. 처음에는 몰랐다.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 건, 곧 감정도 교감하는 행위라는 것을. 그와 사랑을 할 때마다 더 많은 감정이 샘솟아 서로에게 흘러들고 있음을 느지막이 알아차렸다. 이렇게 그와 섹스하는 중에도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만 같으니까. 순간 마리아는 이르게 절정에 다다랐고, 군터도 임박했는지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잡은 채 짐승처럼 포효했다.
“마리아, 입 벌려.”
그는 성난 욕망을 마리아의 입에 욱여넣었다. 물론 그녀는 소중한 아기를 대하듯이 부드럽게 그를 감싸 주었다.
헉헉헉- 군터의 잇새에서 거친 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 으…… 윽!”
드디어 응축된 그의 욕망이 하얗게 터지며 그는 활처럼 몸을 휘었다. 군터는 마리아의 위에서 몸을 부르르 떨곤, 하얗게 젖은 그녀를 보았다. 이내 그는 마리아의 얼굴을 적신 액체를 손으로 훔치곤 그녀의 온몸에 묻히기 시작했다.
“짓궂어! 정말!”
마리아가 앙탈을 부리자, 군터는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내 것이라고 표시하는 거다. 네 살에 내 냄새가 흠뻑 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