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71화 (71/120)

71화

헨리는 진흙탕처럼 탁한 심정으로 군터에게 서신을 작성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재혼한 것에 대한 항의 서한을 쓸까 했지만, 오랜 고심 끝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1000만 골드를 갚을 테니, 볼모로 데려간 마리아를 돌려 달라고 썼다. 물론 돌려주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마리아가 헬랜드의 왕비가 된 것도 익히 알지만, 아무것도 모른 척할 생각이다. 적어도 서신 안에서는.

“무어라 쓰셨어요?”

낸시는 헨리의 곁에서 신경을 곤두세운 채 물었다. 제발 헨리가 마리아와 이혼해야겠다는 말을 거론했으면 했다.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썼다. 빚을 갚을 거니까.”

“그……게 전부예요?”

낸시가 다소 실망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헨리가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이 종이 한 장에 짐의 수를 다 보여선 안 되지 않느냐? 그래야 군터 그 작자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죠. 당연합니다, 폐하.”

“낸시, 염려하지 마라. 마리아와 이혼한 다음 날 너를 황후로 책봉할 테니.”

“예? 진정이세요?”

“그럼.”

마리아의 가슴에 다시 한번 생채기를 내야지. 사실 처음에는 마리아가 군터와 재혼했다는 말에 역정도 났으나, 이젠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자신이 마리아 스튜어트를 모르던가. 아주 어릴 적부터 봐 왔는데. 그녀는 명예에 죽고 사는 귀족이었으며 황후였다. 그런 여자가 천하디천한 군터 플레이슬리와 좋아서 재혼했을 리가 없다.

‘마리아는 짐을 향한 분노와 배신감에 군터를 이용한 거야.’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여전히 라스토니아의 황후로 돌아오고 싶어 할 것이다. 그뿐인가? 남자라곤 태어나 저밖에 모르는 여자인 것을. 다른 남자한테 쉽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또 모르지, 마리아가 간절하게 애원하면 다시 받아 줄 의향이 없진 않았다.

‘마리아는 군터 플레이슬리에게 억압당하며 평생 불행하겠지?’

“폐하, 서신을 보내도 그쪽에서 빨리 오지는 못하겠죠?”

“글쎄다. 헬랜드에서 라스토니아까진 아주 머니까. 빠르면 두 달, 늦으면 서너 달 더 걸리겠지.”

‘뭐야? 그럼 국혼까지 적어도 6개월은 걸린단 소리잖아.’

낸시는 실망감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시간은 빠르니까. 이제까지도 참고 기다렸는데 그까짓 6개월이 뭐라고.

헨리는 서신을 마무리한 후, 헬랜드로 보낼 신하에게 건넸다. 그 순간에도 군터의 얼굴에 에론이 준 어음을 던질 상상을 하니,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물론 군터는 그 어음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빚만 갚으면 더는 그런 짐승 같은 인간한테 굴욕당할 일은 없을 터. 아니,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

‘마리아, 기대하고 있을게. 짐승의 마누라가 된 너의 비극적인 모습을.’

세상 어떤 남자도 제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하는 석녀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는다. 군터라고 다를까, 그토록 돈이 많으니 저보다 많은 여자를 곁에 둘 터.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린애 장난 수준이지.

“낸시, 엄마는?”

“에론 왕자님과 오붓한 시간 보내고 계세요.”

“좋군.”

에론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어도, 제게서 골칫덩어리를 해결해 주니 귀인으로 받들어야지. 부모라고 해서 다 같은 부모가 아닌 것을. 모니카 같은 어미는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이 들었다. 한데 알아서 머나먼 곳으로 데려가 준다니. 얼마나 크나큰 행운인지 모른다.

* * *

마리아의 구토는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일어나더니, 급기야 체한 듯이 속이 더부룩했다. 심하면 현기증에 눈앞이 핑 돌기도 했다.

‘병이 생긴 건가.’

살면서 이렇게 아파 본 적이 없었다. 음식을 잘못 먹어서 속이 좋지 않아도 약제사가 준 약을 먹으면 금세 낫곤 했다. 한데 이번에는 조금 이상했다. 아무래도 군터의 말대로 궁의에게 제 몸을 보여야 할 듯싶었다. 때마침 차를 가지러 갔던 노라가 마리아의 응접실로 돌아왔다.

“왕비님!”

“!?”

사뭇 격앙된 노라의 목소리에 마리아가 더 놀란 터였다. 마리아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노라는 은쟁반을 든 채 멍하니 마리아를 보고 있었다.

“왜요?”

“왕비님의 머리가……!”

노라는 마리아와 오붓하게 차를 마실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응접실로 돌아왔다. 마침내 문을 여는 순간, 유리창을 통해 쏟아진 햇살에 마리아의 머리카락이 금색으로 빛나는 광경을 목격했다. 아직은 머리 전체가 금색이 아닌 잿빛이나, 정수리 부분이 선명한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거울을 보세요.”

노라의 말에 마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거울로 향했다. 그런데 거울 속에 비친 뜻밖의 모습에 마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머리가……!”

금발로 돌아오고 있었다. 라스토니아를 도망치듯이 빠져나왔을 때는 잿빛으로 변했던 머리카락이었다. 무슨 조홧속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바뀌고 있다니. 동시에 마리아는 심하게 구토를 했다.

“우웩!”

가까스로 손으로 입을 막았으나, 속이 뒤집혀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노라는 그대로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곤 궁의를 부르러 뛰쳐나갔다. 노라는 복도를 뛰는 순간에도 긴장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에궁, 대왕님도 궁에 안 계시는데. 일을 어째……!’

군터는 부관들을 이끌고 며칠간 마석 채굴장 시찰을 나간 터였다. 하필 군터가 없을 때 마리아가 아플 게 뭐람, 나중에 그가 돌아와서 역정 낼 모습을 떠올리니 오금이 다 저렸다. 평소의 군터는 매우 관대한 편이나 마리아에 관해선 정반대였다. 이번에 채굴장으로 시찰을 나가기 전에도 제게 신신당부도 모자라 반은 협박한 것을.

[노라, 내가 없는 동안 마리아한테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그럼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아파서도 안 되고 지난번처럼 위험한 일을 당해서도 안 된다는 소리다.]

[예……. 제가 왕비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에잇, 시녀를 시켜서 궁의를 데려올 것을. 괜스레 마음이 급해서 자신이 뛰쳐나오고 말았다. 평생 시녀를 부려 봤어야지. 이젠 헬랜드의 시녀장인데도 몸은 비굴하게 먼저 나서곤 한다. 이내 노라는 지나는 시종을 보곤 바로 걸음을 멈췄다.

“궁……의를 데려와라.”

“예, 시녀장님.”

노라는 곧바로 돌아서 왔던 길을 다시 뛰었다. 그러다 불현듯이 뇌리를 때리는 깨달음에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가슴을 들썩이던 노라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잠깐, 왕비님이 지난달에 월경이 없으셨던 것 같어.’

노라는 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듣기론 마리아는 석녀라서 폐위가 되었다고 했다.

‘아니지, 왕비님이 본인 입으로 자기가 석녀라고 하신 적은 없잖어.’

더구나 근래에 그녀가 보인 증상은 딱 그것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궁의! 어여 갑시다.”

“예, 시녀장님.”

노라는 궁의와 함께 마리아에게로 돌아갔다. 드디어 노라가 궁의를 데리고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시녀들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때렸다.

“이게 무슨 일이여!”

노라는 제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비님!”

마리아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고, 시녀들은 그녀 주위에 모여 울고 있었다.

* * *

군터는 한 달 걸릴 일정을 단 사흘에 끝낸 뒤, 왕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하늘을 나는 새들이 보였다.

‘이럴 때 제이미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제이미가 궁에 있었다면 비페르의 눈알로 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보여 줬을 텐데. 아니면 제이미가 떠나기 전에 라모나한테 방법을 알려 주라고 할 것을. 제이미가 당시 비페르의 눈알을 증류한 술통에 여러 개 저장해 놓았다는 말을 했건만, 왜 이제야 떠올랐는지. 시기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 궁을 떠날 때도 그랬지만 돌아가는 이 순간마저도 마음이 불안했다.

자신이 궁을 비운 사이 왠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함이 들었다. 과도한 비약이란 것을 알지만, 스톤의 예언은 사람을 두려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그래서였을까, 군터는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심장 쪽이 뻐근하다 못해 이내 빠르게 박동했다.

‘빌어먹을 자식!’

그는 스톤을 떠올리며 속으로 욕을 되뇌었다. 그의 욕이 스톤에게 전해졌을까, 곧바로 군터의 귓가에 스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터, 어서 돌아와. 기어이 일이 벌어졌어.’

다급한 스톤의 목소리, 자신이 헬랜드 밖으로 나갔다면 결코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을 터. 한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호했다. 기어이 마리아에게 우려했던 일이 생겼음을 알게 된 순간, 군터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공포에 휩싸였다. 군터는 바람을 거칠게 가르며 궁으로 말을 달렸다.

두려움에 떠는 군터와 달리, 마리아는 환희를 느꼈다.

“다시 말해 보아라. 내가 뭘 했다고?”

벌써 세 번째, 마리아는 궁의에게 묻고 또 물었다.

“왕비님께선 회임하셨습니다.”

“신이시여!”

마리아는 감격에 겨워 합장한 채 울고 있는 노라를 바라보았다.

“왕비님, 경하드립니다.”

노라도 마리아의 임신이 믿기지 않았다. 석녀라고 해서 저 자신도 마리아가 임신할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터가 돌아와서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내가 아이를 갖다니…….”

마리아는 떨리는 손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석녀’. 아주 오랫동안 제게 붙여진 꼬리표였다. 저만큼은 매번 부정하며 살았지만, 은연중에 저 자신조차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세상이 틀렸다.

“노라, 나는 석녀가 아니에요.”

“예예, 우리 왕비님께서 석녀라니요? 어느 쳐 죽일 놈이 그런 망언을 한답디까?”

“그 쳐 죽일 놈이……. 라스토니아에.”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노라의 말을 따라서 중얼거렸다. 너무 기뻐서 넋이 반쯤 나간다는 게 아마도 지금의 제 상태인가 보다. 머릿속에 얼음이 든 양 얼얼하기만 하달까.

“노라, 군터는 언제쯤 돌아오죠?”

마리아는 흥분으로 가슴을 들썩이며 물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기쁜 소식을 그에게 알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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