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68화 (68/120)

68화

모니카는 에로의 말을 듣고 두 눈이 커다래졌다. 세상에, 볼모로 잡혀간 폐황후가 헬랜드의 왕비가 되다니. 더구나 헨리와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인 것을. 하지만 에로는 그것이 헨리가 군터에게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며, 되레 위자료까지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낸시를 새 황후로 책봉함으로써 돌아선 제국민의 민심을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에론, 당신 말이 다 옳아요.”

절대 분개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냉정하게 이해타산을 따져야지.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기 마련이라더니. 딱 그 상황이었다. 마리아가 이렇게 알차게 쓰임새가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게다가 원래 양심의 가책 따윈 없었으나 마리아를 폐위한 것이 오히려 저 자신에겐 큰 행운을 가져다준 셈이었다. 그러니 미안함보다는 마땅히 위자료를 잔뜩 뜯어내는 편이 이치에 맞았다.

‘애도 못 낳은 석녀를 그렇게 비싸게 팔아 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모니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말이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흠모하는 남자에게 청혼을 받은 것도 모자라, 라스토니아 황실의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 버렸다.

“에론.”

모니카는 너무 들뜬 나머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에로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 함께 보내는 게 어때요?”

‘어머! 이 여자가 미쳤나 봐.’

에로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아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같이 밤을 보내자니. 자신이 완전한 남자였어도 모니카는 제 취향이 아니었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뱀처럼 교활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키스도 역겨워서 죽을 뻔했는데.’

에로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모니카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키르탄에선 혼인 전에 신부와 동침하지 않습니다.”

“네? 왜……요?”

“순결한 신부를 망가뜨리는 부정한 행위니까요.”

“하지만……!”

“모니카가 키르탄의 관습을 존중한다면 제 뜻을 따라 줄 거라 믿어요.”

“당연하죠. 저는 에론의 나라를 존중해요.”

말은 그리했으나, 모니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와 곧 혼인하면 에론 티크는 영원히 제 남자가 되는 것을. 귀한 것을 얻고자 한다면 인내할 줄도 알아야지. 모니카는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살면서 에론처럼 탐나는 남자는 없었기에 섣불리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모니카와 에론은 헨리와 낸시에게 자신들의 혼인을 알렸다. 물론 에로는 낸시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적절히 조율해 나갔다. 헨리의 처음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모니카와 에론의 설명에 그는 점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가 군터 플레이슬리와 재혼하여 헬랜드의 왕비가 되었다는 소식은 꽤 충격적이었다. 대략 그런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고 예상은 했으나, 막상 실제로 일어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고.’

마리아를 폐위하고 그녀의 가문을 멸문한 것도 본인이며 볼모로 헬랜드로 보낸 버린 것도 제 손으로 했다. 또한 군터와 마리아의 인연을 알고도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마음에는 담아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헨리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순간 그의 뇌리에 마리아와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마리아는 황후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자처럼 매사 완벽했다. 물론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한 것만 빼고. 심지어 로랑과 외도하는 남편을 채근하지도 않았다. 한데 왜 이제 와서 그녀의 깊은 마음 씀씀이가 보이는 걸까.

“어머니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헨리의 대답에 모니카와 낸시는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헨리는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왠지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폐하, 저 아직 젊습니다. ……이혼은 안 됩니다.]

자신이 기억하는 마리아는 이혼만큼은 당하지 않으려 강경했던 모습이었건만, 그런 그녀가 어째서 야만인의 아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건 마리아답지 않아.’

헨리는 마리아의 재혼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심장이 화염에 휩싸인 양 뜨거웠다.

‘짐에게 먼저 허락을 받았어야지. 그게 상식 아닌가. 아직은 짐이 네 남편인 거잖아.’

폭풍처럼 밀려오는 서운함과 상실감.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마리아와 로랑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영원한 사랑도 없지만 미움도 그렇다더니, 한때 죽도록 밉기만 하던 마리아가 점점 그리워지던 차였다. 로랑이 곁을 떠난 뒤, 제 주위를 둘러보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 가슴에 간절함이 차올랐다.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게 돼 버렸다.

‘마리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심 그녀는 자신 외에는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을 줄 알았건만. 그토록 이혼당하지 않으려 할 땐 언제고. 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에이든의 안내로 군터와 마리아는 왕성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이주민들이 기거할 집을 마련해 주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3년간은 집세를 따로 받지는 않을 거지만, 이주민들이 일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해요.”

마리아는 마음이 급했다. 여느 나라처럼 헬랜드도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길 바랐다. 왕국민들은 경제 활동을 하고 마땅한 세금을 내며 왕은 그것으로 나라를 경영하는 것. 그래도 행정 체계는 타국에서 데려온 학자들로 인해 점점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대왕, 배수로 공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주민들이 자신들이 살 나라인데도 일하기를 꺼립니다.”

에이든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군터는 한동안 고민을 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당연하지. 나 같아도 일을 안 해. 새로 이주한 나라에 무슨 애국심이 있겠느냐? 이참에 배수로 공사를 통해서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편이 옳다.”

군터의 말에 에이든의 뇌리가 번쩍였다.

“그렇습니다. 손에 돈을 쥐어 봐야 이곳에 애착을 느낄 겁니다.”

돈벌이가 되는 나라라는 인식이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고 애정도 생기는 법이니까.

“앞으로 공사는 이주민들을 활용하도록 해. 물론 그에 맞는 임금 책정은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대왕.”

하지만 마리아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직도 어수선한 왕성 거리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군터, 타국에서 도시 계획 전문가를 데려와야 해요. 에이든 오라버니 혼자는 힘들어요.”

본디 에이든은 법학자로 도시 건립에 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니 에이든에겐 버거운 업무였다. 그때 에이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치 답을 아는 듯한 얼굴로 군터와 마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대왕, 왕비님.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뭐지?”

“리베리오 교황님께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제가 교황청에 다녀오겠습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네요.”

마리아도 수긍했다. 리베리오가 적당한 학자들을 골라 헬랜드에 가도록 권유하면 모두 흔쾌히 수락할 터.

“그렇게 하도록 해. 재정적인 지원은 아끼지 않을 테니.”

군터도 허락했다. 그는 얼마 전 교황과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원래 교황은 타국 황실의 내정간섭은 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더구나 리베리오는 교리에 어긋나거나 세상이 정한 규칙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뿌리인 스튜어트 가문이 수난을 당하는 데도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신의 경지에 오른 신성력으로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예지하곤, 오랜만에 자신을 불러 부탁을 했었다.

[군터, 마리아를 부탁해도 되겠느냐?]

[교황께서 왜 제 여자를 부탁하십니까? 마리아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으이구, 무식한 녀석 같으니. 말하는 본새하곤. 허허허-]

잠시 상념에 빠진 군터를 깨운 건 마리아였다. 그녀는 군터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더니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군터, 여기에 광장을 만들어요. 큰 분수도 세우고요.”

“그래.”

“사람들이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도 빌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좋지.”

“에이, 그렇게 다 좋다고만 하면 어떡해요?”

“마리아가 좋으면 나도 좋은 거니까.”

그녀가 어련히 잘하려고. 마리아의 머릿속에 있는 설계도를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그저 마리아가 하자는 대로 지지해 주면 되는 것을. 군터는 마리아가 가진 모든 계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와 같은 꿈을 꾸고 하나씩 이뤄 가는 것 자체가 제겐 크나큰 대업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는 왕성 거리 곳곳을 다니며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맞춰 나갔다.

‘라스토니아보다 발전된 나라로 만들 거야.’

마리아의 가슴에는 헬랜드가 버려진 북부의 황무지가 아닌, 누구나 꿈꾸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차올랐다. 리베리오에게 도움을 청하면 헬랜드로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들 터. 그들과 함께 하나씩 차근차근 이뤄 가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군터의 든든한 지지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였다. 마리아의 그림자 속에 하얀 들꽃이 빼꼼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런 거친 땅에도 꽃은 피어나다니.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꽃을 매만졌다. 덥석 꺾어 버리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쁜 꽃이었다.

‘염려 마, 나는 너를 꺾지 않을 거니까.’

마리아는 손가락으로 꽃을 톡톡 건드리며 웃었다. 마침 뒤쪽에서 군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아, 무슨 일이지?”

멀리 서 있던 군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한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 의아했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꽃을 보고 있었어요.”

마리아는 고개만 돌린 채 군터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군터의 굳은 얼굴이 풀리는 게 보였다.

‘나 이제 갈게. 시들지 말고 오랫동안 피어 있으렴.’

들꽃에게 인사하고 막 일어서려는 순간, 마리아는 눈앞이 하얘졌다.

“!”

그녀는 그대로 멈춘 채,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쥐었다. 이내 속이 매스꺼워지며 심한 구토가 일었다.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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