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마리아는 비로소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했다. 그녀는 궁의와 시녀를 물리곤 노라와 손을 맞잡은 채 한참을 울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임신하고서야 깨달았다.
“왕비님, 이젠 매사 조심하셔야 해요.”
노라가 두꺼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어렵사리 얻은 아이니, 열 달 동안 엄마 배 속에서 고이 키워야 할 터.
“에로가 돌아와서 이 소식을 알게 되면 기뻐하겠죠?”
“당연하죠. 모르긴 몰라도 어머머! 하면서 호들갑을 떨 겝니다.”
이제야 진짜 헬랜드의 왕비가 된 느낌. 지난번 군터에게 아이가 없어도 되느냐고 물었을 적,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그는 헨리 같은 남자가 아니라서 괜찮노라 했지만, 따져 보면 조금도 괜찮지 않았던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다. 아무리 대범해지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부분이 아이 문제인 듯했다.
“군터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마리아는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마도 몇 날 며칠 연회를 여실 겁니다. 한데 왕비님, 이른 질문이긴 하지만 왕자님과 공주님 중에 누굴 원하세요?”
“예? 벌……써요?”
노라의 이른 질문에 난감한 척을 하긴 했으나, 기분이 너무 좋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둘 다 원하지만, 그저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길 바랐다. 이런 마리아의 대답에 노라는 정답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 있는 노라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예, 제가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왕비님을 보살필 거예요.”
“고마워요, 노라.”
때마침 라모나가 분홍빛 머리를 나풀거리며 마리아를 찾아왔다.
“왕비님!”
라모나는 한달음에 달려와 마리아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경하드립니다.”
“고마워요, 라모나.”
그런데 스톤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축하해 줄 거라 여겼는데. 마리아는 라모나에게 스톤은 왜 오지 않느냐 물었다.
“아이처럼 울고 계세요.”
“!?”
마리아와 노라는 동시에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리아가 임신했는데 스톤이 왜 우는지 선뜻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제가 왜 우시냐고 여쭤봤더니……!”
“여쭤봤더니?”
노라가 조급한 얼굴로 라모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행복해서 우신대요.”
“아, 행복해서……. 그럴 수도 있지.”
그제야 마리아와 노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정령인 스톤이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주책맞지만, 난 솔직히 지금 춤이라도 추고 싶다니까.”
노라가 안달복달하자, 라모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제가 신나는 연주를 해 드릴까요?”
“네가 어떻게?”
“제가 요즘 스톤 님께 약간의 마법을 배우고 있거든요. 악기 연주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려, 한번 해 봐.”
노라의 말에 라모나가 주문을 외우며 몸을 빙그르르 돌리자, 신나는 악기 연주가 흘러나왔다.
“너무 신기해요.”
마리아가 감탄할 사이도 없이 노라의 손에 이끌려 춤을 췄다.
“왕비님께선 신나도 몸을 조금만 움직이세요. 저는 거침없이 흔들어 줄 거예요.”
세 여자는 파티에 초대된 영애들처럼, 아니 그들이 이렇게 요란하게 춤을 출 리는 없으니까. 알 수 없는 몸놀림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춤을 추었다.
* * *
군터는 궁에 돌아와서도 마리아에게 먼저 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스톤을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문 앞에 이르자, 서늘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스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톤은 다급하게 자신을 찾았던 것과 다르게 아주 담담해 보였다.
“군터, 일이 아주 복잡하게 됐다. 아니지, 내가 정령으로서 좀 더 일찍 예측했어야 했는데…….”
스톤은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군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스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이제라도 방법을 찾아.”
스톤의 어깨를 쥔 군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제 심장은 불에 타는 중이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스톤, 막을 수 있잖아?”
군터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은 조금 미뤄 둘 참이다. 급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사실 저 자신도 처음 스톤에게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스톤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 신을 저주하며 몇 날 며칠을 소리 없이 통곡하기도 했다.
[마리아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 거야. 마리아는 어떤 남자를 만나든 황후의 운명을 타고난 여자야. 그런데 그 운명이 너무 버거워서 아주 짧고 굵게 살다가 갈 거다.]
[신이란 것들은 정말 개 ×같은 존재들이다.]
당시에도 길길이 날뛰며 흥분했었다.
[그래도 방법은 있어. 군터가 마리아를 임신시키지 않으면 돼.]
[이미 했다면?]
[그때는 선택을 해야겠지.]
선택은 무슨……! 이미 답은 정해진 것을. 백 번을 물어도 자신은 아이가 아닌 마리아를 택할 터였다. 그래도 마리아를 아프게 하는 일 따윈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되도록 빨리 해결해.”
“그래.”
군터가 입술을 질끈 깨물곤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문제가 남았다. 마리아에게 자신의 잔혹한 운명을 말해 주느냐, 아니면 쥐도 새도 일을 처리해서, 그런 고난은 인생에 한 번쯤은 겪을 만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느냐가 문제였다. 둘 다 그녀에게 크나큰 고통이 되겠지만 군터는 후자가 낫다고 여겼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리아한테 너는 아이를 가져선 안 된다는 운명이라고 말하는 건, 정말이지 잔인한 짓이야.”
“그렇지.”
그래도 군터는 조력자가 필요한 터였다. 마리아한테는 비밀로 해도 노라한테만큼은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할 듯싶었다. 그래야 마리아가 살 수 있도록 도울 테니까.
“그건 내가 말할게.”
스톤이 이미 군터의 마음을 읽곤 대답했다. 아직 라모나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참에 두 여자한테 도움을 청할 참이다.
* * *
에로는 어두워진 눈으로 서신을 읽었다. 곧 곁에 있던 모니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에요, 에론?”
“부모님께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고 돌아오랍니다.”
“돌……아오라고요?”
이번엔 모니카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가 키르탄으로 돌아간다니. 혹여 자신을 두고 가면 어쩌지?
“모니카, 같이 갈 거죠?”
“네……? 아, 그……럼요. 같이 갈 거예요.”
모니카는 지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온 기분이었다. 사실 요즘 오십 평생을 살면서 제게 처음 찾아온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라스토니아의 황후가 된 건, 엄연히 정략적인 일이라서 남편과는 아무런 사랑이 없었다. 오히려 사이가 안 좋았지.
그런 탓에 그 허탈함을 다른 남자들로 채우려 했고, 불행하게도 제겐 진실한 사람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에론은 달랐다. 비록 저보다 나이는 아주 많이 어리지만, 모든 면에서 성숙한 남자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열망하던 완벽한 이상형이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가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에로는 고개를 떨구곤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모니카는 그가 무얼 신경 쓰고 있는지 너무 잘 알았다. 헨리의 인장을 빌려 가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나서 저러는 것일 테지. 그런데 뭐, 선황후가 잠시 맡아 두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어차피 인장은 자신이 키르탄에 가져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가져오면 될 터였다.
“에론,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인장을 가져올게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모니카가 곤란해지는 건 싫습니다.”
에로가 난감한 얼굴로 도리질했다.
“어차피 인장만 잠시 보여 주는 것뿐이잖아요?”
“네, 키르탄은 아직 인장을 만들지 않아서 역사가 오래된 제국의 인장을 보고 제대로 만들 계획입니다. 그런 연후에 키르탄만의 인장을 대륙 법원에 등록하게 되면 제 할 일은 다 끝납니다.”
“내가 적극 도울게요. 저도 키르탄의 왕자비로서 도움이 되고 싶어요.”
“사랑하는 모니카…….”
에로가 그녀에게 격렬하게 키스하자, 모니카는 욕정에 휩싸여 에로의 목덜미에 애무하려 했다.
“안 돼요! 모니카!”
에로는 화들짝 놀라며 모니카한테서 몸을 뗐다.
“왜……요? 우린 어차피 혼인할 사이고 서로 사랑하는데……!”
“저는 키르탄의 관습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아요.”
“!?”
“모니카는 모릅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하루에도 짐승 같은 본능이 수도 없이 치밀지만, 성스러운 나의 신부를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습니다.”
“에론…….”
모니카는 감격한 얼굴로 에로를 바라봤다. 이제껏 그처럼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남자는 없었다. 죄다 몸뚱어리 먼저 들이대기 바빴지. 한데 에로는 제게 정성스레 공을 들이며 아껴 주고 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이런 거였다니.
“알겠어요. 우리의 첫날밤을 위해서 참을게요.”
“나의 착한 모니카.”
에로는 모니카의 손등에 키스하며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뭐야 뭐야, 너무 힘들잖아, 정말……!’
* * *
마리아는 군터의 품 안에 뛰어들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군터, 제가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그래.”
그의 입에서 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석녀라고 손가락질당할 때마다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처럼 아팠어요. 그런데 세상이 틀렸어요. 제가 옳았단 말이에요.”
오랜 세월 간직한 마리아의 깊은 설움이 폭풍 같은 눈물로 터져 나왔다. 군터는 그런 마리아를 보며 당장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감동에 북받친 마리아에게 곧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잔인한 짓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 너무 행복해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마리아의 말에 군터는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몸에 힘을 주며 간신히 버텼다. 그는 마리아의 머리에 얼굴을 묻은 채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이내 마리아가 군터를 살짝 밀어냈다.
“자아, 봐요. 제 머리.”
“금발이잖아.”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마리아가 임신하면서 머리 색이 예전의 금발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터.
“이건 매우 상징적인 일이에요. 잿빛 머리가 제가 겪은 고통이었다면 금발은 잃어버렸던 행복이 돌아오고 있다는 의미라고요.”
마리아의 말에 군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이자,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군터, 왜…… 그래요?”
“응? 뭐……가?”
“군터는 기쁘지 않아요?”
마리아가 불안한 얼굴로 군터를 쳐다보았다.
“기쁘다.”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기쁘다. 하지만…….’