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격정적인 사랑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에 기대 온기를 느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둘의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마리아는 더 이상 군터를 오해하지 않기에, 그에게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물어볼 수 있었다. 이젠 그가 무어라 대답해도 아무렇지 않기 때문이다.
“군터, 오늘 제 요리 말이에요. 형편없었죠?”
“조금 짜긴 했지만, 가슴 벅찼다.”
역시 스톤이 알려 준 대로였다.
“맛이 어떻든 마리아가 모두를 위해 요리를 했다는 자체가 좋았거든. 난 그것으로 충분하다.”
“음, 다음에는 주방장한테 제대로 배워서 해 볼게요.”
“마리아, 그보다는 내일부터 나와 왕성 곳곳을 살펴보는 게 어떻나?”
“아, 그것도 고민하고 있었어요.”
군터는 도시 계획이 가장 시급하다고 여겼다. 마리아가 요리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왕비로서 왕성 건립에 신경 써 주길 바랐다. 게다가 그쪽으로 능력이 있기도 하니까.
“이런 말 한다고 기분 나빠 하지 마라.”
군터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뭔데요?”
“흠, 마리아는 여자들이 쉽게 하는 일에는 그다지 재주가 없단 말이지. 대신 내가 잘하지 못하는 정치나 외교에는 웬만한 남자들보다 특출 나지. 경험도 많고.”
마리아는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감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열정을 쏟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또한 잠시 잊고 있었다. 저 자신은 누구보다 욕심이 많다는 것을. 게다가 쓸데없이 완벽주의자였다. 어릴 때부터 스튜어트가의 공녀로서 무엇이든 잘해 내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괴롭히던 버릇이 지금껏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군터, 저는 헬랜드의 왕비로서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래. 고맙다.”
군터의 목소리는 활기찬데 어째서 눈빛은 저토록 슬픈 걸까. 마리아는 이제껏 보지 못한 군터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주무세요. 피곤해 보여요.”
“같이 자야지.”
군터는 마리아와 잠자는 것도 함께하고 싶어 동시에 눈을 감자고 제안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 같이 잠들고 깨는 일상, 그 단순한 일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다. 얼마 뒤, 새근거리는 마리아의 숨소리에 군터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마리아가 준비한 만찬이 끝난 후, 솔샤르와 했던 대화를 상기했다.
[대왕, 진짜 가족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물론 왕비님의 솜씨는 좀…….]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를 가족이라 여기며 정성을 다한 그 마음이 예쁘잖아.]
[그렇죠. 그런데 말입니다. 너무 행복한데 어째서 지옥 같은 과거의 일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돼지우리에서 짐승처럼 끼니를 때우던 때가 눈앞에 선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정말이지 최고급 요리를 먹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런 상황을 사람들은 감동이라 말하는 거겠지. 너무나 상반되는 상황이 연출됐으니 당연히 예전의 안 좋은 기억이 강제로 소환이 되었을 터. 군터와 솔샤르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를 응시한 채 아련하게 바라볼 뿐. 군터는 그런 어색한 분위기가 민망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꺼냈다.
[돼지 밥 같은 것을 사람에게 주다니. 평생 못 잊는다.]
[예, 저도 그렇습니다. 아주 징글징글합니다.]
그러나 다 지난 일인 것을. 헬랜드에 오면서 에바논의 악몽은 사막에 묻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간혹 악몽으로 찾아와 사람을 괴롭히거나 기억하는 것조차 괴로워서 광기를 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솔샤르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만큼 치유가 되었다는 증거겠지. 물론 완벽하게 치유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군터는 스톤의 경고가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아팠다.
[마리아는 단명할 거야.]
아니, 절대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테다. 스톤이 비극을 피하는 방법도 알려 주었으니, 충실히 따르면 될 터.
‘나 하기에 달려 있어.’
그나마 다행인 건, 마리아의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인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시 세상에 완벽하게 행복한 존재는 없는 모양이다. 겉으로 보기엔 모두 가진 듯해도 하나씩 결핍된 무언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런 법칙에는 저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 * *
마리아는 스톤의 방에서 에로에게 서신을 쓴 뒤, 불에 태웠다. 스톤이 보여 준 군터의 과거 중에서 악마처럼 잔혹했던 술탄 할라드가 잊히지 않았다. 그는 군터와 솔샤르를 조금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단언컨대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악독한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에바논의 술탄, 할라드가 깨어났단 말이지.’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가 군터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있음을 알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톤이 군터에겐 함구하라고 해서 그리할 테지만 상기할수록 소름이 끼쳤다. 어쨌든 군터와 다시는 엮이지 않는 게 가장 좋을 터. 혹여 다시 만나게 되면 큰 싸움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더구나 교활한 찰스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헨리를 부추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헨리, 이 멍청한 인간아.’
정작 본인만 모른다. 찰스가 호시탐탐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사내는 늙어도 권력에 대한 열망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사실 헨리는 군터에게 진 빚보다 찰스를 더 조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차라리 헨리와 찰스, 둘 다 파멸시키는 편이 나을 터.
한편 에로는 손바닥에 치솟는 파란 불꽃이 서서히 종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때마침 마리아한테서 서신이 도착했다. 에로는 마리아가 보낸 서신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이내 에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불에 태워 없앴다. 역시 제 예상대로 마리아도 같은 계획과 걱정을 하고 있었다.
‘찰스 대공을 경계하라는 거지.’
하지만 그 전에 모니카와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야 저도 헬랜드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솔샤르 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매일 밤, 어둠처럼 내려앉는 솔샤르를 향한 그리움만 빼면 모든 게 재밌었다.
‘노라한테 보여 주고 싶어 죽겠네. 내가 얼마나 타고난 배우인지.’
저 자신도 이따금 깜짝 놀라곤 한다.
‘역시 난 극단에 들어가 배우가 되어야 했어. 이 타고난 끼를 어찌할 거야.’
에로는 밤에 모니카와 산책을 하기 위해 최대한 화려하게 치장했다. 오늘 밤이야말로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에로가 하얀 대리석 기둥이 즐비한 회랑에 도착하자, 저 멀리 모니카가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는 한 무리의 시녀들을 이끌고 다니지만, 저와 만날 때만큼은 항상 혼자였다.
“모니카.”
에로가 그녀를 부르자, 모니카는 반색하며 뛰어왔다.
“에론.”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뇨. 기다림조차 즐거웠어요.”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모니카의 화장과 향수 냄새가 에로의 코끝을 자극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지만, 에로는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모니카의 손을 거머쥐었다.
“!”
에로는 모니카와 손을 잡고 달빛이 쏟아지는 회랑을 걸었다.
“모니카, 할 말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녀는 짐작했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제가 모니카한테 적정선의 거리를 둔 이유 말이에요.”
“?”
“모니카의 조건을 보고 접근한 젊은 남자. 듣도 보도 못한 왕국의 왕자랍시고 돈은 많지만, 별거 없는 배경에 열등감을 가진 나머지 모니카를 이용한다는 소문이 날까 봐 몸을 사린 거예요.”
“그런 의도가 아닌 거 알아요, 에론.”
“아뇨. 그런 의도 맞아요.”
“네?”
“솔직히 처음에는 저의 열등감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모니카에게 접근했어요. 그런데 아무런 편견 없이 저를 받아 주는 모니카의 순수함에 빠져 버렸습니다.”
에로는 두 손으로 모니카의 두 뺨을 감싸곤 그녀를 유혹하듯 바라보다, 지그시 입 맞췄다. 그리고 에로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모니카가 제 키스에 물에 닿은 설탕처럼 녹고 있다는 것을. 기나긴 입맞춤이 끝난 뒤에도 모니카는 키스의 여운에 빠져 금세 눈을 뜨지 못했다. 에로는 모니카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오늘 밤 반드시 해야 할 말을 꺼냈다.
“모니카, 저와 혼인해 주시겠어요?”
애틋한 어조로 고백하듯.
“네……? 혼인이요?”
잔 여운에 빠져 있던 모니카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물론 에로의 예상대로 모니카의 눈은 환희로 가득했다.
“어려울 거란 거, 알아요. 우리의 나이 차이와 저의 보잘것없는 출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겠죠. 소국의 왕자가 감히 라스토니아의 선황후를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한다고 말입니다.”
“아뇨, 아뇨. 그런 거 신경 쓰지 말아요. 혼인해요. 아니, 하고 싶어요. 에론, 저 당신 사랑해요.”
모니카는 아주 필사적이었다.
“진심……인가요, 모니카?”
에로는 야릇한 눈으로 모니카를 응시하다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쓸며 물었다.
“그럼요.”
“모니카, 우리의 혼인이 무사히 치러지려면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뭔데요?”
“낸시 아크만 부인을 새 황후로 만들어야 해요.”
“네? 하지만 폐하는 아직 폐황후와 이혼이 안 된 상태라 불가능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알고 있으니. 그것만 있으면 아무도 나와 모니카의 결합을 막지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